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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예술가들, 어디까지 진짜?

ARTNOW

예술가의 삶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있다. 그런데 영화 속 예술가와 실제 예술가 사이엔 얼마나 큰 간극이 있을까? 영화라는 환상의 옷을 입고 새로 태어난 역사 속 예술가들의 어떤 엔터테이너적 일대기.

얀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고리 소녀’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얀 페르메이르가 건네는 환상,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이목구비가 매력적인 한 소녀가 있다. 소녀는 가세가 기울자 어머니 품에서 벗어나 낯선 저택의 하녀로 들어간다. 청소 도구를 짊어진 채 미로 같은 저택 구석, 오직 집주인만 드나들 수 있는 방으로 향하는 소녀. 뻔한 할리우드 영화라면 이제 격정 멜로가 펼쳐질 차례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2003년)가 예상과는 좀 다른 길을 걷는 건 ‘주인아저씨’의 직업 때문일 것이다. 주인아저씨는 다름 아닌 얀 페르메이르,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의 황금기를 이끈 화가다. 사실 영화는 페르메이르의 실제 삶보다 원작 소설 <진주 귀고리 소녀> 속 풍경을 재현하는 데 온 힘을 쏟는다. 글도 읽을 줄 모르는 가난한 소녀 그리트가 거장의 가장 유명한 피사체가 되기까지, 각각 그리트와 페르메이르를 연기한 스칼렛 요한슨과 콜린 퍼스가 마주한 모든 에피소드는 원작자가 추리해낸 일종의 환상인 셈이다. 페르메이르의 삶이 다른 대가들에 비해 유독 베일에 싸여 있긴 하지만, 역사적 진실과 허구 사이에서 영화가 던지는 가설은 지나치리만치 대담해 보인다. 수많은 페르메이르 연구가들이 원작 소설 자체를 비난한 건 그래서다. 다만 피터 웨버 감독은 고작 30여 점의 작품을 남긴 천재 화가의 실체 대신 그의 화폭 속 눈부신 빛과 색조를 스크린에 섬세하게 구현해냈다.

문제적 작가 잭슨 폴록을 조명한 <폴락>

에드 해리스의 잭슨 폴록 되기, <폴락>
대중은 예술가에게 묘하게 관대한 면이 있다. 적어도 윤리와 상식의 선에서는 말이다. 난잡한 사생활이나 도를 넘어선 광기 같은 것도 ‘예술가적 기질’이란 말로 포장하면 얼추 그럴싸해진다. 실제로 천재 타이틀을 단 무수한 예술가가 그런 식의 광기를 보여줬다. 잭슨 폴록은 ‘그중 하나’라기보다 어쩌면 ‘그것을 이끈’ 인물에 가깝다. 영화 <폴락>(2000년)이 충실히 재현했듯, ‘미술계의 제임스 딘’이라 불린 이 문제적 화가는 한 편의 사이코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았다. 이기적이면서도 자학적이고, 극도로 예민한 주정뱅이. 다만 감독과 주연을 겸한 에드 해리스의 영화에선 폴록의 삶과 예술이 함유한 더 많은 것이 생략되어 있다. 그가 영화 속에 처음 나타나 “빌어먹을 피카소!”를 외치기까지, 오랜 시간 다져온 예술적 토양과 세계관의 골격이 사라진 상태에서 갑작스레 천재 화가의 탄생을 지켜보는 건 다소 허무한 일이다. 예술과 정치가 얄궂게 손잡은 시대상에 대해서도 영화는 모르는 척 눈을 감는다. 그 대신 에드 해리스는 폴록의 아내이자 헌신적 조력자인 리 크래스너와의 관계를 전면에 내세우며 그의 내적 기질과 고뇌, 캔버스 위를 유영하는 시선이나 움직임을 비교적 선명하게 담아낸다.

멕시코의 여류 화가 프리다 칼로의 일생을 조명한 <프리다>

프리다 칼로 혹은 고통의 초상, <프리다>
흔히 ‘여류 예술가의 삶’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여성의 지위를 둘러싼 시대적 한계, 치명적 연애담과 불우한 결혼 생활, 결핍과 고독을 예술로 승화시킨 열정 같은 것 말이다. 앞에 ‘위대한’이란 형용사가 붙으면 그런 이미지는 좀 더 분명해진다. <까미유 끌로델>(1988년) 같은 영화가 양산한 불우한 여류 예술가의 초상. 분명 프리다 칼로는 그 정점을 찍은 인물이다. <프리다>(2002년)가 그녀의 고통에 집중하는 건 그래서 타당한 수순처럼 보인다. 끔찍한 교통사고로 온몸이 산산조각 나고, 무책임한 남자를 사랑하며 반복되는 분노와 좌절에 생을 헌신한 여인. 여성 감독 줄리 테이머와 여배우 셀마 헤이엑은 그 외적·내적 고통을 통로 삼아 프리다의 삶과 예술을 스크린에 펼쳐낸다. 브로드웨이 출신 감독의 입체적 연출과 멕시코 출신 스태프들이 재현한 원색의 강렬함이 절규하는 듯한 그녀의 작품들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물론 프리다의 예술은 고통 속에서 피어난 꽃만은 아니었다. 당대 멕시코에 휘몰아친 혁명의 깃발이었고, 억압받는 이들을 위한 찬가였다. 영화는 그녀의 ‘고통’에 몰두하느라 남편 디에고 리베라를 제외한 무수한 만남과 사상적 연대, 그로 인한 작품 세계까지 충실히 담아내진 못했다.

앤디 워홀과 그녀의 연인 에디 세즈윅의 실화를 소재로 만든 <팩토리 걸>

앤디 워홀의 뮤즈로 산다는 것, <팩토리 걸>
앤디 워홀이 고백한다. “1960년대에 다른 누구보다도 나를 매료시킨 사람이 있다. 그때의 감정은 아마도 사랑에 가까웠던 것 같다.” 조지 하이켄루퍼 감독의 <팩토리 걸>(2006년)은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과 세기의 아이콘 에디 세즈윅의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다. <비닐>(1965년), <뷰티 넘버 투>(1965년), <말>(1965년) 등의 실험 영화를 함께하며 당대 ‘언더그라운드의 여왕’ 자리를 꿰찬 워홀의 뮤즈. 그러나 에디는 스스로 충분히 타오를 수 있는 지적이고 재능 있는 여성이기도 했다. 영화는 후반부로 향하며 몰락하는 그녀를 일종의 대체 가능한, 예술적 제물로 산화시켜버린다. 가장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도 끝내 예술가의 일원이 되지 못한 에디의 고독을 ‘가련한 여인’의 도식으로만 풀어내는 건 다소 안일한 처사다. 스타 뮤지션 빌리 퀸과의 로맨스를 그리는 동안 실제 이 캐릭터의 모델인 밥 딜런의 매력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점도 아쉽다. 다만 <팩토리 걸>은 워홀의 창작 원천인 팩토리와 1960년대 뉴욕을 점령한 언더그라운드 예술계의 풍경을 묘사하는 데는 무척 탁월하다.

프란시스코 고야가 ‘제3자’로 등장하는 <고야의 유령>

프란시스코 고야는 무엇을 보았나, <고야의 유령>
종교재판과 전쟁의 피비린내로 가득한 18세기 스페인. 프란시스코 고야는 분명 그곳에 살았다. 그는 당대의 명성 높은 궁정 화가였고 귀족과 왕족, 교회와 침략자들에 이르기까지 누구든 돈만 주면 그림을 그려주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고야는 어두운 밀실에 숨어 부패한 권력의 이면과 전쟁의 참상을 기록한 날카로운 풍자화가이기도 하다. 밀로시 포르만이 연출한 <고야의 유령>(2006년)은 실제 그의 그림이 남긴 이중성, 즉 화가에게 주어진 ‘시대의 증인’ 혹은 ‘고발자’로서의 역할에 집중한 영화다. 이 작품에서 고야는 주인공이 아니고, 그의 생애 전반이나 화가로서 전성기, 화풍의 변화에 대한 친절한 해석도 기대하기 어렵다. 그 대신 감독은 아름다운 소녀 이네스와 타락한 신부 로렌소라는 가공의 인물을 엮어 드라마를 만들고, 제3자인 고야의 시선을 통해 스크린이라는 거대한 화폭에 당대의 역사적 비극을 담아냈다. 종교재판소에 끌려간 이들이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해 거짓 자백을 할 때도, 민중의 자유를 되찾겠다던 나폴레옹의 군대가 스페인 민중을 무자비하게 학살할 때도 고야는 늘 역사의 모서리에 서서 맹렬히 그림을 그렸다. 가공의 캐릭터에 영혼을 불어넣은 이네스 역의 내털리 포트먼과 로렌소 역의 하비에르 바르뎀의 연기도 일품이지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까지 시선을 압도하는 고야의 작품들이 이 영화를 존재하게 하는 진짜 이유다.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