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 Follows Safety
자동차 디자인이 변화하고 있다. 전 세계 카 디자이너들이 진통을 겪으며 이끌어가고 있는 변혁, 그 이면엔 ‘안전’이라는 키워드가 숨어 있다.
1886년, 미국의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고 정의했다. 96년이 지난 1982년엔 제품 디자이너 헬무트 에스링거가 “형태는 감정을 따른다(Form Follows Emotion)”고 뒤집었다. 그리고 작금의 자동차 디자이너들은 말한다. “형태는 안전을 따른다(Form Follows Safety)”고.
발단은 전 세계적으로 시행 중인 보행자 안전 규정이다. 자동차가 사람을 치었을 때 상해를 최소화한다는 게 주요 골자다. 앞으로 불쑥 돌출된 범퍼가 들어간 것도, 보닛 위에 자존심처럼 올리던 후드톱 엠블럼이 없어진 것도, 납작하고 늘씬한 보닛이 사라진 것도 모두 그 때문이다. 보행자의 머리가 보닛 위로 떨어질 때 충격을 흡수할 수 있도록 보닛이 점점 두툼해진 것이다.
보행자 안전 규정은 앞부분을 커다란 애드벌룬처럼 둥글게 만들라고 종용한다. 돌출된 것은 골절 등의 상해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전면부에 유리나 금속 등 딱딱한 재질을 사용하는 것도 자제해야 한다. 약간 말랑거리는 플라스틱으로 충격을 흡수해야 보행자를 보호할 수 있다. 벤틀리가 100년 가까이 고수해온 금속 라디에이터 그릴을 포기한 것도 그 때문이다. 실제로 플라잉 스퍼와 콘티넨탈 GT의 라디에이터 그릴은 금속이 아니라 플라스틱에 도금을 입힌 것이다.
전면부가 공처럼 둥글게 획일화되면서 자동차 디자이너들은 전면에 더욱 강한 얼굴을 그려 넣고 있다. 헤드램프 속에 현란한 LED를 집어넣는 것, 라디에이터 그릴이 점점 커지는 것도 모두 그 때문이다. 커다란 라디에이터 그릴은 그 속에 크고 뜨거운 엔진이 들어 있다는 걸 암시한다. 하지만 너무 많은 공기구멍을 뚫으면 공기역학 성능이 저하되면서 효율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요즘 차에 ‘가짜’ 공기구멍이 많이 들어가는 이유다.
1,2 메르세데스-벤츠 신형 E클래스의 바뀐 헤드램프 3 벤틀리 콘티넨탈 GT 스피드 컨버터블 4,5 폭스바겐 뉴 비틀은 센터페시아 옆쪽에 꽃을 꽂을 수 있는 감성적인 디테일로 여자 운전자의 호응을 얻었지만(4번 사진), 2012년 출시한 3세대 더 비틀은 안전 규정 때문에 이 꽃병이 사라졌다. 6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생명으로 여기는 람보르기니는 디자인 변화보다는 안전 시스템 개발을 선택했다. 실내에도 에어백을 더 많이 넣고 사점식 안전벨트를 설치하는 우회 수단을 모색하고 있다.
보행자 안전 규정 외에 등화 규정 역시 디자이너들의 덜미를 잡고 있다. 최근 유럽에서 발표한 등화 규정에는 일정 속도 이하로 달릴 때 핸들 돌리는 쪽을 밝게 비추도록 권장하고 있다. 역시 ‘안전’을 위해서다. 메르세데스-벤츠는 이 규정 때문에 매우 큰 수술을 강행해야 했다. E 클래스에 수년 동안 적용해온 분리형(4등식) 헤드램프를 버리고 기다란 헤드램프(2등식)를 붙인 것. 메르세데스-벤츠 관계자는 “옆을 여유롭게 비추기 위한 조치였으며, 각각의 램프를 강조한 E클래스의 아이덴티티는 LED 주간 주행등으로 더욱 드라마틱하게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외부 형상만 안전 규정의 영향을 받는 건 아니다. 자동차의 실내에도 안전을 위한 여러 규정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실내 디자인과 안전에 대한 본격적 스토리는 1970년대에 일어난 ‘볼펜 사건’으로 시작된다. 당시 자동차에는 조수석 앞에 휴지나 메모지 등을 놓을 수 있었는데, 여기에 볼펜을 꽂아두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차가 급정거했고, 조수석에 타고 있던 동료가 고개를 앞으로 숙이면서 필기구에 눈을 찔려 실명하는 사고가 있었다. 이후 조수석 앞에 아무것도 올려놓을 수 없게 디자인하라는 규정이 생겼다.
이후 자동차 실내에서도 ‘돌출 부위를 없애라’는 특명이 떨어진다. 머리 크기의 공을 이리저리 옮기며 돌출된 부위를 찾아내 뭉툭하게 다듬어야 했다. 머리가 닿을 수 있는 곳을 둥글게 만들어 만일의 사고에 대비하는 것이다. 이런 규정은 디자이너들에게 그리 반갑지 않다. 날렵한 라인, 날카로운 모서리로 정교함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을 애초에 접어야 한다.
최근 자동차 디자인은 또 다른 변혁을 예고하고 있다. 2018년부터 유럽을 중심으로 적용될 안전 규정엔 매우 가혹한 수준의 요구 조건이 포함돼 있다. 실내 디자인에 대한 규정이 특히 강화되면서 모든 버튼과 모서리, 송풍구까지도 둥글게 다듬어야 한다. 르노나 푸조처럼 둥근 디자인을 많이 쓰던 회사는 어떻게든 적용할 수 있겠지만, 폭스바겐이나 아우디처럼 네모난 버튼을 주로 쓰는 브랜드는 이를 어떻게 극복할지 고민이 많다. 송풍구까지도 말랑말랑한 재질로 만들어야 해서 벤틀리처럼 금속 송풍구를 쓰는 차는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안전 규정은 날로 가혹해지고 있다. 하지만 자동차 디자이너들에게 돌파구는 있다. 자동차 디자이너들은 안전을 위한 신기술이 속속 개발되기를 바라고 있다. 전문가들은 보행자를 감지한 순간 자동으로(강제적으로) 멈추는 장치가 실용화되면 디자이너들에게 엄청난 자유가 주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실제로 람보르기니나 페라리의 경우 보행자 안전 규정에 맞춰 전면부를 공처럼 둥글게 만들기보다 이런 안전 시스템을 개발해 보행자 안전 규정을 만족시키려 하는 분위기다.
에디터 이정주(프리랜서)
글 장진택(자동차 칼럼니스트, <카미디어> 대표 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