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LETTER

노블레스 매거진의 뉴스레터를 신청해보세요.
트렌드 뉴스와 이벤트 소식을 가장 빠르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닫기

스페인 식탁에서 디자인을 외치다

LIFESTYLE

늘 먹던 방식대로 음식을 먹는 것은 덜 매력적이고, 덜 도발적이고, 덜 장난스럽고, 덜 인상적이며, 덜 심미적이다. 그렇다면 보다 매력적이고 진취적이며 유머러스하고, 심미적으로도 충만한 식사를 즐기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자유분방함과 상상력이 넘치는 스페인 식탁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당신의 창조적 영감을 일깨워줄 스페인의 주방 예술 속으로.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하루에 세 차례씩 행하는 식사라는 행위는 다양한 기술과 도구를 수반한다. 그리고 그 도구는 각각 고유한 기능이 있으며 단순히 먹기 위한 것 이상의 사회적 상징성과 가치를 대변한다. 즉 단편적 수단의 개념이 아니라 (식)문화의 영역이 된다. 앞으로 진지하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도구에 대해서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대체 얼마나 특별해야 가치와 의미를 논할 수 있는 것인가?
스페인의 음식 문화는 전통적으로 유럽에 속해 있으며, 그중에서도 대서양과 지중해 사이에 위치한 남유럽에 가깝다. 사실 수백 년 동안 스페인이 보유한 예의 도구라는 것은 초보적 형태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중세시대의 긴 검소와 절약의 터널을 지나며 답보 상태를 이어왔다. 귀족 사회나 왕실에서 반짝 ‘고급화’가 이루어지는 듯했지만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게다가 산업혁명도 한발 늦어 20세기 중반에야 비로소 산업 디자인이 태동했다. 그런데 왜 지금 우리는 식사 도구 이야기를 하면서 스페인을 찾는가?
누군가 당신에게 “세계 최고의 미식 국가는 어디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당신의 대답은? 혹시 ‘프랑스’라고 답한다면 이렇게 말해드리리. “전통 강호인 것은 분명하나 현재 1등은 아닙니다.” 오트 퀴진에 이어 누벨 퀴진으로 1980년대까지 프랑스가 미식계를 호령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1990년 이후 이 분야의 창조적 권력은 스페인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 권력의 핵심에는 엘불리 레스토랑의 페란 아드리아가 있다. 카탈루냐 코스타브라바 지역의 한적한 바닷가에 자리한 작은 레스토랑 엘불리가 세계 최고 레스토랑으로 우뚝 서게 될 줄 그 누가 짐작했을까. 2011년 7월 문을 닫고 스스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전까지 엘불리는 스페인, 아니 세계의 음식 혁명을 주도했다.

1 엘 세예르 데 칸 로카의 디저트 카트 2 허브 향이 나는 빨래집게 스푼. 엘불리 레스토랑의 루키 후버가 디자인했다. 3 열 성형한 투명 유리 위에 금속 스탬핑 처리한 그릇(New Barroque). 루에스마 & 베가 컴퍼니가 엘불리를 위해 만들었다. 4 액체가 튀어 오른 모양을 형상화한 볼(Skitx 1). 역시 엘불리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루에스마 & 베가 제품이다.

1 브리오슈 아이스크림 메이커, 옥시모론 2 무가리트스 레스토랑의 조형적인 센터피스. 반으로 자른 접시의 양면을 절묘하게 이어 붙였다. 3 호르디 에레라 셰프가 고안한 파키르쿡 그릴

셰프+디자이너=혁신
지금부터 한참 페란 아드리아 이야기를 할 거다. 왜냐하면 현대인의 창조적 식탁을 위해 그만큼 혁신적 도구를 디자인한 인물은 없을 테니까. 페란 아드리아가 요리에 접근하는 태도는 디자이너의 창의적 발상 과정과 거의 유사했다. 분석하고, 관찰하고, 연구한 다음 독창적 방법을 제안하는 것. 세상에 알려진 요리를 용납할 수 없다며 새로움을 추구한 것으로 유명한데, 이를 위해 음식에 과학적으로 접근해 변형시키는 이른바 ‘분자 요리’를 탄생시켰다. ‘셰프복을 입은 발명가’라고 불린 그는 자신의 주 영역인 레시피는 물론 주방 도구, 음식을 담는 그릇, 먹을 때 사용하는 도구까지 모든 것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따라서 아티스트나 디자이너와 함께 작업하는 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내 음식과 디자인을 서로 심오하게 결합한 최초의 셰프가 되었다.
첫 도전작은 1997년 리에라 가소 컴퍼니와 협업해 만든, 종이접기에서 모티브를 얻은 금속 프티푸 그릇. 1999년에는 산업 디자이너 헤마 베르날과 함께 올라(Ola) 테이블웨어 컬렉션을 출시했는데, 그때까지 일류 레스토랑에서 사용한 전례가 없는 사각 디자인으로 화제를 모았다. 2001년에는 스위스 출신 산업 디자이너 루키 후버를 아예 주방의 일원으로 영입했다. 그와의 찰떡궁합 덕분에 엘불리의 주방이 본격적으로 과학실험실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엘불리 라벨을 단 가짜 캐비아 캔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도 루키 후버의 공이 크다. 이때 사용한 것이 액체를 품은 상태로 구슬 형태를 만드는 구체화 기법이다(입에 넣으면 즙이 톡 터지는. 당시에는 혁신이었지만 지금은 흔한 방식이다). 2005년에는 세라믹 제조업체 CIM을 통해 유선형의 디너웨어 오! 루나(Oh! Luna)를, 이듬해에는 스페인의 대표적 유리 제조 공방인 루에스마 & 베가와 컬래버레이션해 압축 유리를 이용한 새로운 질감의 그릇을 만들었다. 이후에도 압축 종이, 실리콘 몰드, 갑각류 껍데기 등 소재와 디자인의 혁신을 이어갔다.
페란 아드리아의 영향으로 스페인의 셰프는 디자이너와 유기적 ‘협업’ 체제에 돌입하게 된다.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어워드에서 1위를 차지한 엘 세예르 데 칸 로카에서 만날 수 있는 화제의 디저트 ‘메시의 골(Gol de Messi)’은 안드레우 카루야의 손길로 탄생했다. 작은 화이트 초콜릿 조각이 잔디 속에 묻힌 둥근 골대 안으로 회전해 들어가는 모습을 기막히게 표현한 그는, 달콤한 맛에 대한 어른의 환상을 표현한 이동식 디저트 카트도 뚝딱 만들어냈다. 로카 형제가 운영하는 로캄볼레스크 아이스크림 가게의 히트 메뉴인 브리오슈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옥시모론(Oxymoron)이라는 기구도 개발했다. 브리오슈 빵을 갈라 아이스크림을 채우고 옥시모론에 넣으면 순간적인 열을 가해 가장자리를 붙여 완성된 모양을 만들어 준다. 바르셀로나에 위치한 마나이로 레스토랑의 호르디 에레라 셰프는 철침 박힌 그릴 파키르쿡(Fakircook)을 고안해 화제가 되었다. 먼저 바늘 끝을 불에 달군 후 그릴판을 뒤집어 준비한 식자재를 바늘에 꽂으면 순식간에 재료를 익힐 수 있는 제품. 음식이 중앙에서 바깥쪽으로 익기 때문에 육즙과 영양소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다.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 무가리트스의 안도니 루이스 아두리스 셰프가 아틀리에 라이아의 디자이너 산토스 브레가냐와 함께한 디자인 결과물은 거의 예술에 가깝다. ‘프런티어의 나무’를 뜻하는 레스토랑의 네이밍을 살려 디자인한 도끼 모양의 메뉴판, 반으로 자른 접시의 양면을 다른 각도에서 만나게 접붙인 센터피스의 조형미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베테랑 셰프 후안 마리 아르사크도 혼 로드리게스의 디자인 센스에 필립스의 기술을 결합해 불빛이 들어오는 그릇을 개발했다. 세련된 수식어를 보태자면 인터랙티브 그릇. 음식을 담으면 그 음식에 상응하는 소리와 진동, 빛과 움직이는 이미지가 그릇 표면에 나타나 다감각적 다이닝 체험이 가능하다. 1982년생 젊은 피, 페이스트리 셰프 파코 모랄레스는 2013년 마드리드 퓨전에서 2명의 건축가와 함께 3D 프린터를 이용해 그릇뿐 아니라 음식을 만드는 작업을 선보이며 차세대 혁신 주자를 자처하기도 했다.
요즘 셰프들은 디자인을 요리의 중요한 요소로 여긴다. 레스토랑의 테이블웨어를 직접 선택하는 것은 물론이고 디자이너를 초청해 공동 작업으로 조리도구와 식기, 메뉴판과 장식 소품까지 만드는 셰프가 늘고 있다. 이에 부응하기 위해 많은 산업·그래픽·인테리어 디자이너들도 개스트로노미에 초점을 맞춘다. 전 세계적 경향이지만 스페인에서 더욱 활발히, 뚜렷이 이런 양상이 나타난다. 그 이유를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다. 스페인은 미식 트렌드를 이끄는 세계 최고의 미식 국가니까.

1 과일에 직접 튜브를 꽂아 즙을 분사하는 시트러스 스프레이 2 워싱턴DC에 위치한 호세 안드레스의 할레오 레스토랑. 축구 게임대를 테이블로 활용한 센스가 돋보인다. 3 빵가루를 모아 새 모이로 활용하는 구멍 뚫린 도마 4 실리콘으로 만든 레쿠에의 찜기 5 레쿠에의 아이스 큐브

1 스페인 전통 물 주전자 보티호에서 영감을 얻은 라 시에스타 생수병 2 라파엘 마르키나가 디자인한 흘림 없는 올리브유병 3 넥타이를 그려 넣은 냅킨 4 입을 대지 않고 와인을 마실 수 있는 와인잔, 코포론

실용성과 위트 사이
사실 푸드 디자인을 말하면서 스페인을 선택한 중요한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세계 정상급 셰프들이 주도한 ‘혁신’으로 트렌디하면서 하이엔드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이룩한 동시에 평범한 대중 사이에도 음식을 즐기는 문화가 제대로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식품 산업은 스페인 전체 수출 산업에서 약 20%의 비중을 차지한다고 하는데, 그중 음식을 더욱 맛있게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주방용품의 비중이 크다. 실용성과 디자인, 나아가 환경 보존이나 에너지 절약 등 자원의 효율성까지 생각해서 만든 제품이다.
1995년 설립한 레쿠에(Lekue)의 경우 2013년 스페인의 국가 디자인상을 받은 대표적 주방용품 브랜드다. 웰빙 컨셉을 표방하는 이 회사는 소비자가 요리를 더욱 쉽고 재미있게 접할 수 있도록 플래티넘 실리콘 소재를 사용, 기발한 디자인과 과감한 컬러의 조합이 돋보이는 제품을 생산한다. 아사도르 알 바포르(Asador al Vapor)라는 찜기는 실리콘 재질의 특성을 살려 유연하게 상부를 여며 재료를 감싸는 스타일로 조리가 끝난 후 손쉽게 들어 바로 식탁에 올릴 수 있어 편리하다. 과일에 직접 끼워 내부에 장치한 튜브를 통해 즉석에서 즙을 분무하는 시트러스 스프레이(Citrus Spray)의 아이디어도 재미나다. ABS 플라스틱 소재 두 겹으로 만든 아이스큐브는 얼음 조각을 손쉽게 분리할 수 있으며 용기째 식탁에 올려놓아도 장시간 녹지 않고 유지하는 장점이 있다.
디자이너 쿠로 클라레트가 만든 빵 도마 미가스 파자로스(Migas-Pajaros)는 실용성과 함께 생태계를 생각한 휴머니티가 눈길을 끈다. 그가 디자인한 빵 도마에는 여러 개의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빵을 썰 때 나오는 부스러기가 자연스레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고, 이는 다시 도마 아래로 연결한 깔때기와 튜브를 거쳐 최종적으로 집 밖에 설치한 새 모이통에 안착한다. 새들과 나눠 먹는 빵 맛은 어떨까? 가슴까지 따뜻해지는 그런 맛 아닐까?
이쯤에서 스페인이 만든 세계 최고의 올리브유병 이야기를 해야겠다. 1961년 라파엘 마르키나가 디자인한 이 올리브유병은 삼각 플라스크에 뾰족한 주둥이를 연결해 한 방울의 올리브유도 흘리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가 엿보이는 제품이다. 실제로 그는 어려서 오일을 따르다 식탁 위에 흘릴 때마다 어머니에게 심한 꾸중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디자이너로서 오일병을 새롭게 디자인할 기회가 왔을 때 이 문제를 확실히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플라스크의 목 부분에 주둥이가 살짝 구부러진 피펫을 삽입해 사용 후 흘러내린 오일이 다시 병 속으로 들어가게 한 것이 포인트. 투명 용기라 내용물을 쉽게 확인할 수 있고, 베이스가 넓어서 실수로 쳐도 넘어지지 않으며, 따로 받침이나 마개가 필요 없으니 대체 일석 몇 조인가.
스페인 선조의 지혜가 엿보이는 주방용품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제품도 남다른 실용미를 자랑한다. 라 메디테라네아에서 만든 라 시에스타(La Siesta)는 흰색 테라코타 소재의 1.5l 생수병으로 전통적 물 주전자인 보티호(botijo)의 장점을 결합했다. 뒤편의 넓은 구멍으로 물을 넣고 앞쪽의 작은 구멍으로 물을 마시는데, 물이 좁은 입구를 통해 포물선을 그리며 나오기 때문에 입을 대지 않고 마실 수 있다. 입을 대지 않고 여러 명이 나눠 마실 수 있는 와인잔도 있다. 이름하여 코포론(Coporron). 오래전 카탈루냐 지방에서 개인 잔을 살 여력이 없는 가난한 가정에서 여럿이 위생적으로 와인을 마시기 위해 사용한 것이지만 지금은 재미를 추구하는 디자이너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재미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스페인 사람들이 식탁 위에서 오감 만족을 위해 가장 신경 쓰는 장치 중 하나가 바로 ‘위트’다. 냅킨을 무릎 위에 깔지 말고 당당히 목에 두르라는 의미로 넥타이를 그려 넣은 냅킨 드레스 포 디너(Dress For Dinner)를 만드는 사람들. 흔히 보편적 커피잔은 사람을 만날 때 손잡이를 내밀지만 부끄러운 듯 잔 속에 손잡이를 감춘 커피잔 티미다(Timida)는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난다. 빵을 구워 실제 사이즈로 만든 가구 판파티(Panpaati). 의자와 테이블의 쫄깃한 속살을 뜯어 먹는 재미는 어떨지 자못 궁금하다(물론 유통기한이 매우 짧다). 마레 모에렐이 디자인한 세라믹 식기 푸드 온 더 테이블(Food on the Table)은 그로테스크한 위트를 선사한다. 소 심장, 돼지 내장, 양의 뇌, 황소 불알 등 동물의 신체 부위를 본떠 주전자와 접시, 쟁반 등을 만들었기 때문. 위트에도 남다른 스케일이 있으니, 호세 안드레스 셰프는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FC 선수들의 미니어처가 들어 있는 축구 게임대 위에 유리를 얹어 손님용 테이블을 만들었다. 타파스를 먹으며 실제 테이블 축구를 즐길 수 있으니 완벽한 스페인의 문화 체험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에디터이재연 (jyeo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