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카의 새로운 터전
영국에서 온 세계적 큐레이터 제시카 모건은 낯선 나라의 새로운 미술 세계는 언제나 자신을 흥분시킨다고 말했다. 광주는 그 강도가 더했다는데, 한국 미술의 무엇에 그녀는 그토록 반한 것일까?
올해로 10회째를 맞이하는 광주비엔날레 전시 기획 총괄 디렉터로 테이트 모던 미술관의 큐레이터 제시카 모건(Jessica Morgan)이 선정됐을 때, 국내외 미술계 관계자 모두 기대한 것은 하나였다. 그녀가 지난 20여 년 동안 테이트모던 미술관을 비롯해 시카고 현대미술관 등 국제 미술계에서 선보여온 획기적이고 신선한 컨셉의 전시 기획력. 미국과 유럽 아티스트 중심에서 벗어나 중동, 남미, 아시아 지역까지 아우르는 열린 시야를 지닌 제시카 모건이기에 가능한 전시를 보고 싶어 했다. 디렉터로 선정된 후 1년 동안 10여 차례 한국을 방문하며 한국 미술계에 대해 처음부터 새롭게 공부했다는 그녀는 큐레이터의 학구적 면모를 중요하게 여긴다. 작품 설치로 한창 바쁜 광주비엔날레 현장에서 제시카의 발걸음을 잠시 멈춰 세웠다.
전시 기획 디렉터 제안을 받기 전부터 광주 비엔날레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나요? 어떤 계기로 함께하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물론이죠. 광주비엔날레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비엔날레고, 매년 전혀 다른 성격의 전시를 보여준다는 점이 저에겐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제안을 받고 작년 5월부터 한두 달에 한 번씩 서울을 방문하며 광주와 한국 미술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올해 비엔날레의 주제 ‘Burning down the House(터전을 불태우라)’가 흥미롭습니다. 공격적이기도 하고, 새 출발을 뜻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터전(house)은 아늑함, 편안함의 상징이니까요. 저는 이 주제가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모두 포함하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어요. 기본적으로 ‘불태우라’는 공격적인 면도 있지만 동시에 과거를 태우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뜻을 담았습니다. ‘burning’은 동서양 문화를 아우르며 축하, 종교 의식, 본질의 변화 등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house’도 마찬가지입니다. 집, 기관, 신체 등 많은 것에 대한 은유가 가능합니다.
광주비엔날레의 전시 기획을 맡은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인가요? 서울에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한국 미술에 대해 얼마나 아는 게 부족한지 깨달았어요. 큐레이터, 미술학자, 아티스트를 만나고 전시도 보면서 완전히 다른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죠. 처음에 생각해둔 주제가 있었는데 조사 과정을 거치면서 변경했죠. 해외 미술 관계자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한국 관람객이 많이 오는 행사인 점을 고려하고 광주라는 도시를 정치적, 사회적 맥락에서 이해하려 했습니다.
광주는 한국 사회에서 남다른 의미를 지닌 도시지만 외국인의 시선으로 볼 때는 과거의 일부로만 여길 수도 있죠. 비엔날레를 기획하면서 역사적 의미를 배제하려 했나요, 아니면 안고 가려고 했나요? 처음부터 광주의 역사적 의미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광주 비엔날레가 해외 비엔날레와 차별화되는 지점도 이것입니다. 단순히 유명한 관광 도시에서 열리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죠. 1980년대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뿐만 아니라 광주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저는 과거를 충분히 고려하는 동시에 광주의 현재와 지속성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밖에서 봤을 때와 직접 한국에 와서 본 한국 미술계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일단 국제 무대에 진출한 한국 아티스트도 적고, 작가를 소개하는 영어 출판물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대부분의 아티스트를 사람들의 추천을 통해 만났습니다. 다른 나라 미술계에는 어떻게 적응하고 접근할지 알고 있었는데, 한국은 이 부분에서 난항을 겪었죠. 하지만 300명 가까운 아티스트를 만나면서 한국 미술의 수준이 매우 높다는 걸 느꼈어요. 계속 연구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기간이 한정적이었죠.
광주비엔날레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미술계 바깥에선 많은 이들이 현대미술에 의구심을 품고 어렵다고 생각하죠. 광주비엔날레는 다수의 대중을 대상으로 하기에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잘 전달되기를 바라요. 그래서 전시의 내러티브에 신경 썼습니다. 같은 작품을 봐도 각자 다르게 반응하듯, 관람객의 반응을 예측하긴 힘들지만, 그래서 미술이 재미있죠. 미술 자체를 그대로 즐겼으면 좋겠어요.
획기적이고 실험적인 전시로 호평받는 스타 큐레이터라고 소개했습니다. 큐레이터로서 당신의 강점은 무엇일까요? 해외에서 활동하는 다른 큐레이터에 비해 남들이 잘 가지 않는 지역의 미술에도 관심을 갖고 직접 가보려 합니다. 저는 낯선 곳에 가면 설레고,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갖고 지켜봅니다. 기본적으로 항상 ‘나는 아직 아는 것이 부족하다. 모르는 것이 많아 늘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임합니다. 배우는 과정 자체를 즐깁니다.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다양한 스타일의 미술 작품을 접할 수 있는 직업에 종사하는 제가 운이 좋은 거죠.(웃음)
현대미술이 시장을 중심으로 움직이면서 옥션과 컬렉터의 파워가 세졌습니다. 이런 흐름 가운데 큐레이터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미술계가 패션 트렌드처럼 너무 빨리 변하고 있는데, 이걸 다시 제 속도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명작이라 불리는 작품은 아주 오랜 시간 사랑받고 가치를 인정받았죠. 이렇게 빨리 변하는 것은 미술계에도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큐레이터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필터링입니다. 넘치는 정보와 작품 속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집중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옥션과 컬렉터가 모두 한쪽만을 바라볼 때 큐레이터는 다른 방향을 제시하고 새로운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큐레이터는 확실한 기준을 세우고 독립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큐레이터십, 기획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예를 들어, 큐레이터는 아티스트의 집이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관광객처럼 구경하는 것에 그치면 안 됩니다. 그 이면에 숨은 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현대미술만 잘 아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미술사 전체에 대한 공부를 꾸준히 해야 합니다. 제가 하는 일은 미술관 소장 작품을 선정하고 구입하는 것인데 한번 들여오면 미술사의 일부를 만들어나가는 것이기에 매우 엄격한 기준에 따라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저는 큐레이터의 학구적인 면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전시를 기획할 때 대중의 기호는 얼마나 고려하나요? 기획은 신선하지만 아무도 보러 오지 않는 전시도 의미가 있을까요? 관람객이 많은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 광주가 흥미로운 것도 대중에게 열려 있고 많은 관람객이 보러 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단 한 명이라도 읽는 이가 있다면 의미 있는 책이라고 하듯 전시도 마찬가지죠.
책을 예로 들었는데, 책은 읽는 이가 줄어드는 데 반해 전시회는 불황도 없고 사람들이 꾸준히 몰리고 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요즘은 모두가 직접 얼굴을 보지 않고 아이패드, 스마트폰과 같은 기계로 소통하며 한 발짝 떨어져서 살고 있죠. 미술관에 가는 것은 작품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을 만나고 소통하며 문화적 경험을 공유하는 사회적 측면도 있습니다. 쇼핑몰이 아닌 이상 이 같은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찾긴 힘들죠. 전시는 커피 한 잔 마실 비용 정도만 있으면 됩니다. 전시는 결국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고, 대중은 그런 경험을 여전히 원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전시도 영화처럼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될 수 있을까요? 물론 엔터테인먼트적인 면도 있어요. 영화도 블록버스터, 독립영화, 예술영화 등 장르가 다양하듯 미술도 마찬가지죠. 피카소와 인상주의 화가의 전시에 늘 사람이 몰리지만, 관람객이 5명뿐인 무명 작가의 전시도 아름답고 진지한 의미를 전할 수 있습니다. 저도 광주비엔날레에서 그렇게 다양한 장르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광주비엔날레는 흥행에 성공하는 블록버스터가 될까요? 물론입니다! (웃음)
에디터 고현경
사진 이영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