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도와드립니다
젊은 영국 작가들의 살아 있는 신화 yBa, 그 뒤엔 ‘국가적’ 차원의 전략이 숨어 있었다. 어떻게 영국은 악동들의 장난스러운 작품을 ‘신화’로 만들 수 있었을까?
영국 현대미술의 부활을 이끈 데이미언 허스트와 그의 작품 <양떼로부터 저 멀리>
최근 영국예술위원회(Arts Council of English) 산하의 미술품 대출 사업 기관 온 아트(Own Art)의 웹 게시판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지난 10년간 영국에서 미술품을 구입하는 일반인에게 영국 정부가 무이자로 대출해주는 ‘온 아트 론(Own Art Loan)’의 누적 금액이 2500만 파운드(약 432억 원)를 기록했다고 말이다. 더불어 온 아트 론과 관련한 각종 수치를 차분히 소개했고, 온 아트 론의 런칭 10주년을 기념해 최대 2000파운드(약 350만 원)까지 가능하던 무이자 대출을 2500파운드(약 430만 원)로 상향 조정한다고 밝혔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 자, 아래 글을 좀 더 읽어보자.
산업적 관점에서 미술에 접근해 2004년 영국에서 출범한 온 아트 론은 18세 이상 영국 국민이 100~2500파운드짜리 작품을 구입할 때 영국 정부가 그 값을 10개월 무이자로 대출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영국 내 250여 개 갤러리에서 처음 시행한 이 프로그램으로 2005년 미술품을 구입한 영국 국민은 무려 490만 명(영국 국민 전체의 10~13%). 전문가들은 온 아트 론이 영국 미술계에서 데이미언 허스트, 채프먼 형제, 트레이시 에민 등의 yBa 군단을 키워낸 찰스 사치에 버금가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으며, 2008년부터 점차 증가해 마침내 지난해 최고점을 찍은 영국 대외 수출 미술품 시장의 숨은 견인차라고 평했다. 자, 이제 슬슬 이해가 가는가?
그럼 이번엔 한국의 경우. 2012년 4월, 국내 미술품 등록제 시행을 위해 노력하는 미술등록협회 김현동 대표는 국내의 수많은 미술가와 갤러리 그리고 미술 단체를 상대로 대규모 서명운동을 벌였다. 모든 국민이 미술품을 쉽게 구입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의 ‘정부 지원 미술품 무이자 대출 제도’에 대한 지지 서명이었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렇다. 모든 국민이 미술품을 손쉽게 구입하게 해 문화 예술 향유에 도움을 주고, 어려움에 부닥친 미술가들의 생계를 해결해 그들의 창조력을 고취시키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서명운동은 많은 미술인이 참여했음에도 결국 어떠한 반향도 일으키지 못하고 좌초했다. 재정과 시기의 문제였다. 정부의 신규 사업 편성엔 큰돈이 들어가기 마련인데, 그것이 예술 계통 사업이라면 재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자꾸 ‘빠꾸’시키는 데다, 우리나라 국민이 유럽처럼 ‘1가구 1미술품’의 ‘컨템퍼러리한’ 생활을 하는 건 아직 시기상조라는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의 박성필 주무관은 이 사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많은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수년째 건의하고 있지만, 법안 구성 단계에서 번번이 무너져버리는 게 현실입니다. 영화나 게임, 패션 분야에선 정부 투자 모태 펀드도 추진하는데 미술 분야만큼은 늘 예외죠. 저희 입장에서도 아쉽긴 마찬가지입니다.”
‘온 아트 캠페인’을 이용해 10개월 무이자로 미술품 구입이 가능한 브리즈아트페어
영국 현대미술의 상징인 테이트 모던 미술관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내 미술인들은 계속되는 장기 불황과 설상가상으로 덮친 양도세(지난해부터 6000만 원 이상의 미술품을 되팔 때 차익의 20%를 세금으로 부과하는 제도) 문제로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 이르렀다. 미술 시장을 살리는 것이(그 방법이 무엇이든간에) 침체한 미술계를 부양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많은 미술인이 정부를 향해 메들리 수준으로 노래를 불렀지만, 정부는 그저 귀만 아플 뿐이었다. 미술인들도 더는 영국과 같이 국가가 앞장서서 국민에게 문화 예술에 대한 달달한 의식을 심어주고, 해외에 자국의 문화를 알리고, 작가들의 작품을 정기적으로 구입해 창작 환경을 개선해주는 멋진 모습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나마 정부에서 구입한 미술품을 공공 기관이나 건물에 싸게 임대하는 ‘미술은행’이 시장에 버티고 있지만, 그 대상자가 일반인보다 정부 기관에 집중돼 있어 영국처럼 일반인이 미술품 향유에 대한 어떤 혜택도 보기 힘들다.
물론 국내 미술 시장에서 일반인이 온 아트 론 같은 프로그램을 아예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2010년 공정 미술을 지향하고 새로운 미술 유통을 실천한다는 취지로 설립한 ‘에이컴퍼니’의 경우 매해 한 차례 ‘브리즈아트페어’라는 자체 미술 마켓을 열어 신진 작가와 컬렉터를 발굴하는 건 물론, 영국의 ‘온 아트 론’과 비슷한 성격의 ‘온 아트 캠페인(Own Art Campaign)’을 만들어 일반인이 큰돈 들이지 않고도 편리하게 미술품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에이컴퍼니의 김한별 이사는 “관심은 있지만, 미술품을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작품을 소유하는 기쁨을 알려주고 싶고, 이제껏 페어에 온 사람의 60% 이상이 온 아트 캠페인을 통해 작품을 구입했다”며 국내 미술 시장을 활성화하려면 하루빨리 정부에서도 이런 프로그램을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국 미술 시장의 성장, 특히 yBa의 성공은 컬렉터와 국가적 지원 전략이 있어서 가능했다. 상을 주고 시상식을 생중계하고 대표적 미술관에서 작품을 전시하고, 또 정부 차원에서 작품을 소장하며 전시를 해 대중에게 알린 영국 정부의 노력도 무척 중요하지만, 역시 미술품을 사면 무이자로 대출해주는 파격적인 제도로 국민을 미술 시장으로 끌어들인 온 아트 론 같은 ‘신의 한 수’가 지금의 영국 미술 시장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미술 시장은 이제 겨우 구경꾼이 생겨난 수준이다. 따라서 지금은 국가 차원에서 잠재 고객을 만들고, 시장을 발굴하고, 시장 규모를 키워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미술품은 더 이상 사치가 아니라 생활의 반려임을 알려야 한다. 그러려면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초보 컬렉터든 다양한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특성화된’ 프로그램부터 생겨나야 한다. 악동들의 장난스러운 작품을 ‘신화’로 만드는 건 우리도 잘할 수 있다.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