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들의 연인
사랑에 빠진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그 사랑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마음. 예술가들은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을 화폭에 남겨 죽어서까지 그 사랑을 전하고 있다.
Portrait of Jeanne Hébuterne in a large hat, Oil on canvas, 54×37.5cm, 1918~1919 Private Collection
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
_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년)
1884년 7월 2일 이탈리아 리보르노에서 유대인 상인의 네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06년 파리의 몽마르트르와 몽파르나스에서 생활했으며, 전통을 재해석한 독자적 스타일의 조각과 회화, 드로잉을 열정적으로 작업했다. 그러나 방탕한 삶, 알코올의존증과 마약중독 등으로 인해 병세가 깊어져 1920년 1월 24일 자선 병원에서 3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런 그를 따라 연인인 잔 에뷔테른도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2013년 2월 6일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이 추정가를 훨씬 웃도는 4210만 달러(약 461억)에 낙찰됐다.
모딜리아니의 연인, 잔 에뷔테른
귀족적이고 수려한 외모, 코듀로이 재킷과 자줏빛 스카프, 늘 가지고 다니던 단테의 <신곡>. 동료들이 기억하는 모딜리아니의 모습입니다. 궁핍한 삶 속에서도 자유와 예술에 대한 열정을 추구한 모딜리아니는 전형적인 파리의 보헤미안이었습니다. 무절제한 생활과 질병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 인정받지 못한 예술가로 스러져가는 가운데 마지막 연인이자 완전한 사랑, 잔 에뷔테른(Jeanne Hébuterne)을 만났지요. 가톨릭 집안에서 보수적인 교육을 받고 자란 잔은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내면에 열정을 품은 여성이었습니다. 1917년 모딜리아니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열아홉 살 화가 지망생이었지요. 그녀는 열네 살 연상인 가난한 화가 모딜리아니와 사랑에 빠져 부모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둘 사이에 첫딸 잔 모딜리아니가 태어났지만 가족의 외면은 여전했습니다. 3년여에 걸친 짧은 사랑이었지만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했습니다. 모딜리아니가 죽은 지 이틀 만에 슬픔을 견디지 못한 에뷔테른은 부모님이 살던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했습니다. 당시 그녀는 둘째 아이를 임신한 만삭의 상태였죠. 몇 년 뒤, 두 사람은 페르라셰즈 묘지에 나란히 묻혔고, 에뷔테른의 묘비에는 ‘모든 것을 바친 헌신적인 동반자’라고 새겨졌습니다. 엄마와 이름이 같은 첫딸 잔 모딜리아니는 아버지에 대한 자료를 충실히 모은 <모딜리아니: 인간과 신화>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모딜리아니 스타일의 연인화란?
“그리운 이탈리아!” 아메데오 모딜리아니가 결핵으로 36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한마디입니다. 이탈리아 리보르노에서 태어난 모딜리아니는 사후에야 비로소 인정받기 시작한 화가입니다. 모딜리아니는 세계적 예술가를 꿈꾸며 22세에 청운의 꿈을 안고 예술의 수도 파리로 갔죠. 그러나 죽는 순간까지 고향을 잊지 못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의 작품 대부분이 주변 사람을 그린 초상화와 누드화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모딜리아니 스타일’의 대표적 특징이죠. 갸름한 타원형 얼굴, 기다란 목, 아몬드 형태의 눈, 좁고 긴 코, 꼭 다문 입술의 인물상이 그것입니다. 많은 이들은 이런 형태가 그의 조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모딜리아니는 조각가 브란쿠시를 만나 한동안 조각에 몰두했고, 마티스와 피카소 등 당시 파리에서 활동한 다른 미술가들처럼 아프리카 조각에 깊이 매료됐습니다. 그가 창안한 초상화 이미지는 르네상스에 영향을 준 14세기 시에나파의 화풍과 산드로 보티첼리 작품 ‘비너스의 탄생’의 고전미를 연상시킵니다. 이렇듯 모딜리아니는 조각 작업과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미술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화풍을 창안했습니다. 그는 “내가 추구하는 것은 현실도 아니고 비현실도 아니다. 나는 무의식, 즉 인간의 본능이라는 신비를 알고 싶다”라는 메모를 남겼습니다. 모딜리아니의 예술적 관심, 그 중심에는 다름 아닌 인간이 있었습니다. 그의 초상화는 단순히 외양적 닮음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모델의 영혼에까지 닿아 있는 화가의 강렬한 시선을 느끼게 합니다.
감상 포인트
‘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은 절제된 구성과 조화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우선 커다란 모자의 형태와 긴 타원형 얼굴이 눈에 들어옵니다. 모자의 챙 가장자리가 화폭 왼쪽에서 잘려 있고 옆으로 살짝 기울인 머리 때문에 모자도 오른쪽으로 약간 내려가 있습니다. 하지만 배경의 대각선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올라가며 이 무게감을 상쇄해줍니다. 가볍게 턱을 받치고 있는 가느다란 손가락과 팔로 이어지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느낌의 윤곽선을 보십시오. 긴 콧날, 경사진 어깨선 등 모딜리아니의 곡선은 그림 전체에 리듬과 볼륨감을 부여합니다. 그런가 하면 화폭의 색감은 어두운 색(검은색, 갈색, 짙은 녹색)과 밝은 색(노란색과 장밋빛) 사이 단순한 대비를 보여줍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청회색 눈입니다. 눈동자를 그리지 않은 눈은 마치 내면을 향해 모든 것을 초월한 듯 보입니다. 이 모든 것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그림 속의 잔은 우아하고 고요한 모습입니다. 모딜리아니가 연인 잔 에뷔테른을 그린 초상화는 약 25점이 전해 내려오는데, 각각의 초상화에서 그녀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며 에뷔테른의 소박하고 부드러운 성격이 엿보입니다.
글 | 김보라(미술평론가)
1 Emilie Floege, Oil on canvas, 181×84cm, Wien Museum Karlsplatz, Vienna, Austria, 1902
2 Hope I, Oil on canvas, 189.2×67cm, National Gallery of Canada, 1903
클림트의 두 여인 에밀리에 플뢰게, 마리아 치머만
_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년)
오스트리아 출신인 클림트는 빈 응용미술학교에서 회화와 수공예 장식을 공부했다. 1880년 말 빈 국립극장과 미술관에 장식화를 그리면서 건축과 미술계에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이후 인상파, 상징주의, 아방가르드 운동의 영향을 받은 그는 에곤 실레, 오토 바그너 등과 함께 ‘빈 분리파’를 결성해 활발하게 활동했다. 1918년 갑작스러운 뇌출혈과 심장발작으로 5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의 대표작으로는 ‘키스’, ‘유디트’, ‘프리차 리들러 부인’,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부인’, ‘부채를 든 여인’, ‘입맞춤’ 등이 있다.
왜 여인을 그렸나?
화려한 금장식, 다양한 색채로 에로틱한 그림을 그려온 구스타프 클림트. 그의 그림에는 사랑에 취한 듯 몽환적인 분위기의 여성이 등장합니다. 그림의 모델인 여인들과 자유분방한 관계를 맺은 클림트는 대부분의 모델과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클림트와 애정 관계에 있던 수많은 여인 중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단 2명. 클림트의 아이를 낳아 기르며 그의 이름 없는 모델로 살아간 마리아 치머만(Maria Zimmermann)과 클림트의 솔메이트로 잘 알려진 에밀리에 플뢰게(Emilie Floege)입니다. 이들은 클림트에게 너무나 다른 양상의 사랑이었고 클림트의 예술적 뮤즈로서 각기 다른 영향을 미쳤습니다.
클림트의 뮤즈, 마리아 치머만과 에밀리에 플뢰게
정신적으로 의지하며 절대적 신뢰와 깊은 사랑을 쌓은 에밀리에 플뢰게는 언니 헬레네가 클림트의 동생 에른스트와 결혼하면서 사돈 관계로 자연스럽게 친해진 사이입니다. 두 사람은 뜨거운 사랑을 나눈 연인이라기보다 작가와 후원자로서 끈끈한 관계였죠. 플뢰게는 17세에 처음 그의 모델이 되어 작품에 등장한 후 총 4점의 초상화를 남겼습니다. 클림트는 많은 여성과 작업하며 그들과 강렬한 사랑을 나누었지만, 1981년 심장발작으로 사망하기 직전까지 애타게 찾은 여인은 플뢰게였습니다. 그녀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중간중간 꾸준히 새로운 여성과의 사랑을 갈구했지만) 죽는 순간까지 우정과 애정이라는 이름으로 정신적 교감을 나누었죠. 이렇듯 플뢰게와 플라토닉한 사랑을 했다면 육체적·본능적·관능적 사랑은 마리아 치머만과 나누었습니다. 치머만은 플뢰게와 달리 노동계급 출신으로 16세에 모델로 처음 만난 후 곧 연인 관계로 발전했습니다. 그녀는 클림트의 아들을 2명이나 낳아 키우면서 한 여인에게 정착하지 못하는 클림트의 기질과 작가로서의 인생을 묵묵히 이해해준 여인입니다. 플뢰게와 클림트의 특별한 관계도 이해해줬죠.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플뢰게와 달리 치머만은 한 가정의 남편을 원하는 평범한 여인이었어요. 클림트는 두 여인과 수백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플뢰게에게 주로 본인의 시시콜콜한 일상과 기분, 생각, 작업, 사상 등을 전하며 조언을 구했다면, 치머만에게 보낸 편지엔 그녀와 아이들의 안부나 당부, 걱정 등에 대한 내용이 많았다고 합니다. 치머만은 사랑과 임신, 출산 등을 겪으며 그의 작업에 중요한 영감을 제공한 절대적 뮤즈였지만 한 번도 그와 온전히 함께할 수 없었던 슬픈 여인입니다. 플뢰게를 포함해 클림트의 여인은 대부분 그들의 실명을 제목으로 그린 초상화를 갖고 있지만, 치머만을 주제로 한 초상화는 한 점도 남지 않았고 그저 작품 속 한 여자 모델로 등장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감상 포인트
클림트가 활동한 시대에는 임신부의 신체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금기시했습니다. 그러나 클림트는 치머만이 임신한 후 적나라하고 현실적인 임신부의 나체를 자주 그리기 시작했죠. 당시 임신부의 신체에 꽂혀 있던 클림트는 젊고 날씬한 처녀보다 배가 불룩한 임신부의 모습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마음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1902년 둘째 아들 오트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사망하자 죽음을 연상시키는 어둡고 괴상한 형체를 그렸습니다. 치머만을 모델로 한 만삭 임신부의 나체와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을 대치해 ‘Hope I’이라는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그림 속 만삭의 여인은 악마의 모습을 한 남성들에게 둘러싸인 채 희망을 갈구하듯 창백한 얼굴을 돌려 정면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임신과 탄생 그리고 죽음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으며 동시에 클림트의 에로틱한 감정, 사랑과 섹스라는 알레고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플뢰게가 등장한 가장 유명한 초상화 ‘Emilie Floege’를 보면 그녀를 향한 클림트의 애정이 담뿍 묻어납니다. 오스트리아 상류층 출신인 플뢰게는 빈에서 사교계 최고의 의상실을 운영하며 세련된 삶을 산 신여성입니다. 작품 속 모습은 20대 후반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절로,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당당함과 기품이 느껴집니다. 당시 유행한(클림트가 주로 그린) 추상적이고 화려한 패턴이 아니라 패션에 민감한 플뢰게는 이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클림트에게 다시 그려달라고 투정을 부렸지만 클림트는 이 작품을 수정하지도, 다시 그리지도 않았습니다. 세상에 알려진 플뢰게 초상화 중 가장 마지막에 완성한 작품입니다.
글 | 황규진(큐레이터)
Atomic Leda, Oil on canvas, 61.1×45.3cm, Museo Dali, Figueres, Spain, 1949
레다로 변신한 달리의 그녀, 갈라
_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년)
1904년 5월 11일 스페인 피게라스에서 법무사인 아버지 살바도르 달리와 어머니 펠리파 도메네크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드로잉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달리는 마드리드의 아카데미아 산 페르난도에 입학한다. 달리는 초기에 입체파와 순수주의 등의 영향을 받았으나,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저서를 읽은 뒤 초현실주의에 매료돼 ‘기억의 영속’ 등 수많은 대표작을 그렸다. 갈라에게 푸볼 지역의 성을 선물한 달리는 1982년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에게 푸볼 후작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같은 해에 갈라가 세상을 떠나고, 7년 뒤 호흡기 질환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달리의 절대적 연인, 갈라
달리는 스스로 천재라고 말했으나 어떤 이들은 그를 정신병자로 여겼고, 한때 그의 지지자였던 앙드레 브르통은 심지어 ‘아비다 달러’, 즉 ‘돈에 환장한 사람’이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대화 도중에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고 웃음을 참지 못하는 등 비정상적인 행동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달리의 아내이자 모델로 매니저 역할까지 훌륭히 해낸 갈라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의 천재성이 꽃필 수 있도록 끊임없이 격려하고 위로해주었습니다. 갈라는 원래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의 아내였습니다.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의 애인이기도 했고요. 갈라, 엘뤼아르, 에른스트는 묘한 삼각관계 속에서 한때 같이 살기도 했습니다. 갈라와 달리가 처음 만난 건 달리가 엘뤼아르를 카다케스로 초대했을 때죠. 갈라는 초현실주의자들에게 무한히 매력적인 존재였나 봅니다. 달리는 갈라를 처음 본 순간 바로 빠져들었고, 다음 날 아침 아교와 산양의 똥을 섞은 향료를 온몸에 바른 다음 귀 뒤에 재스민꽃을 꽂고 옷을 찢어 가슴의 털을 노출한 채 갈라를 만나러 갑니다. 달리는 특히 그녀의 등에 매혹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갈라는 엘뤼아르와 헤어지고 달리를 받아들였습니다. 1932년 그들은 법적 부부가 되었고, 1952년 11월 엘뤼아르가 죽은 뒤 가톨릭식으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 뒤 평생을 함께했죠. 열 살 연상인 갈라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7년 뒤 여든의 나이에 달리가 그 뒤를 따를 때까지 달리와 갈라는 항상 붙어 다녔고 무슨 일이든 함께 했습니다.
감상 포인트
‘원자 레다(Atomic Leda)’는 제우스가 레다를 범하기 위해 백조로 변신한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달리와 갈라의 관계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작품 속 레다는 갈라, 백조는 달리를 상징합니다. 달리와 갈라 사이엔 자식이 없었지만, 제우스와 관계 맺은 레다는 2개의 알을 낳고 그 알에서 헬레네와 카스토르, 폴리데우케스, 클리타임네스트라가 태어납니다. 작품의 하단에 깨진 알의 껍데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헬레네가 깨어난 겁니다. 그렇다면 그림 속 갈라는 레다이자 헬레네입니다. 달리는 제우스이자 폴리데우케스가 되고요. 단순해 보이는 그림 속에 굉장히 복잡한 관계가 숨어 있습니다. 이런 복잡한 관계는 달리의 망상에서 비롯됐습니다. 달리는 요절한 형과 자신의 관계에 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의 관계를 대입해 카스토르, 즉 죽은 형의 망령을 헬레네, 즉 갈라의 사랑이 쫓아냈다고 믿었습니다. 이와 같이 달리의 갈라에 대한 절대적 믿음과 사랑이 작품 ‘원자 레다’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제목에 ‘원자’를 붙였을까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떨어진 사건이 달리에게도 영향을 줬죠. 달리는 핵폭탄의 파괴력에도 계속되는 생명의 탄생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달리 스타일의 초현실주의란?
기괴한 행동으로 악명이 높았지만, 달리 하면 역시 멋진 콧수염과 작품 속 축 늘어진 시계가 떠오릅니다. 달리의 흐물거리는 시계는 초현실주의 작품의 대표적 이미지입니다. 꿈과 같은 무의식 세계를 표현하는 초현실주의는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사물의 형태나 사물과 사물의 관계는 비현실적으로 나타냅니다. ‘원자 레다’에서도 레다, 백조, 책 등의 묘사는 사실적이지만 공간에 놓여 있는 사물의 상태는 비현실적입니다. 작품 속 모든 사물이 현실과 달리 공중에 떠 있으니까요. 그런데 달리의 초현실주의는 다른 화가들의 작품보다 조금 더 기괴하고 파격적입니다. 달리의 작품에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성적 묘사를 비롯해 배설물 등에 대한 적나라한 표현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가련한 게임’ 속 남자 바지에 표현한 배설물은 초현실주의 작가 사이에서 똥을 꿈의 이미지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거침없이 펼친 달리에게 때론 비난이 쏟아졌고 작품에 대한 폄하도 있었지만, 지금 달리는 최고의 초현실주의 작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글 | 김연주(미술평론가)
에디터 심민아
글 김보라(미술평론가), 황규진(큐레이터), 김연주(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