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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oman Masriadi_ 니오만 마스리아디

ARTNOW

일반적으로 미술계의 지식인층, 가령 미술관이나 기관, 비평가와 큐레이터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예술가에게 쉽게 족쇄를 채운다. 이들의 비평적 평가가 이루어지기 전에 상업적으로 성공한 예술가의 경우, 이유를 불문하고 공정한 비평이나 평가를 받을 기회조차 잃게 된다는 의미다. 인도네시아 작가 니오만 마스리아디(Nyoman Masriadi)가 그 좋은 사례다. 지난 수년간의 상업적 성공은 마스리아디에 대한 미술계의 평가를 극도로 양분화했다. 미술 시장에서의 성공과 무관하게 그의 작품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니아층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그의 작품을 단순히 상업적이라고 치부해버리는 부류도 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동남아시아’라는 세계는 서구 미술의 잣대로 평가할 수 없는 역사와 특성을 간직하고 있다. 이 세계에 있는 예술가에게 서양 현대미술의 역사나 이론은 중요하지 않고 관심의 대상도 아니다. 그들의 미술을 서양 미술의 담론으로 설명하려 할 때 큰 오류에 빠지게 되는 이유다. 마스리아디의 작품은 그런 이유로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봐야 한다.

니오만 마스리아디는 소위 동남아시아 미술계가 인정하는 최고의 인기 작가다. 1973년 발리에서 태어난 그는 힌두교와 불교, 이슬람 문화가 조화를 이룬 인도네시아 욕야카르타(Yogyakarta) 미술대학을 졸업한 후 그곳에 남아 묵묵히 자신의 예술 세계를 펼치는 소신 있는 아티스트다. 1990년대 중반 인도네시아가 정치적 혼란에 빠졌을 때 그는 여느 젊은 예술가들이 그렇듯 반정부적 미술에 참여해 중요한 대표작을 남기기도 했다. 수하르토 정권이 무너지고 인도네시아가 안정을 찾을 즈음 마스리아디는 정치적 미술에 등을 돌리고 개인적 심리학이라는 주제에 몰입하면서 2000년대 중반 아시아 미술 시장의 폭발과 함께 떠오른 소수의 슈퍼스타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마스리아디는 말없는 외톨이, 외골수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풍부한 유머와 날카로운 풍자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로서 마스리아디는 세상에서 약간 동떨어져 있다. 마치 상처받지 않기 위해 숨어 지내는 열대의 동물처럼. 그는 미술 시장에 대해서도, 미술계의 정치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관심도 없다. 상업적 성공으로 수많은 오해와 비판의 표적이 되었지만 그는 그런 폭풍에 개입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와 만나기 전 그의 지난날에 대해 많은 질문이 샘솟았지만 막상 그를 독대하자 ‘마스리아디라는 사람은 결코 상처와 오해 때문에 흔들릴 만큼 세련되지도, 미련하지도 않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2013년 1월, 니오만 마스리아디를 그의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인도네시아 현대미술의 중심인 욕야카르타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에는 밑바탕만 칠한 검은 캔버스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의 작업실에서 클로브 향 그윽한 크레텍(인도네시아 담배)을 함께 태우며 늦은 밤 인터뷰가 이루어졌다.

1 Nyoman Masriadi, I Am So Good, 2012, 2x3m, Acrylic on canvas.
2 Nyoman Masriadi, Prepare, 2012, 300x200cm.

어떤 계기로 예술가가 되기로 결정했나요? 우리 집은 예술가 집안이었어요. 아버지가 발리 전통 공예 조각가였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저는 아버지의 직업을 좋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통해 예술가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제 아버지의 작품은 단순한 공예가의 작품이 아니라 자신만의 무언가를 더한, 예술과 공예의 사이에 위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공예가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굳이 제가 공예가가 되길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발리에서 다닌 예술고등학교의 미술 수업은 전통 발리 스타일 공예와 근대 서양식 미술로 구분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당신은 서양식 미술을 선택했는데, 당시 예술가라는 직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나요? 이상적인 예술가상이 있었나요? 당시 저는 현대미술이 아니라 근대적 미술 교육을 받았습니다. 모던아트라고 하지요. 당시 발리에 살고 있었지만 아판디 같은 인도네시아 미술 거장의 작품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제게는 아마도 그들이 가장 이상적인 예술가의 이미지였을 겁니다. 서양 미술과 대가들에 대한 정보가 제한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인도네시아 거장들이 이상적인 예술가일 수밖에 없었죠.

아판디 같은 인도네시아 거장들의 작품을 언제 직접 봤나요? 1993년 욕야카르타 미술대학에 입학한 후 그런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발리에선 전통 예술을 많이 볼 수 있지만 모던아트를 경험할 기회는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 욕야카르타에 있던 미술관에서 실제 작품을 처음 보았죠.

Nyoman Masriadi, Man From Bantul-The Final Round, 2000, Mixed media on canvas, 250x435cm.

발리 출신 작가들이 미술학교에 다니면서 발리의 전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진행됐나요? 인도네시아에 모던아트가 서서히 퍼져나가면서 발리에서도 몇몇 작가가 전통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모던아트를 수용하고 피카소 같은 서구 거장들의 작품에 대해 깊이 알게 됐지만 누구도 그것을 무작정 카피하려고 하지는 않았어요.

싱가포르의 유명한 미술사가(美術史家) 사바파티의 인터뷰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유독 ‘외부(outside)’라는 표현을 자주 거론하더군요. ‘외부가 나를 자주 화나게 한다’고도 했고요. 외부라는 건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나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 같은 겁니다. 개인적인 것에 관한 말일 수도 있고 작품에 관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주로 작품에 관한 것이지만 제가 불편하게 느낀 건 그 내용보다는 말하는 방식입니다. 마치 네 발 달린 짐승에게 두 발로 걷는 사람들의 방식으로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매우 고급스럽고 세련된 방식으로 상대방을 무시하는 것처럼 말이죠. 예전보다 빈도수가 줄긴 했지만 여전히 지금도 벌어지는 일이죠.

그래서 자주 화가 나나요? 인도네시아에는 상대방을 비하하는 특유의 방식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비판하면 자신의 입지가 높아지는 것과 유사합니다. 상대방을 공격하면서 자랑스러워하지요.(웃음) 계급과 관련된 인도네시아의 문화 때문인 것 같아요. 그래서 상대방이 나를 비하하는 말에 반응하지 않을 때 내 계급이나 수준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당신은 그럴 때 어떻게 반응하나요? 화가 나면 그림이 더 잘 그려진다고 말했잖아요. 복수는 천천히 하는 것이 좋아요. 조금씩 천천히.(웃음) 제 작품이 바로 그 반응입니다. 작품에 그 이야기를 쏟아붓습니다. 복수라는 표현보다는 그들과 동등한 관계를 만드는 방식이죠.

3 Nyoman Masriadi, Man From Bantul, 2001, Mixed media on canvas, 200x150cm.
4 Nyoman Masriadi, Peaceman. 200x300cm.

최근에 관심 있는 건 뭔가요? 과거에는 대중적 문제에 관심이 많았지만 근간의 작업에서는 개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심리적인 문제죠. 느낌(feeling)을 그리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느낌을 작품을 통해 관람객과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들이 제 작품을 모두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작품은 내가 이야기하는 방식이고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저만 알고 있으니까요. ‘배트맨(Neon Hero)’ 작품이 좋은 예입니다(이 작품에서 배트맨은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멍청이’라고 부른다). 많은 사람들이 배트맨이 저랑 일한 과거의 갤러리를 비판하는 장면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다른 화랑으로 가도록 내버려둔 멍청한 화랑이라고요. 그런가 하면 현재 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위홍지엔 박사(인도네시아의 최고 컬렉터)는 그 그림 속 보이지 않는 멍청이가 현재 저랑 일하는 가자 갤러리(Gajah Gallery)의 자스딥 산두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작품을 팔아버린 갤러리가 우둔하다는 의미였죠. 그러나 사실 제 그림 속 배트맨은 바로 저입니다. 저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 거죠. ‘왜 나(배트맨)처럼 쉬운 주제를 더 자주 그리지 않고 굳이 어려운 주제를 찾아 헤매느냐’는 것이죠. ‘쉬운 주제로 그려라. 배트맨처럼 쉬운 주제로!’ 여기서 배트맨이 호통치는 상대는 바로 저입니다.

현대미술의 담론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작품을 완성하는 건 예술가지만 작품의 의미는 대중이 이해하는 대로 결정됩니다. 그런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물론 모든 작품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중이 그 의미를 모두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 설명할 필요도 없죠. 만약 제 작품이 잘못 읽힌다 해도 사실 개의치 않습니다. 저는 제 작품을 통해 제 생각을 표현하고 개인적 심리 상태를 담아내지만 그것이 정확하게 읽히지 않는 덕분에 제 감정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Nyoman Masriadi, Oknum vs Residivis, 2012, Acrylic on canvas, 200x300cm.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렇듯 세계적 명성을 상상해본 적이 있나요? 제가 지금 이룬 것이 무엇이건 간에 저는 제 작품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작품이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에 유명세는 중요하지 않죠. 거꾸로 예술가로서 제 능력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현대미술가들은 작품을 창작하는 동시에 자신의 커리어에 대한 프로그램을 준비해야 합니다. 좋은 전시에 출품하기 위한 노력이 그 예입니다. 그런 노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제 방식이야 마이너스 전략이라고 해야겠죠.(웃음) 사실 그런 일은 갤러리의 역할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 활동하는 동료 예술가들도 대부분 그런 커리어 프로그램에 무관심한가요? 아닐 겁니다. 다만 제 경우는 그런 것에 무관심해서 오히려 더 관심을 받게 된 것 같아요. 그 또한 전략적으로 계획한 것이 아니니 ‘반전의 전략(reverse strategy)’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런 커리어 프로그램에 관해서는 모든 것이 제로로 돌아가도 상관없어요.

1997년, 1년간 발리에서 기념품을 만들어 판매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경험이 오히려 미술학교의 틀에 박힌 작업 방식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말하기도 했고요. 당시 발리에 있으면서 많은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기념품도 만들고 동시에 개인 작품 활동도 했죠. 올레올레(인도네시아어로 기념품)는 발리에서 매우 중요해요. 저는 동시에 결혼하기 위해 돈도 모아야 했어요.

그렇다면 기념품과 예술 작품을 구분하는 개인적 기준은 무엇인가요? 둘 다 즐거운 작업이었습니다. 작업에 대한 부담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죠. 1년간 천국에 있는 기분이었어요. 당시 여러 가지 사인을 사용했습니다. 개인적 예술 작품에는 제 사인을, 기념품에는 다른 사인을 했습니다. 기념품에도 제 실명을 사용한 적이 있지만 제 예술 작품에 사용하는 사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기념품 가운데 몇 작품은 정말로 훌륭했습니다. 지금은 우스갯소리로 그 작품에 제대로 사인을 남기지 않은 게 후회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때 만든 기념품 몇 점에는 좀 미안한 맘이 있어요. 작품에 사인할 용기가 없었다는 사실에 말이죠.

인도네시아의 정치 상황이 나아지면서 당신은 정치적 미술을 버리고 관심을 개인적 심리 상태로 돌렸습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선 그 누구도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가령 미술계에도 정치가 있습니다. 이전의 정치적 미술에 비해 현재의 미술이 어떻게 달라졌다고 생각하나요? 수하르토 시절에는 누구나 정부의 행태에 분노했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맞서서 싸우는 대상이 누구인지 명확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누구를 상대로 싸우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미술가들의 정치도 정치가들의 정치보다 낫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1997년 즈음 인도네시아 정치 상황이 안정되면서 현대미술이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현대미술’이라는 용어는 결국 시대에 따라 지속적으로 이름을 바꿀 뿐, 미술은 항상 같은 미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김정연(스페이스 코튼시드 대표) 사진 제공 가자 갤러리(Gajah Galle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