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HYUN LEE, 이세현
살다 보면 누구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경험을 한 번쯤 겪기 마련이다. ‘붉은색 산수화’로 미술계에 널리 알려진 이세현 작가에게는 30대 후반이라는 꽤 늦은 나이에 떠난 영국 유학이 그랬다. 당시 현대미술이라는 틀 안에서 회화, 설치, 조각, 퍼포먼스 등 실험해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도전했으나 선뜻 ‘마이 스타일’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할 만한 특징을 찾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유학 중 깨달았다. ‘영국적 미술을 구현하는 한국 작가가 아니라 가장 한국적인 미술을 선보임으로써 차별성을 보여주자’고. 그러면서 20대 초반 DMZ 부근 최전방에서 군 복무 시절 야간투시경 너머로 바라본 대한민국 자연의 아름다움을 함께 생각했다. 작품 아이디어는 밤낮없이 떠올랐고 붉은색을 듬뿍 머금은 붓끝은 캔버스 위에서 살아 움직였다. 7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느낀 열정과 자신감으로 작품 활동에 임한다는 그를 파주출판단지에 위치한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인터뷰 전 이세현 작가는 이 한마디만은 꼭 하겠다며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문 너머 보이는 저곳이 바로 지금의 나를 있게 한 DMZ 속 자연입니다. 저 아름다운 자연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세현이 여기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겁니다.”
파주출판단지에 위치한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한 이세현 작가.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왜 붉은색으로 작업하시나요?
2006년 영국 첼시 예술대학원에서 유학 중 영국 학생들과 제 차이점이 무엇인지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이후 왜 이곳까지 와서 미술 공부를 하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들기 시작했죠. 영국인은 영국의 색채와 느낌을 듬뿍 담은 미술을 어릴 적부터 가까이 보며 자랐는데 제가 그런 감성을 단기간에 습득하기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DMZ가 보이는 최전방에서 군 생활을 할 때 야간투시경으로 바라본 아름다운 자연이 떠올랐습니다. 이곳 학생들은 느끼지 못할 DMZ 속 자연의 아름다움. 하지만 투시경으로 바라본 자연은 날것 그대로의 아름다움이자 적을 숨기고 있는 은신처였습니다. 아주 아이러니하면서도 재미있었죠.
그런데 야간투시경은 녹색으로 보이지 않나요?
네. 그래서 처음에는 녹색으로 작업했습니다. 하지만 녹색이 자연의 색깔이다 보니 제가 원한 아이러니를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자연은 그 자체로 아름답잖아요. 그런데 DMZ에서 바라본 자연은 좀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남파 간첩이 숨어 있는 은신처일 수도 있잖아요. 혹시 제가 발견했다면 즉각 사살해야 하는 거고요. 그러면 자연은 원치 않게 죽음과 마주하게 되겠죠. 결국 아름다움과 슬픔을 동시에 간직한 공간이 자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민 끝에 이를 동시에 표현하려면 붉은색이 적합하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사랑, 봉사, 희생을 표현하는 적십자의 레드 컬러와 죽음을 상징하는 도살장의 붉은 피는 같은 색깔이지만 다른 느낌을 주잖아요.
한국인이 사용하는 붉은색이라, 뭔가 이념적인 느낌도 드는데요. 혹시 작품 때문에 오해를 받은 적은 없나요?
영국에서 졸업전을 진행하던 당시 예상치 못한 일이 있었어요. 작품을 관람한 한국인 몇몇이 붉은 색감을 보고 ‘모멸감을 느꼈다’, ‘작가가 빨갱이 아니냐’, ‘사상이 의심스럽다’라고 했다는 거예요. 제 의도는 그게 아닌데 말이죠. 많이 속상했죠.
2009년 겨울 귀국 후 작업에 몰두하다 2012년 학고재갤러리에서 <플라스틱 가든>전을 개최했습니다. 귀국 후 한국에서 개최한 첫 번째 개인전이자 ‘비트윈 레드’ 시리즈를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아 선보인 전시였는데 감회가 어땠나요? 신작도 공개하셨죠?
관람객과 미술계에 ‘비트윈 레드’ 시리즈를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작품이 별로 없는 거예요. 제가 보관 중인 작품과 컬렉터들이 가지고 있는 작품을 합쳐 16점을 전시할 수 있었습니다. 덧붙여 제가 붉은색뿐 아니라 다른 컬러에도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레인보’ 시리즈를 작업했습니다. ‘레인보’ 시리즈는 선거철 유독 남발하는 정치인의 무지갯빛 공약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연작입니다. 당시 작품 5점을 공개했어요. 물론 7가지 색깔로만 그리진 않았습니다.(웃음) 겉은 무지개처럼 아름답지만 실상은 허황되고 거짓된 공약의 이면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1 Rainbow in Black, Oil on linen, 2012, 200x200cm.
2 Rainbow in White, Oil on linen, 2012, 250x210cm.
3 Between Red-162, Oil on linen, 2012, 200x300cm.
4 Petal, Mixed media, 2012, 165x133x315cm.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대한민국 산(山) 이미지를 1만 점 넘게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 사진 중 최소 수십 장에서 최대 100여 장까지 합성한 뒤 스케치에 들어갑니다. 산, 산맥, 해안선 등의 연결 고리를 자세하게 표현하면서 말이죠. 거북선, 공장, 등대, 사찰 같은 세부 이미지도 추가로 염두에 두며 스케치를 완성합니다. 이후 캔버스에 붉은색을 칠하죠. 색을 입히다 수정 사항이 생기면 물감이 마르기 전 면봉으로 조심스레 지웁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가 있어요. 이미 말라버린 붉은색 위에 붉은색을 덧칠하면 색감이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죠. 그러면 제가 원하는 색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비트윈 레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러 가지 풍경이 이어져 있는데요. 한 작품에 풍경이 몇 개나 들어가는지 궁금합니다. 3×3m 작품 하나에 130여 개의 풍경이 한 장면처럼 얽히고설켜 있어요. 같은 장소인데 다른 각도로 찍어 독특한 느낌을 주는 풍경도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설명을 듣고 나면 신기해하죠.
작품명은 어떻게 짓나요? 번호로만 돼 있는데요. ‘비트윈 레드’는 말 그대로 붉은색 사이사이에 서로 다른 자연을 표현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었습니다. 시리즈는 넘버링으로 표현하고요. 현재 170번까지 그렸을 겁니다. 그런데 제가 소장 중인 작품이 별로 없어요. 작품들이 의리 없이 제각각 주인을 찾아 떠난 거죠.(웃음) 그래서 올해는 가급적 판매하지 않으려고 해요. 작가도 작품을 소장하고 있어야 마음 편히 전시를 할 텐데 그게 쉽지 않아서 결단을 내린 거죠.
파주출판단지에서 작업하고 계신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서울에선 천장이 높은 작업실을 구하기가 힘들어요. 혹시 있다 해도 임대료가 너무 비싸죠. 그래서 공간과 임대료를 고려한 끝에 파주까지 오게 된 겁니다. 서울에 작업실이 있다면 작가나 큐레이터와의 교류가 잦아 좋은 점도 있겠지만 작품에 집중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이곳은 아주 조용해서 좋아요. 게다가 차를 타고 20여 분만 달리면 제 작품에 영감을 준 DMZ에 도달할 만큼 가까운 거리죠. 심지어 이 건물 옥상에서도 어렴풋이 보여요. ‘비트윈 레드’의 원천이 작업실과 마주하고 있는 셈이죠.
세계적인 중국 작품 컬렉터 울리 지그가 ‘비트윈 레드’를 컬렉션한다고 들었어요.
2007년 영국 첼시 예술대학원을 졸업하고 런던 외곽 뉴몰던에서 작업하고 있는데 어느 날 울리 지그가 찾아왔어요. ‘비트윈 레드’를 시작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죠. 사실 울리 지그가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당일 이야기를 나누다 알게 됐죠. 그에게 제 작품을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봤어요. 한국을 잠깐 방문한 적이 있는데 모 큐레이터가 전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면서 마지막에 제 작품을 스치듯 소개했다더군요. 그런데 ‘비트윈 레드’에서 한국적 독창성을 발견했다며 두 눈으로 직접 작품을 보겠다 했고 그래서 직접 영국까지 찾아온 거죠.
2013년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계시나요?
레드 시리즈는 계속 이어질 겁니다. 그리고 올해는 해외 전시가 많을 것 같아요. 밀라노 개인전과 쾰른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고, 5월 홍콩 아트 페어에도 참가할 예정입니다. 베니스 특별전도 고려하고 있어요. 2014년 상하이 개인전도 준비 중이라 벌써부터 바쁘게 작업하고 있습니다. 이건 제 개인적인 포부이자 궁극의 소망인데, DMZ를 서해부터 동해까지 다 찍어 작품에 표현해보려 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어 진정한 DMZ 버전의 ‘비트윈 레드’를 완성해보고 싶어요. 평양 시내를 그려보고 싶기도 하고요.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으니 언젠가는 시도해볼 수 있겠지요?
에디터 조기준
사진 안지섭(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