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일기
도시를 벗어나 푸른 전원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사람들을 만났다.

농촌으로 돌아간 셰프, 봉화 해오름농장 최종섭 대표
“여기 보이는 이 허브를 씹어보세요. 신선한 굴 향이 나죠?” 35℃가 훌쩍 넘는 무더운 비닐하우스 안,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최종섭 대표가 손톱만 한 초록 잎을 건넸다. 진한 바다 내음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국내에서 찾기 힘든 허브인 오이스터립입니다. 오이스터 립을 포함해 재배하는 특수 채소와 과일만 500종이 넘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늘어날지는 모르죠.” 경북 봉화에 위치한 해오름농장은 호텔과 레스토랑에 공급하는 특수 작물을 전문적으로 재배하는 곳이다. 특수 작물은 수요가 적을 것이란 예상을 깨고 현재 서울 신 라 호텔, 롯데 호텔 서울, 포시즌스 호텔 서울, 더 플라자를 비롯한 15곳의 특급호텔과 랩24, 엘본 더 테이블, 권숙수, 팔레 드 고몽 등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이 그의 고객이다.
“외국 요리책을 보면 늘 신선한 바질, 베이비 채소가 재료로 나오는데 1990년대 초 제가 있던 대구에선 구할 수 없었죠. 처음 상경했을 땐 그야말로 별천지를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밀레니엄 서울 힐튼의 일폰테에 근무할 당시 다양한 요리 경연을 준비한 경험은 그가 특수 작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다. 2005년 호텔을 그만둔 후 농장을 차리기 위해 그는 전국 각지를 돌며 터를 찾았다. 결국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일조량이 풍부하고 기후 차가 큰 경북 봉화. 사실 그는 영화 <워낭소리>의 주인공인 최원균 부부의 아들로 봉화에서 나고 자라 기후와 토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농장을 운영한 첫해에 큰 화재가 발생해 농장을 새로 짓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특수 작물을 재배하는 농장으로 알려지며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터를 잡은 지 이제 10년, 해오름농장은 국내 요리계에 없어서는 안 될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필드를 떠났지만 제 마음은 아직 뜨거운 주방에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면 잘 팔리는 작물만 재배했을 겁니다.” 단순히 채소를 재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먹거리를 연구하는 것 또한 최종섭 대표가 생각하는 셰프의 사명이다. 농장 일이 끝난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그는 책상 앞에 앉아 곡물의 원종(原種)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세계 각지에 흩어진 셰프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현지의 트렌드를 파악한다. 최근에는 젊은 셰프와 학생들을 초청해 특수 채소를 소개하는 한편, 특수 작물을 이용한 레시피를 연구하고 선보일 수 있는 요리 연구소를 구상 중이다. 다시 주방으로 돌아올 생각은 없느냐고 묻자 그가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한국 요리계가 발전하려면 새로운 맛을 경험한 셰프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세계 각지에서 유학한 젊은 셰프 들이 한국으로 돌아오겠죠. 언젠가 그들이 돌아와서 새로운 요리를 선보일 때 제가 도움을 주고 싶어요. 그게 제가 농사를 짓는 이유이자 요리에 대한 제 열정입니다.”

풀밭 위의 미술, 시안미술관 변숙희 관장
소담한 시골길을 따라 달렸다. 때 이른 풋사과가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리는가 싶더니 이내 넓은 잔디밭이 있는 한 건물을 만났다. 경북 영천의 시안미술관은 조용한 시골 한가운데에 그렇게 자리 잡았다. 변숙희 관장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온 방송인이다. KBS 대구 방송총국 편집부에서 근무한 그녀는 문화사업에 매진하고자 이곳 영천으로 왔다. “미술에 관심이 많았어요. 미술품을 사고파는 갤러리는 제 소심한 성격에 다소 맞지 않아서 누구나 와서 볼 수 있는 미술관을 열기로 했죠. 처음에는 대구 팔공산 앞에 지을 생각이었는데, 비용도 비용이지만 제 마음에 드는 공간을 백지에서 시작하려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찾아다니다 발견한 곳이 오래전 버려진 초등학교였다. 직접 쓸고 닦고 건축가와 상의하며 2006년 지금의 시안미술관을 완공했다. 시안미술관 덕에 그저 조용한 농촌이던 마을 전체가 미술관이 되었고 변숙희 관장을 중심으로 영천시가 함께 3년간 ‘별별 미술 마을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사실 공공 미술 사업을 통해 낙후한 구도심이나 시골 마을에 벽화를 그리고 관광산업을 활성화하는 일은 흔하디흔하다. 하지만 이곳이 남다른 점은 미술 전문가와 교수진 등으로 구성한 심사위원단이 작품성과 지역성을 따져 작가를 선정하고, 단지 보기 좋은 그림이 아니라 주제가 있는 조각, 설치미술 등 장르를 넘나들며 전시하는 데 있다. 또 이곳에 아틀리에를 두고 작업한 작가는 미술관에서 전시할 기회도 얻는다. 한 마디로 시안미술관은 이 마을을 새롭게 태어나게 한 인큐베이터인 셈. 박숭흠, 김승영 등 설치미술 작가의 작품을 전시한 잔디밭을 지나 학교 전체를 사용하는 전시실에 들어서면 일반적 화이트 큐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삐걱거리는 나무 소리도 , 그리고 오래된 건물의 기둥도 자연스럽게 두었다. 칠판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곳에는 이태호 작가의 선인장 부조 작품을 놓았다. 미디어 아트 특별전을 선보일 때에는 빔 프로젝트 35개 이상을 가져와 대규모 전시를 기획했다. 지역 사립미술관에서는 보기 드문 시도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다소 생소한 개념이지만 미국과 독일, 영국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대지미술(자연을 소재로 자연 속에서 미술적 의미를 찾는 사조) 역시 이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일본의 유명 대지미술가 오쿠보 에이지 역시 별별 미술 마을 프로젝트에 선정 된 아티스트 중 한 명인데, 그는 올 8월 미술관 가장자리에 즐비한 플라타너스나무의 가지를 채집해 거대한 조형물을 만드는 퍼포먼스를 계획하고 있죠.” 이 작업에는 마을 주민이 함께 참여할 예정이다. 작품을 향유하는 관람객이 작품을 만드는 작가가 되어 창작자와 수용자의 경계를 허무는 신선한 전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시안미술관이 보여줄 향후 행보를 기대하게 하는 이유다.
에디터 | 신숙미(프리랜서) 박현정(프리랜서)
사진 | 공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