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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방

MEN

그녀와 한 번쯤 이런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은 어떨까? 무대는 남자의 방이고, 소재는 아트 상품이며, 주제는 현대미술이다.

​“실제로 한번 보고 싶어요. 장난감 모양의 거대한 꽃 무더기.” 신발장 위에 있는 제프 쿤스의 ‘스플릿 로커(Split Rocker) 화병’1을 보고 여자가 말했다. 여자는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2012년에 스위스 바이엘러 재단 정원에 설치한 걸 봤는데, 정말 환상적이었어요. 베르사유 정원의 현대판 버전이랄까요.” “거대한 꽃 작업을 처음 선보인 ‘강아지(Puppy)’는 아들을 생각하면서 만들었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전부인 치치올리나가 아들을 데리고 이탈리아로 도망갔잖아요.” 남자는 여자가 선물로 사온 튤립을 화병에 꽂고 거실로 여자를 안내했다. 테이블 위, 맨 레이가 1920년에 디자인한 ‘나무 체스 세트’2가 여자의 눈에 들어왔다.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뗐다. “아주 조금요. 규칙 정도만 알아요. 저 체스 세트를 보면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왜 초현실주의자들은 체스에 매혹됐을까? 맨 레이와 절친한 마르셀 뒤샹도 말년에 체스만 뒀잖아요.” “음, 일종의 멘털 게임을 즐긴 거 아닐까요? 그들에겐 인간의 의식 저편에 숨어 있는 무의식이 중요했으니까요. 기하학적 무늬를 배경 삼아 펼치는 정치 게임 같기도 하고요.” 남자가 테이블 밑에서 몇 가지 물건을 더 꺼내 올려둔다. “가끔 정신이 산만할 때 가지고 노는 것 중에 이런 아트 상품도 있어요.” 20세기 최고의 건축 중 하나로 꼽히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레고판’3과 ‘언어의 조각가’라 불리는 로런스 와이너의 ‘Xx Yy 나무 블록’4, 아이슬란드의 화가 에로(Erro)의 ‘Foodscape’를 1000개의 퍼즐로 만든 ‘국제 팝 퍼즐(International Pop Puzzle)’5까지.
​“초현실주의자들처럼 우연과 혼란 속의 질서 같은 걸 즐기나 봐요? 이 퍼즐을 맞추다 보면 심심하진 않겠어요.” 소파에 앉은 여자는 집 안을 스윽 둘러보았다. “너무 섣부른 판단은 하지 말아주세요.” 남자가 잠깐의 정적을 깨고 싶어 농을 쳤다. “네?” 여자가 놀라자 남자가 말을 잇는다. “벽면에 있는 것들 말이에요.” 소파 맞은편 벽면에 아라키 노부요시의 사진을 프린트한 스케이트보드 3점 ‘게이샤 트립틱(Geisha Tryptic)’6이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장 미셸 바스키아, 폴 매카시, 무라카미 다카시, 리처드 필립스, 앤디 워홀까지, 정말 많은 작가의 작품을 스케이트보드에 새겨 아트 상품으로 팔고 있지만, 저 작품이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겼어요.” 보드에 가까이 다가가 긴바쿠를 한 사진 속 여자를 응시하던 그녀가 선반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전 이게 더 맘에 드네요.”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흑백사진으로 장식한 ‘레슬러 접시(Wrestler Plate)’7였다. “조명을 아주 정교하게 써서 대리석 조각인데도 정말 살아 있는 남자 누드처럼 촬영했어요. 여기에 어떤 음식을 담아 먹을 수 있겠어요?” “작가의 작품을 새긴 접시는 그게 참 애매해요”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여자가 남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소위 ‘악동’ 스타일 작가를 좋아하나 봐요?” 남자의 가족사진이 가지런히 놓인 서랍장 위에는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세운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스노볼 ‘L.O.V.E.’8, 뿌리째 뽑힌 거대한 치아 모양 같은 데이비드 슈리글리의 ‘황동 치아(Brass Tooth)’9, 검은 봉지를 이어 붙여 만든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김홍석의 레진 조각 ‘개 같은 형태’의 ‘미니어처’10가 뒷골목의 사이좋은 친구처럼 자리해 있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못된 애들끼리 모였네요. 하하. 현대미술의 ‘충격 효과’는 이제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작가들의 작품은 여전히 즐거워요. 섬뜩하고 유머러스하며 엉뚱하죠.” 여자가 남자의 말을 받는다. “아이러니한 매력이 있죠. 주제를 아주 심플하고 강렬하게 전달하는 태도나 방식이 맘에 들어요. 관람객이 생각할 한 뼘의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도요.” 남자가 여자 쪽으로 다가와 서랍장에서 나무 상자 하나를 꺼낸다. 한정판으로 제작한 온 가와라의 ‘One Million Years’11 CD 세트다. “좀 더 진지한 작가에 대해 얘기해볼까요? 온 가와라요.” 남자는 상자에서 꺼낸 CD를 오디오에 넣었다. “올봄에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 <침묵>을 보고 구매했어요.” 100만 년 전의 과거와 미래의 숫자를 읽는 남녀의 목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고, 남자와 여자는 한동안 침묵했다.

에디터 김재석 (jskim@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