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무릉도원
동화 작가 안데르센은 말했다. “산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해. 햇빛도 있고 자유도 있고 꽃도 있어야지.” 평생 동심을 품고 사는 다 큰 성인 남자에게 이 말이 와서 꽂혔다. 햇빛도 있고, 자유도 있고, 꽃도 있는 곳에 집을 짓고 살리라. 그렇게 자연 속에 살리라.

숲 속 쉼터가 되어줄 허명욱 작가의 작은 집

허명욱 작가
남자에게 정원은 필요한가
맑은 5월, 이른 여름의 기운이 느껴지던 어느 날. 블레스가든의 백선미 대표가 직접 일군 서울 강남 한 중식당의 정원을 한 바퀴 돌아본 후였다. 요섹남, 이른바 요리하는 섹시한 남자가 각광받는 시대. 부엌에 들어가면 뭐가 떨어진다며 부뚜막을 멀리하던 한국 남자가 변하고 있다는 이야기. 요리를 통해 삶의 활력을 찾고 타인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 이런 남자는 어떨까? 정원 가꾸는 남자. 땅을 향해 두 팔 걷어붙이고 숨은 근육을 드러낸 진정한 섹시남. 꽃과 식물, 자연과 대화하는 남자. 그 안에서 진정한 휴식의 의미를 찾는 남자. 남자에게 긍정적 삶의 가치를 전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그린 라이프’를 제안하기로 했다. 마당이 없어도 베란다를 활용하면 되고, 화분 몇 개만으로도 소박한 정원을 완성할 수 있지만 상식과 평범함을 깨고 싶었다. 정원에 그 남자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는 거다. 이른바 ‘라이프스타일 가든’. 백선미 대표가 선뜻 돕겠다고 나섰다. 남자에 의한, 남자를 위한, 남자만의 정원을 만드는 작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누가 좋을까? 정원에 관심이 있으며 자연을 사랑할 준비가 된 그를 찾아 인맥 레이더를 가동했다. 우연히 이름 하나가 귀에 들어왔다. 용인에 큰 정원 딸린 작업실이 있는 작가라고 했다.
작가 허명욱. 사진을 찍고, 금속 가구를 만들고, 옻칠도 하는 그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작가라고 쓴 건 그 모든 걸 뭉뚱그린 호칭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허명욱 선생님, <노블레스 맨> 편집부입니다. 남자의 정원이라는 칼럼을 기획했어요. 전화로는 충분히 컨셉을 전달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일단 뵙고 말씀 나누고 싶습니다.” 지극히 통상적인 첫 전화 통화. 나흘 후 우리는 서울과 경기도를 잇는 분당을 관통해 광주 오포 옆에 나란히 붙어 있는 용인의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곳엔 담장이 없었다. 느티나무 숲길을 따라 야트막한 경사를 오르니 2채의 빨간 벽돌집이 보인다. 천천히 집 구경을 하는 것으로 쑥스러운 첫인사를 대신했다. 2007년 컨테이너 창고가 있던 이 부지에 반해 땅 주인을 설득한 이야기. 2008년부터 꼬박 3년에 걸쳐 직접 터를 닦고, 배관을 깔고, 벽돌을 올려 집을 지은 이야기. 주변에 오래된 예쁜 나무가 많았는데 인부의 실수로 간신히 한 그루만 남기고 전부 베어낸 슬픈 이야기. 어느 해 여름 홍수로 뒤편 야산의 골짜기 물이 넘쳐 집에 들어왔고, 복구 작업이 끝난 후 둑을 쌓은 고난의 이야기 등등. 그의 사진 작품과 작업 도구, 빈티지 컬렉션으로 채운 아랫동 작업실을 거쳐 주방과 욕실, 다이닝룸의 형태를 갖춘 비교적 집 같은 느낌의 윗동을 차례로 돌았다. 어느덧 발걸음은 자연스레 집을 병풍처럼 둘러싼 산 쪽으로 향했다. 지붕을 얹은, 작은 집 모양의 장작 저장고가 있었다. 하나, 조금 더 위에 또 하나. “정원요? 파릇파릇한 잔디뿐인데….” 이곳의 정원에는 더 이상 다듬을 것 없는 잔디 위에 조명 작품 몇 개, 그리고 테이블과 의자 정도. 여기에 무엇을 더할 수 있으리. 아쉬운 마음에 고개를 돌리자 주위의 경치가 눈에 들어왔다. 박공지붕을 올린 2채의 벽돌집, 집과 집 사이로 겹쳐진 능선의 그림 같은 산세가 소복이 눈에 담겼다. 문득 백선미 대표의 눈이 반짝였다. “저 야산이 저대로 선생님의 또 다른 정원 아닌가요? 저기에 작은 쉼터를 하나 만들면 어떨까요? 동심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모험심 가득한 소년이 꿈꾸는 나무로 만든 오두막. 최소한의 길만 내고 그대로 그렇게 자연 속에 파묻혀 있는 거죠.” “허명욱에겐 나무보다 철재가 어울려요. 자연스럽게 녹이 슬고, 시간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그것참 재미있겠네요. 짝짝짝. 다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이제 막 <톰 소여의 모험>의 마지막 책장을 넘긴 순진한 어린이 같은 표정을 짓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야산을 정원으로 삼는다? 이는 또 웬 도인 같은 생각인지. 이런 배포는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계단 입구에는 블루버드를 심었고 이끼와 자연석으로 계단을 장식했다.

각종 사초류로 남성적 정원의 분위기를 연출했고 고즈넉한 느낌을 내기 위해 작은 분수도 설치했다.

계단 입구에는 블루버드를 심었고 이끼와 자연석으로 계단을 장식했다.

금속공예 작가 후배와 함께 뼈대를 세우는 과정

블레스가든 백선미 대표와 시안을 논의 중인 모습
작가 허명욱의 세 번째 집
누군가 남자에게 집 짓기는 가장 재미있는 취미라고 말했다. 공구를 들고 무언가 만드는 건 일종의 놀이와 같으며 성취감도 대단하다고. 이미 집 2채를 지어본 허명욱 작가에게 산속에 제 몸 뉠 작은 쉼터 하나 지어 올리는 건 처음엔 ‘한번 해보지 뭐’ 하는 호기 어린 도전이었을 거다. 하지만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정원은 자연의 야성을 억누르는 데에서 시작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자연은 끊임없이 야생으로 돌아가려 발버둥치고, 인간은 이를 막아내야 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원에서는 그것이 잡초와의 사투 정도일 수 있으나 자연 그대로의 산속이라면 전투 신이 훨씬 격렬해진다. 해보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산으로 오르는 계단을 내고, 평탄하게 땅을 다지고, 땅속 깊이 기둥을 박고, 수평을 맞춰 바닥을 올리는 데에만 꼬박 하루가 걸렸다. 물론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절친한 후배인 금속공예 작가 김대건, 김동현이 함께했다. 단순히 노동력을 지원해주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 친구들은 이번 작업을 통해 집과 공간에 대한 제 생각을 알게 되었을 거예요. 소통하는 거죠.” 평소 그가 선호하는 건축자재인 광택 없는 회색빛 아연 패널 징크(zinc) 대신 이번엔 일반 철재를 사용했다(회색으로 도장하면 징크와 유사해 보인다). 재단부터 용접까지, 금속 좀 다뤄본 이 남자들이 직접 담당했다. 책을 펼쳐 뒤집어놓은 듯한 형상의 박공지붕을 올리고, 한쪽 면을 블라인드 셰이드 스타일로 디자인해 막아주었다. 고대 그리스 신전 건축에 등장한 페디먼트 구조를 이어받은 박공지붕은 누구나 ‘집’ 하면 떠올리는 상징적 형태. “어릴 적부터 제가 그리는 집도, 제가 짓는 집도 언제나 박공지붕을 얹었어요. 보편적인 아름다움이죠.”
한쪽 면을 막은 건 공간의 느낌을 배가시키기 위해서다. “자연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공간을 원했어요. 하지만 사방이 뚫려 있는 것보다 한쪽을 살짝 가릴 때 좀 더 ‘집’ 같은 느낌을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다른 한쪽에는 커튼을 달았다. 나무 기둥에 묶으면 운치 있는 그늘막이 된다. 허명욱 작가가 집을 짓는 동안 백선미 대표는 좀 더 실질적인 정원의 디테일을 만들었다. 자연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면서 쉼터 같은 느낌을 낼 수 있는 정원. 이미 땅속에 깊이 뿌리내린 초록색 생명이 널려 있기에 뭔가를 집중적으로 심을 필요는 없었다. 갈대 같은 사초류를 더해 심플하면서 정돈된 분위기로 가기로 했다. 산을 오르는 길도 다듬었다. 계단이 시작되는 길목에 ‘문’이라는 상징적 이미지를 부여하기 위해 블루버드를 심었다. 다양한 크기의 자연석으로 장식하고 중간중간 이끼와 좀눈향을 심었는데, 위로 불쑥 튀어나오는 일 없이 지면에 찰싹 달라붙어 사시사철 끈기 있게 푸른 기운을 뿜어낼 아이들이다. 안전을 위해 계단 양 끝으로 밧줄을 감았다. 어떻게 보면 인위적 장치인데 전구를 매달아 밤에 더욱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연출했다. 얼굴이 크고 화려해 주변을 압도할 꽃은 배제했지만 수수한 멋이 있는 야생화는 투박한 남자의 정원에도 잘 어울릴 터. 집 주변에 흐드러진 임자 없는 개망초를 옮겨 심었다. 깊은 산속 맑은 물소리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작은 분수도 설치했다. 분수 옆에는 조명을 하나 두었다. “밤에 보는 정원도 생각했어요. 낮과는 또 다른 매력이죠. 어둠이 밝음보다 훨씬 편안하게 느껴질 거예요.”
박공지붕을 올린 2채의 벽돌집 사이에 같은 모양으로 지어 올린 쉼터가 자리한다.
공예적 삶, 정원도 내 작품이다
허명욱 작가는 일전에 개최한 한 전시의 작가 노트에서 “공예적 가치를 따르는 삶에서 사색의 시간은 성찰의 시간을 만들어주는 나의 정신적 쉼이 된다”고 적었다. 야산을 정원 삼아 새로 지어 올린 이 작은 세 번째 집 역시 자신만의 스타일이 묻어나는 공예 작품이라고 말한다. 당분간은 혼자 이곳을 즐길 것이라고 했다. 비밀스러운 휴식 공간으로 여기서는 모든 짐을 내려놓고 쉬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다 누군가를 맞이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그때 이곳을 찾는 이가 첫 손님이 될 것이라고.
“장맛비를 맞아 벌써 녹이 슬었네요. 촬영이 끝나면 페인트칠을 할 거예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녹이 슬겠죠. 그럼 다시 그 위에 덧칠을 할 거고, 그러다 어느 순간 이 집도 허명욱화될 겁니다. 아직 날 선 새것의 느낌이지만 1년쯤 지나면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질 거예요.”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실 그의 모든 작품이 그렇다. 사진 평면 작업은 카메라로 피사체를 촬영해 캔버스에 인화하고 그 위에 부분적으로 아크릴 물감을 칠한 뒤 다시 촬영해 캔버스에 인화하고 페인팅하는 과정을 네 번 반복한다. 옻칠 작품은 갈아내고 칠하는 과정을 20회 이상 거쳐야 비로소 완성된다(물론 얼굴이 비칠 정도로 투명한 빛을 구현하는 명인의 옻칠은 40회 이상 과정을 반복해 탄생한다). 어쩌면 이곳은 이제 막 밑그림을 그리고 가볍게 바탕색을 칠한 상태일지 모른다. 작가의 손길을 거쳐 점점 더 깊고 진한 시간의 색을 머금게 될 것이다. “저는 오래된 물건이 주는 깊이 있는 색감을 좋아해요. 어릴 적부터 시간이 깃든 그런 오브제에 관심이 많았고, 크면서 하나 둘 모으기 시작했죠. 제 사진, 평면, 오브제 작업 등이 그런 내재된 감정을 밖으로 표출한 것입니다.” 조금 불편하거나, 부족한 부분이 보여도 크게 손대진 않을 거라고 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감추거나 지우거나 억지로 수정할 게 아니라 이대로 자연 속에 녹아들게 할 겁니다.”
인터뷰가 끝나자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가 라이카 디지털카메라를 하나 꺼내 들고 나왔다. 그리고 만들기 숙제를 끝낸 천진난만한 아이의 표정으로 새로 생긴 정원 곳곳을 앵글에 담기 시작했다. “연륜의 색을 눈으로 담아 현재의 사물인 오브제에 색을 만들어 덧입힌다. 이 사물은 시간을 머금고 다시 흔적을 남길 것이다. 인간과 자연이 함께한 시간을 담은 흔적이 되어 수십 년 뒤 내 평면 작업의 재료가 되어줄 것이며, 이것은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작가 노트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언젠가 그의 작품 속에서 2015년 뜨거운 여름을 달군 이 정원 프로젝트를 만날 수 있을까?
블레스가든 백선미 대표와 함께하는 ‘남자의 정원’ 칼럼은 매회 직업과 개성이 다른 남자를 선정, 아이디어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새로운 컨셉의 라이프스타일 가든을 제안할 예정이다.
에디터 이재연 (jyeon@noblesse.com)
사진 박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