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 소리, 온도의 초상
1949년 마오쩌둥이 천안문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이후 1960년대부터 1980년대 말까지 중국 청년 예술가들은 문화혁명과 여러 민주화 운동 등을 겪으며 억압의 시대를 견뎌왔다. 1989년 6월, 천안문 사태 이후 청년 예술가들은 ‘발언’을 하기 시작했고 표현의 반경을 과감히 확장해가며 어느새 중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우뚝 섰다. 그럼에도 그들을 기성이라는 두 글자로 묶지 않는 건 내면의 새로운 갈등과 혼란을 지금도 즐거이 생산해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을 침대 위에서까지 고민하게 하며, 그로 인해 여전히 중국 현대미술은 큰 폭으로 성장 중이다. 그 가운데 우리가 다 아는 장샤오강(Zhang Xiaogang)이 있다.
1958년 쿤밍 출생 1963년 부모님과 함께 쓰촨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냄 1966~1969년 문화혁명 1978년 쓰촨 미술학원 입학 1980년 서양 미술에 눈뜨며 반 고흐와 고갱에게 많은 영향을 받음 1881~1883년 그의 초기 작품은 종이에 잉크로 그린 드로잉 1989년 쓰촨 미술학원 홀에서 첫 번째 개인전 개최, ‘잃어버린 꿈’ 연작 30점 전시 1994년 ‘대가족’ 연작 시작 2000년 ‘망각과 기억’ 연작 시작 2006년 ‘안과 밖’ 연작 시작 2007년 조각 작업 시작
이제는 예술지구 이상의 의미가 되어버린 베이징의 관광 명소 ‘798’에 가면 창의광장 동쪽으로 거대한 벽돌 건축물 하나가 그 존재감을 드러내며 우뚝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척 클로스와 나라 요시토모, 무라카미 다카시, 유명 중국 작가들이 모인 대규모 개관전으로 798을 들썩이게 하고 그 후 전시 오프닝 때마다 갤러리 안팎을 사람들이 가득 메워 밤늦도록 일대를 축제 분위기로 탈바꿈시키는 이곳은 페이스 갤러리(Pace Gallery)다. 1960년 안 글림처가 세운 페이스 갤러리는 뉴욕에만 4개, 런던에 2개 그리고 스위스 알프스 지역과 이곳 베이징에 자리 잡았다. 전 세계적으로 미술 붐이 불 때 한국의 화랑은 798에 대거 진출해 지점을 냈지만(지금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화랑 제국을 이룬 미국과 유럽의 갤러리는 798에 쉬이 진출하지 않았다. 다들 시장의 가능성만 점치고 있을 때 2007년 페이스 갤러리가 서양 갤러리 중 가장 먼저 지점을 냈다. 그것은 곧 중국 미술 시장이 그만한 가치가 있으며 믿을 만한 시장이라는 의미였다. 해외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아시아에 첫 지점을 낸 페이스 갤러리는 고심을 거듭한 끝에 첫 번째 개인전 주인공을 선정했다. 2009년 갤러리 밖까지 사람들이 차고 넘친 전시의 주인공, 장샤오강이었다.
1958년 윈난 성 쿤밍에서 태어나 1982년 쓰촨 미술학원을 졸업,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혈연: 대가족’ 연작 3점을 선보이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장샤오강은 같은 해 스페인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중국 아방가르드 15년>전에 참여하며 중국 대표 작가 반열에 올랐다. ‘혈연: 3명의 동무’가 파리에서 열린 국제 아트 페스티벌의 포스터를 장식한 것은 그의 작품이 전 세계인의 코드를 관통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웨민쥔, 팡리쥔과 함께 중국의 냉소적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히는 장샤오강의 작품은 1960~1970년대에 일어난 문화혁명과 민주화혁명, 1989년 천안문 사태 같은 혼란기를 겪으며 거르고 또 거른 것이다. 정치적 억압 속에서 그를 비롯한 청년 작가들은 ‘85신조미술운동’을 이끌며 중국 현대미술 사상 가장 중요하다고 평하는 <중국 현대 예술전>을 발표했고, 그 안에서 장샤오강은 격동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중국 인민의 얼굴을 몽환적이며 독창적으로 그려내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꿈’(1986~1989년), ‘개인의 노트’(1989~1991년), ‘대가족’(1993년~), ‘망각과 기억’(2000년), ‘안과 밖’(2006년), ‘서술’(2005년) 연작으로 지금껏 한결같이 이어져온 그의 작품은 매우 평온하고 고요해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억압과 강요, 혼란과 분쟁 속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탈출구를 찾는 과정이 담겨 있다. 6월 13일 대구미술관 개인전을 앞두고 있는 그를 만나기 위해 베이징 스튜디오를 찾았다.
정말 반갑습니다. 한국에선 중국 현대미술가 4대 천왕으로 보통 웨민쥔, 장샤오강, 팡리쥔, 인자오양을 꼽습니다. 중국에서 꼽는 4대 천왕과 약간 차이가 있긴 하지만 한국인이 중국 현대미술은 잘 몰라도 4대 천왕의 이름은 알 정도로 당신은 아주 유명해요. 대구미술관에서 열릴 개인전
이번 전시는 대만의 지인을 통해 성사됐다고 들었습니다. 지인의 소개만으로 결정하긴 어려웠을 텐데 역시 관계를 중시하는 중국인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오랫동안 알고 지낸 대만 큐레이터가 있습니다. 루롱즈라고요. 아주 ‘관계’가 좋은 친구죠. 그가 하는 말은 대부분 믿는 편이에요. 그가 대구미술관 김선희 관장과 친구이기도 해서 나에게 소개해줬어요. 지난해 쿠사마 야요이 전시 이야기를 익히 들은 터라 더욱 믿음이 가서 이번 전시를 결정하게 됐습니다.
지난 1월 중순에 대구를 방문한 걸로 알고 있는데, 대구의 첫 느낌은 어땠나요? 도시가 잘 정돈된 느낌을 받았어요. 대구미술관도 둘러봤는데 건축과 인테리어 모두 훌륭했죠. 김선희 관장과 같이 둘러본 대구의 주요 갤러리도 아주 좋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좋은 퀄리티의 갤러리들이더군요. 마침 열리고 있는 전시도 좋았고요.
이번 전시가 회고전 형식이라는 말도 들리는데, 주로 어느 시기의 작품을 살펴봐야 할까요? 우선 나는 그게 회고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직 내 나이가 뭔가 회고할 단계는 아닌 것 같거든요.(웃음) 물론 어떤 부분에서는 회고적 특성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봐야 할 부분은 ‘이 작가가 지금까지 어떻게 성장했고, 지금 어떻게 성장 중인가’예요.
같은 작가의 전시라도 국가나 도시의 수준, 즉 국민의 예술적 소양에 따라 전시 작품의 셀렉션과 큐레이팅이 달라야 하는데, 이번 대구 전시에서 가장 차별화한 점은 무엇인가요? 물론 그 점도 중요하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관람객의 눈높이보다 ‘작가의 진실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에 초점을 뒀습니다. 큐레이팅이 끝나진 않았지만 아마 2000년 이후의 작품이 많을 것 같아요.
과거 인터뷰 기사에서 “작품이 고가에 팔리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당신은 “행운”이라고 답하고 행운이 당신을 찾아온 것에 대해선 “내가 그림을 잘 그리기 때문”이라고 했죠. 그 대답이 뇌리에 아주 강하게 박혔어요.(웃음) 하하, 왜 작품이 잘 팔리는 것 같으냐는 질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유머러스한 대답이었어요. 농담이었는데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였군요! 사실 작품을 잘 그리는 것도, 정성을 다해 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혼신의 힘을 쏟아 만들어낸 창조물이 시간이 흘러 모두의 검증을 거친 후 “아, 이 작품 진짜 좋다”라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작가에겐 가장 이상적인 것 같아요.
아니에요. 당신은 그림 실력도 좋아요. 아주 객관적으로 나 자신을 볼 때 그렇게 그림에 자신이 있진 않아요. 솔직히 서른 중반까지도 내 그림 수준에 대해 고민이 많았어요. ‘어떻게 하면 좋은 작품을 만들어낼까’, ‘어떻게 하면 작품에 문화적·사회적인 것을 모두 담아낼 수 있을까’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나를 둘러싼 문제에 대해 계속 고민하다 보니 지금까지 온 것입니다.
1 베이징에 있는 장샤오강 스튜디오의 전경
2 본인의 모습을 담은 조각. 6월 13일부터 90일간 열릴 대구 미술관 개인전에서는 장샤오강의 조각 작품을 여러 점 만날 수 있다.
3 작업실 책상 한 켠에서 발견한 작품 스케치
4 장샤오강이 존경하는 스페인 화가 엘 그레코의 화집
쓰촨 미술학원에 입학한 1978년은 덩샤오핑이 중국의 개혁 개방을 처음 시작한 해입니다. 개혁 개방과 함께 서양 미술도 빠르게 유입되었죠. 일명 ‘붉은 그림’만 전시하던 중국 미술관이 1978년 <프랑스 19세기 농촌과 풍경>전을 시작으로 인상파, 독일 표현주의, 피카소 등 수많은 서양 작가를 소개하면서 당시 청년 예술가들도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 같아요. 서양의 기법이 많이 들어오긴 했지만 여전히 중국 전통 학습의 영향권에 있었기 때문에 사실 굉장히 혼란스러웠어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혼돈의 시간을 보냈죠. 그러다 1992년 외국에 나가게 됐는데, 눈앞에서 직접 서양 미술을 보니 ‘이게 책에서만 볼 수 있는 허황된 것은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서양 미술을 그제야 현실로 받아들이게 됐어요. 그러면서 내가 앞으로 뭘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실해지기 시작했죠.
중국 작가의 작품은 중국의 정치적·사회적 이슈가 표면적으로 드러난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그것만큼 좋은 소재가 없기도 하죠. 비교적 당신의 작품에는 그런 복잡한 문제가 은유적이고 비유적으로 나타나 있어요. 평론가들은 내 연대의 작가들을 가리켜 정치적 성향이 강하다고 합니다. 어릴 적 교육을 그렇게 받은 탓이죠. 중국 정부는 늘 이렇게 말했어요. “너희는 개인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국가가 대신 생각해주고 인민의 안위를 살필 테니 너희는 그냥 따르기만 하면 된다.“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다는 걸 조금씩 잊어갔어요. 개혁 개방 이후 상황이 바뀌었고, 스스로 생각이란 걸 할 수 있게 되자 제일 먼저 든 자문은 바로 이거였어요. ‘나는 누구인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고민에 빠져있다가 우연히 고향집에서 낡은 가족사진을 보게 됐어요. 그 속에서 획일화된 포즈, 표정 없는 집단의 모습을 봤고, 그것을 통해 개인과 가정, 사회, 국가가 맺고 있는 복잡한 관계를 초상을 통해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작품도 가족사진에 그 본질을 두고 있는 것같이 보이지만 그 바탕에는 개혁 개방 전후의 개인적 변화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군요. 일부러 정치적 환경을 생각한다거나 배제하면서 그림을 그리진 않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모든 상황이 연결되어 있죠. 그래서 정치는 나와 비슷한 모든 연배 작가들에겐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생활의 일부죠.
요즘 젊은 작가들의 작품도 그런 관계 속에 있나요? 지금은 너무 상업적이라 정치적 특성이 그 뒤에 가려져 있죠.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내 연배 작가들과 단순히 비교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요즘은 순수 예술을 하는 작가도 많아요. 그러나 내 개념 안에서 순수 미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족, 친구 등 모든 인간관계가 예술에 끊임없이 영감을 주고 관계를 맺고 있어요. 사회적 관계를 통해 생성된 작품이죠.
오래되긴 했지만 어릴 적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1960년 당시 부모님이 ‘정신 재무장’ 교육을 받으러 간 후 몇 년간 친척 아주머니 손에 컸다고 들었습니다. 두 형과 남동생과 함께 지낸 그 당시 상황은 어땠나요? 그전에도 부모님께서는 우리에게 “밖에 나가서 놀지 말고 집에서 그림 그리며 시간을 보내라”라고 늘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친척 집에 있던 당시에도 저는 늘 집 안에서 그림만 그렸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오래도록 그림을 그리다 보니 이렇게 작가가 됐네요.(웃음)
그때 느낀 외로움, 상실감 등이 작품에 영향을 미친 것처럼 들리는데, 맞나요? 어릴 때 이야기를 하면 끝도 없겠지만, 내가 그리는 그림은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라기보다 내 기억의 일부예요. 즉 어린 시절의 기억을 표현한 거죠. 따라서 나는 그림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비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어릴 때 느낀 부모님에 대한 감정 같은 것을 표현하고 싶은 겁니다.
많은 현대미술가가 뉴욕이나 런던, 파리 등지에서 활동합니다. 해외에 잘 알려진 세계적 작가일수록 그런 경향이 짙죠. 그런데도 중국에서만 작업을 고수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아, 사실은 한국에 작업실을 만들어보려 했는데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점 때문에 어렵게 됐어요. 한국이야말로 공기도 좋고 매력적인 곳이죠.
1 Zhang Xiaogang, My Daughter No. 2, 2000
2 Zhang Xiaogang, Green Wall-Study Room, 2009
3 Zhang Xiaogang, The Prisoner of Book No.1, 2013
4 Zhang Xiaogang, Lethe, 1989
젊은 작가들은 서로 교류가 많던데 당신은 은둔형인가요? 나도 젊을 때는 매일 다른 작가들과 술 마시고 그림도 같이 그리곤 했어요. 젊은 작가라면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중요하게 생각되는 건 교류보다 새롭고 좋은 전시를 보는 것, 좀 더 심도 깊은 토론을 하는 것입니다. 베이징에 살면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기도 해요. 작가에겐 시각적 경험이 정말 중요한데 베이징엔 턱없이 부족하죠. 지난해 3개월 동안 뉴욕에서 작업을 했는데, 말이 안 통해 불편한 것 빼고는 모든 것이 환상적이었어요. 시장에서 야채를 사듯 언제 어디서나 쉽게 전시를 볼 수 있었고, 문화적 소스를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었죠. 그런데 그런 것이 모두 높은 수준이라 인상적이었어요.
4대 천왕이라 불리는 작가들과는 가까이 지내나요? 4대 천왕이라는 말은 제 생각에 대만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 F4가 유행하면서 생겨난 말이 아닌가 싶어요.(웃음) 모두 좋은 친구들이라 가까이 지내지만, 밖에서 그런 시선으로 보니 우리끼리도 어색한 면이 좀 있습니다. 사실 4대 천왕이라는 말이 너무 상업적이기 때문에 좋게 느껴지지는 않아요.
한국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은 ‘대가족’ 연작입니다. 작품을 통해 연상한 당신은 꽤 조용하고 우울한 눈빛일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밝고 유머러스한 것 같아요. 그런가요? 지금 유머를 배우고 있는 중이에요.(웃음) 원래 말도 없고 농담도 하지 않는 성격이거든요.
2011년 소더비 홍콩 경매에서 ‘영원한 사랑’(1988년)이 110억 원에 낙찰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무슨 생각이 들었나요? 무척 기뻤습니다. 본래 3폭짜리 작품인데, 10년 동안 각각 흩어져 있었어요. 2점은 베이징 교외의 한 창고 안에 방치된 탓에 작품이 훼손되어 수리를 해야 했죠. 나머지 1점은 1989년에 미국의 한 컬렉터가 소장한 것으로 어느 정도 대가를 치르고 홍콩으로 다시 가져왔습니다. 그렇게 이 3폭의 작품을 하나로 모았고, 높은 가격에 팔리게 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있어요.
소위 잘나가는 작가입니다. 이쯤 되면 고급스러운 취미를 즐긴다 해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요.그림 말고 즐겨 하는 일은 뭔가요? 술 마시는 것을 좋아했는데 요즘은 끊고 영화 감상으로 대신하고 있죠.
자동차나 모터사이클 등을 모으는 남자 작가도 많던데 따로 컬렉팅하는 건 없나요? 남들이 내 작품을 컬렉팅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따로 내가 모으는 것은 없어요.(웃음) 다만 오랜 시간 살아오면서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 개인적 기록을 담은 종이 등은 지금껏 간직하고 있죠.
그래도 사람들은 궁금해할 것 같아요. 이렇게 잘나가는 작가가 가장 많이 돈을 쓰는 곳은 어디인지. 원래 소비를 잘 못하는 성격인 것 같아요. 밤낮으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작업실이다 보니 새로운 브랜드나 명품에 대해선 잘 모르기도 하고요. 그래서 경제적인 부분은 주로 아내에게 맡겨요. 개인적으로 가장 많은 돈을 쓰는 건 아마도 여행?
한국에서는 요즘 아트 투어가 유행이에요. 가본 곳 중 <노블레스> 독자에게 꼭 추천해주고 싶은 곳이 있나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나는 대가들이 작업하기 위해 거주한 장소에 관심이 많아요. 대가들이 살았던 곳에 직접 가면 그 기운이나 영감을 받을 수 있거든요. 지난해에는 내 우상인 반 고흐가 어디에서 어떻게 그림을 그렸는지 보고 싶어서 프랑스 아를과 그가 죽기 전까지 시간을 보낸 생레미 지역을 둘러봤어요. 고흐가 그림을 그린 동선을 따라 나도 같이 그림을 그려봤어요.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머무른 병원에도 갔죠. 또 스페인 작가 엘 그레코를 정말 좋아하는데, 그의 고향 톨레도에도 가봤어요.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곳으로 원래 2일 정도 묵을 예정이었는데 가보니 너무 좋아서 5일 동안 그곳을 여행했습니다.
모든 작가가 ‘좋은 작가’가 되고 싶을 거예요. 그렇다면 좋은 작가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내려야 할 텐데,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작가의 모습이 있나요? 대학 시절, 그 문제로 친구들과 많은 토론을 했어요. 어떻게 하면 좋은 작가가 될 수 있을지, 어떤 작가가 좋은 작가인지. 토론을 하면서 미술사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는데, 인상 깊게 읽은 책이 대만 작가의 <천재의 비극>이었어요. 서양권 예술가 10명의 일대기를 수록한 책으로 작가들이 얼마나 힘들게 작업해왔고,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엔 ‘힘든 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작가가 좋은 작가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 그렇게 비극적인 삶을 살지 않고도 성공한 작가를 알게 되면서 ‘예술계에는 수많은 길이 있고 그중에서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것을 열정적으로 할 때 성공한 작가가 될 수 있구나’라는 걸 깨닫게 됐죠. 성공한 작가가 아니라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여기에 마지막 한 가지를 더해야 하는데, 바로 ‘수준 높은 문화를 지향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작가 스스로 문화 예술에 대한 깊은 탐구를 통해 높은 문화 수준에 도달했을 때 좋은 작가라고 불릴 만하지 않을까요?
대구에서 만나는 장샤오강
대구미술관이 지난해 쿠사마 야요이 전시에 이어 또 하나의 대박 전시를 준비 중이다. 바로 6월 13일부터 90일간 열리는 장샤오강의 개인전. 중국 현대미술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 장샤오강의 이번 전시를 통해 관람객은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총체적으로 감상하며 작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When 6월 13일(금)~9월 10일(수) Where 대구미술관 1전시실, 어미홀, 053-790-3000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사진 김동욱 취재 협조|대구미술관, 페이스갤러리 베이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