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빠진 중국 작가들
중국 작가의 제주도 러시가 화제다. 이들은 맑은 공기와 자기 땅을 소유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이끌려 제주도에 이미 작업실을 지었거나, 곧 지을 예정이다. 국내 미술계에 이들이 미칠 영향을 짚어본다.
제주 저지문화예술인마을에 있는 펑정제의 작업실
지난해 10월 ‘초상화’ 시리즈로 이름을 날린 중국의 스타 작가 펑정제(Feng Zhengjie)가 제주도에 작업실을 열었다. 베이징, 쓰촨, 싱가포르에 이어 새 작업실을 마련한 것이다. 제주시 한경면 저지문화예술인마을에 있는 네모반듯한 단층 건물엔 ‘Feng Studio’라는 붉은색 현판이 붙었다. 펑정제의 작업실 오픈식에선 제주도 지사를 비롯해 서울에서 온 취재진, 중국 본토에서 축하하기 위해 날아온 100여 명의 중국 작가가 구름 떼를 이뤘다. 펑정제는 “제주도는 작은 섬이지만 매번 느낌이 다르다. 다음엔 어떤 것을 느끼게 될지 궁금해 계속 찾아오게 되는 것 같다”며 기자들에게 제주에 온 소감을 전했다. 그는 5억 원에 이르는 토지를 매입해 ‘봉정걸’이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제주도민이 됐다. 또한 29명이 정착한 저지문화예술인마을의 ‘물 건너온’ 첫 해외 작가가 됐다.
펑정제가 제주도에 작업실을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페이, 로지에, 쉬저 같은 중국 작가도 제주도에 땅을 샀다. 모두 중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젊은 작가다. 이들은 중국에서 매일 운항하는 항공편, 스모그 없는 맑은 하늘, 중국에 비해 저렴한 땅값, 5억 원 이상 휴양 시설을 매입한 외국인에겐 영주권이 나온다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 개인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다는 점에 이끌려 제주도에 땅을 샀다.
사실 중국 작가들이 이렇게 제주에 들어오게 된 배경엔 숨은 공로자가 있다. 바로 베이징에 있는 ‘갤러리 문’ 대표이자, 아시아예술경영협의회의 박철희 공동 대표다. 그는 제주도를 아시아 미술의 허브로 만들 요량으로 지난해 5월 이 협회를 설립했다. 또한 10여 년 전 베이징 유학 시절 맺은 중국 작가들과의 인연을 기반으로 중국 작가의 제주도 유입을 주도하는가 하면, 펑정제가 제주에 작업실을 짓고 전시할 수 있게 도왔다. 아시아예술경영협의회는 한·중·일로 시작해 인도, 인도네시아까지 아시아 국가의 작가와 미술계 관계자가 인적 네트워크를 맺고 있는 모임이다. 이들은 베이징의 798 예술지구 같은 국제예술특구를 제주도에 조성하겠다고 밝혀 미술계의 이목을 끌었다. 이들이 구상하는 국제예술특구는 작가의 작업실뿐 아니라 아시아의 예술 분야 전반을 아우르는 계획이어서 더욱 주목받았다. 박철희 대표는 “세계 미술 시장이 아시아 중심으로 재편되는 상황에서 그 주역인 중국 작가들이 제주도로 몰린다면 국내 미술계에 미치는 영향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라며 “중국 작가들을 제주도에 데려오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유명 작가를 만나기 위해 전 세계 수집가와 전시 기획자들이 제주로 모이게 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그의 말처럼 중국 미술 시장은 최근 5년 사이 급격한 성장세를 보였다. 중국 작가의 작품 가격도 천정부지로 솟아 컬렉터들의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2008년 불어닥친 국제 금융 위기를 계기로 한때 거품론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2010년부터 경제 위기가 회복되면서 지금도 여전히 작품 가격은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중국 화교와 현지인이 미술 시장을 주도하면서 중국의 미술 경매 규모는 런던과 뉴욕을 추월했고, 2011년 마침내 세계 미술 시장에서 미국을 제치고 거래 규모 1위로 올랐다. 일례로 쩡판즈(Zeng Fanzhi)의 유화 ‘최후의 만찬’은 지난해 10월 홍콩 소더비 경매에서 단 15분 만에 익명의 전화 응찰자에게 2330만 달러(약 250억 원)에 낙찰돼 아시아 현대미술 역사상 최고가를 기록했으며, 중국 작가 장다첸(Chang Dai Chien)과 치바이스(Qi Baishi)의 작품 낙찰 총액은 피카소를 앞질러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1 중국 작가들을 제주로 불러모은 아시아예술경영협의회 박철희 공동 대표
2, 3 29명의 예술가들이 입주한 제주 저지문화예술인마을
사실 이런 중국 현대미술 시장의 발전 한가운데엔 베이징 다산쯔의 798 예술지구가 있다. 폐허로 방치되던 군수 공장 6개를 박물관 작품 전시와 예술가의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해 명성을 얻은 곳이다. 현재 150개 이상의 다국적 갤러리를 비롯해 출판사, 디자인 숍, 카페 등이 밀집해 있다. 또한 빠른 변화와 함께 외국인 방문객이 나날이 증가하면서 중국 정부도 직접적 지원에 나섰다. 798 예술지구는 전문 미술 공간이 결집하면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국제 예술 공간으로 변모했다. 이는 뉴욕의 소호와 첼시 지역이 갤러리가 밀집한 예술 거리로 변모한 과정과 흡사하다는 평가다.
제주 현지의 미술계 종사자는 중국 작가들의 제주도 입성에 고무적인 반응을 보인다. 본태박물관의 임현준 실장은 중국 작가의 ‘제주 러시’에 대해 “중국을 중심으로 미술계의 기운이 아시아로 흐르고 있다”며 “그중 제주도는 한국과 중국, 일본 사이에 끼어 있어 그 기운을 받아들이기엔 최고의 요건을 갖추었다”고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또한 전 제주 현대미술관 관장이자 현 제주도청 문화정책과 김창우 계장은 “중국 현대미술은 우리보다 역사는 짧아도 열정은 강하다”며 “국제자유도시를 지향하는 제주와 세계적 미술계의 관심을 받고 있는 중국 작가의 만남은 서로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중국 작가들의 제주도 작업실 오픈을 반겼다. 그런가 하면 중국 작가의 제주 진출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이들도 있다. 저지문화예술인마을에서 4년째 갤러리노리를 운영하고 있는 이명복 작가는 “중국 작가들의 작품은 한국 작가와 달리 상당한 크기를 자랑하는데, 과연 그들이 이곳에서 작품을 완성해 외국으로 반출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그들이 실제로 ‘작업’을 위해 제주도에 왔겠느냐”는 회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제주도와 국제 미술계의 관심을 받는 중국 작가들의 만남은 어찌 됐든 국내 미술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전통 한옥과 잘 지은 주택, 비포장 흙길과 깨끗한 공기를 지닌 제주도는 중국과 홍콩, 일본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미술계 최고의 요충지다. 김창열과 박서보 등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나 아라리오갤러리, 국제갤러리 등도 이미 제주도에 정착했거나 새로운 공간에 곧 정착할 예정이라 제주도의 예술적 위상은 더 높아질 전망이다. 제주도가 앞으로 아시아 전역의 현대미술을 유입해 질 높은 문화 콘텐츠로 활용하기 위해선 미술계 안팎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
사진 김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