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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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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남자가 되 긴쉽지만 멋진 신사가 되는건 어렵다. 남의 눈을 신경 쓰기보다 늘 나자신의 시선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 세계 남자가 영화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의 “매너가 남자를 만든다 (Manners maketh Man)”라는 대사에 열광했다. 멋진 남자의 대명사인 ‘신사의 비밀’을 명쾌하게 설명하는 문장이다. 남자 나이 40대가 다가오면 더 이상 ‘오빠’라는 호칭이 어울리지 않는다. 이때 남자는 ‘신사’와 ‘아저씨’로 갈리는 인생의 기로에 선다. 남자다운 멋과 맛을 잃어버린 것 같은 ‘아저씨’가 되긴 싫다. 신사를 선택하고 싶지만 그 자격은 모호하다. 오죽하면 신사의 나라라는 영국 왕 제임스도 “나는 귀족은 만들 수 있지만, 신사를 만들 수 있는 것은 하나님밖에 없다”라는 탄식을 했을까. 나는 어릴 때 비행 마니아였다. 제1차 세계대전 전투기 조종사의 전기를 많이 읽었다. 그중 오스발트 뵐케라는 독일 조종사 전기에서 신사의 개념을 처음 접했다. 뵐케는 1916년 프랑스 도시 릴 상공에서 영국 정찰기를 만나 치열한 공중전을 벌였다. 전투는 뵐케의 승리로 끝났고, 영국 비행기는 추락했다. 그런데 뵐케는 총알이 빗발치는데도 영국 비행기가 떨어진 곳으로 비상착륙해 조종사와 조수의 생존 여부를 확인했다. 부상당한 영국 조종사에게 “사상자 없이 전투에서 승리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는 인사를 건넨 후, 앰뷸런스를 불러 그들을 독일 장교 병원으로 후송케 했다. 그 후에도 휴가를 내 영자 신문과 추락한 영국 비행기 사진을 선물로 들고 병실을 방문해 “혹시 가족과 동료들이 안전을 걱정할지 모르니 편지를 써라”라고 제안했다. 그리고 비행기를 몰고 적지인 영국 기지 상공으로 가서 그 편지를 투하해 가족들에게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이런 일화 때문에 역사는 그를 ‘하늘의 신사(gentleman of the sky)’라는 이름으로 기린다.
뵐케만 유별났던 건 아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장교들의 신사도는 전설적이다. 적군 조종사의 총이 고장나거나 총알이 떨어지면 공격을 멈추고 서로 날개를 흔들어 경례하고 헤어졌다. 비행기 꼬리에 백기를 달고 적진으로 날아가 전투 중 사망한 적군 장교의 장례식에 폭탄 대신 화환과 조의를 담은선물을 투하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잃어버린 신사도, 즉 ‘남자의 멋’은 장 르누아르 감독의 흑백 명화 <위대한 허상(La Grande Illusion)>의 주제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흰 장갑을 끼고 적군인 프랑스 포로와 함께 예를 갖춰 식사하는 독일 장교의 모습은 오늘날 사라져버린 한 시대의 남성상으로 누차 회자된다.
접촉 사고만 나도 욕을 하면서 상대방의 멱살을 잡거나 술을 마시고 음담패설을 일삼는 일부 남성을 볼 때마다 세상의 여성은 “신사의 대가 끊겼다”며 한탄한다. 영화 <블래스트(Blast from the Past)>는 이런 여자들의 신사에 대한 향수를 잘 보여준다. 내용은 1960년대에 지은 핵무기 대피소에서 자란 ‘옛날식’ 남자의 마초적 이지만 신사적 매력에 여주인공이 푹 빠지는 내용이다. <007> 시리즈의 원작자 이언 플레밍은 제임스 본드 캐릭터를 구상할때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장교 같은 완벽한 신사상’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세계적 인기는 21세기 사람들도 남자다운 멋을 지닌 신사를 그리워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신사에 대한 로망을 버릴 수 없는 남자들은 분위기 있는 싱글 몰트 바에서 스카치위스키를 홀짝인다. 멋진 셰이빙을 경험할 수 있는 바버숍을 다시 유행시킨다. 조끼 달린 스리 피스 슈트를 갖춰 입고, 재깍재깍 소리를 내는 아날로그 시계를 찬다. 교양을 쌓기 위해 재즈, 커피, 와인 클래스에 다니기도 한다. 하지만 신사도가 빙하라면, 에티켓과 교양은 물 위로 나온 빙산의 일각이다.

영화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

나는 프랑스 파리로 이사한 후 펜싱을 배우려고 파리 3구에 있는 200년 전통의 펜싱 도장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신사도의 진수를 접했다. 펜싱은 움직임이 빨라 심판이 점수를 매기기 힘들다. 그래서 정밀한 전기 채점 기계를 사용한다. 그런데 이 도장에는 전기 채점 기계가 없었다. 코치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까지 펜싱엔 자기 몸에 칼날이 느껴질때 스스로 실점을 인정해 상대방의 득점을 알리는 신사적 전통이 있었다고 알려줬다. 이 펜싱 도장에서는 그 정신을 계승해 전기 채점 기계를 안 쓴다는 것이다. 점수를 잃은 사람이 스스로 상대방에게 승점을 알려주는 신사도를 빼면 펜싱은 스포츠가 아닌 유치한 칼싸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코치의 말을 듣고 펜싱, 골프, 승마, 요트 타기 같은 신사의 운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신사다운 경기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신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스포츠 종목이 아니라 경기에 임하는 태도에서 신사와 비신사가 갈리는 것이다.
영화 <월스트리트>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 명대사가 기억난다.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다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네가 자랑스럽게 해야 하는 것은너 자신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남자로 살아가는 노하우, 즉 신사도의 핵심이 아닌가 싶다. 펜싱에서 자신만 알 수 있는 실점을 숨겨 게임에 이기면 남들 앞에서 체면은 세울 수 있겠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창피하다. 총알을 다 써버린 적군의 비행기를 격추시키면 상부의 훈장을 받겠지만 본인은 정정당당한 전투가 아니라 살육을 했다는 것을 안다. 남의 눈보다 자기 눈을 중요시하면 멋진 매너는 저절로 우러나온다. 그런데 대체로 우리나라 남자는 평생 남의 눈을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는삶을 강요당한다. 자랑스러운 아들, 멋진 선배, 섹시한 남자친구와 남편, 자상한 아버지가 되려고 노력하면서 막상 자기 시선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신사는 다. 남들이 가장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실 자기 스스로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매너가 남자를 만든다’는 원래 영국의 신사 학교 윈체스터 스쿨의 모토였다. 원래 ‘매너(manners)’라는 단어는 단순히 에티켓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인생의 모든 것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을 말한다.싱글몰트가 아니라 술을 대하는 태도가, 스리피스 슈트가 아니라 옷을 입는 태도가 신사임을 증명한다. 옷을 아무렇게나 풀어헤치고 술에 취해 음담패설을 주고받는 사람 역시 그런 행동이 모여 그 사람의 인품을 만든다. 거꾸로 멋있는 행동을 반복하면그 멋이 자기 것이 된다.이것이 윈체스터 스쿨이 700년 동안 학생들에게 가르쳐온 신사의 비밀이다. 그래서 이탈리아 극작가 루이지 피란델로는 이렇게 말했다. “한 번만 결정적 순간에 용감 하면 영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신사는 언제나 신사여야 신사다.”

조승연 <이야기 인문학> <공부기술>, <그물망 공부법>등 총 16권의 책을 출간하고 EBS <세계테마 기행>, KBS2 <여유만만> 등에 출연하며 활발한 방송 활동 중이다. 영어, 불어, 이탈리아어에 능통, 지금은 한문과 중국어를 배우며 동양 언어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현재 ‘오리진보카’ 대표로, 세계 에 수출할 영어어휘학습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다.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조승연(인문학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