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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이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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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권이 돌아왔다. 1985년 첫 앨범 <들국화>를 내고, 30년 가까이 대한민국 록 스피릿을 결정지은 들국화의 리더였던 그가 새 밴드 ‘전인권 밴드 그리고 친구’를 결성해 콘서트까지 열었다. 콘서트가 끝나고 이틀 뒤,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그는 왠지 모르게 밝은 얼굴이었다. 올해로 예순두 살인 그의 얼굴엔 이전의 어떤 꼬장꼬장함은 없었다. 그가 철이 들었다고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이날 그는 ‘열중하는 마음’에 대해 얘기했다.

좀 쉬셨어요? 어젠 좀 쉬다가 연습도 하고 그랬어요.

댁이 여기서 가까우세요? 저 뒤쪽으로 몇백 미터 올라가죠. 그런데 오르막길이 많아가지고….

이 동네에서 나신 거예요? 태어난 건 인왕산 쪽이에요. 근데 한 살 때 여기로 와서 본적이 삼청동이에요. 우린 옛날에 강하게 컸어요. 산에다 무허가 건물 짓고 살고 그랬지. 지금은 달라졌지만.

요즘에도 일찍 잠들어 새벽 3~4시에 일어나세요? 더 빨라졌어요. 2시 30분쯤 일어나죠. 저녁 8시가 되면 괜히 나가고 싶고 그래서, 일부러 연습을 격하게 해요. 그러다 그냥 지쳐 자버려요. 밤 10시에 자도 새벽 2시 30분쯤엔 꼭 일어나요.

그 시간에 깨서 뭘 하세요? 주로 옛날 음악 듣고, 따라 할 만한 게 있으면 연습해보고, 내 스타일로도 만져보고. 요샌 피터 폴 앤 메리나 닐 영, 사이먼 앤 가펑클이 좋아요.

얼마 전 아트 가펑클 공연에도 가셨어요? 보려고 했는데 몸이 안 좋아서 못 갔어요. 팀이 해체되고 아트 가펑클 한 명만 활동 하니 아쉬웠겠지만, 그도 워낙 정신적으로 대단한 인물이라 볼 만한 공연이었을 거예요. 노래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은 철학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세계 음악계에서 지성으로 불리는 사람이니까.

지난 주말의 콘서트는 어떠셨어요? 첫날 공연은 보통 리허설 느낌으로 하신다고 하던데. 어? 그건 아닌데.(웃음) 근데 첫날엔 자신도 모르게 오버를 하는 경우가 있긴 해요. 실수지. 연습 땐 제대로 했는데 건반을 더 세게 친다던가. 그게 밴드 활동의 어려움 이기도 해요. 첫 공연이라 흥분하죠. 그래서 그렇게 말한 거였겠지. 둘째 날엔 첫날보다 2~3배 이상 반응이 좋았어요.

그런데 공연 중 왜 그렇게 자꾸 “열심히 하겠다”고 하셨어요? 열심히 해야 되니까. 조금 필요 이상으로 그렇게 말했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냥 열심히 해야 할 것 같고, 열심히 하고 싶고, 열심히 해야 나를 좀 더 찾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말한 거예요. 그래야 자기 주관이 나오고, 사는 거 같은 거지.

그럼 예전엔 열심히 안 하셨어요? 그랬죠. 예전엔 열심히 안 한 내가 있었어요. 지금은 열심히 하는 내가 있고. 젊은 시절부터 최근 한 3~4년 전까진 열심히 안 했어요.

1980~1990년대의 들국화 활동까지 포함해서요? 열심히 안 했죠. 그냥 옛날에 들은 풍월로 한 거였지. 그땐 희망도 없었고. 어디 카페 같은 데서 좋은 음악 나오면 최성원이랑 둘이 이랬어요. “이런 음악 만들면 뭐하나. 어디 써먹을 데가 있어야지.” 우린 그런 시대에 자랐어요. 힘들게 좋은 음악 만들어봐야 당시 현실이랑 맞지도 않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들국화는 연습을 많이 한 팀은 아니었어요. 우린 그냥 말을 많이 했죠. 아무 데나 반항하고 꼬장을 부린 팀이었지.

그럼 좋은 게 뭐였어요? 아무리 그래도 들국화 1집은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같은 차트의 1위에 오르는 앨범이잖아요. 사실 그땐 마약이 제일 좋았어요. 물론 밴드도 계속했는데, 그건 살아가기 위한 거였지. 근데 요샌 신기하게 음악이 그렇게 좋을 수 없어요.

새삼 왜 갑자기 그렇게 된 거예요? 사람들은 기성세대와 권위에 도전하고 저항하던 전인권이 나이를 먹더니 갑자기 세상과 타협하고 얌전히 음악만 하려는 게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노래는, 그냥 뭘 새로 시작하려는데 내가 할 줄 아는 게 그 것밖에 없어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죠. 근데 하다 보니 정말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술이고 뭐고 다 끊겠다고 다짐했죠.

술을 끊었어요? 네. 가는 게 싫어서요.

‘가는’ 거요? ‘뻥’ 가는 거. 술 마시면 간다고 그러잖아요. 난 세계적으로 술을 많이 마셨어요. 뒤떨어지지 않게.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레 그렇게 돼나 봐요. 특히 남자는 ‘환갑 지나 철든다’고 하죠. 그렇게 된 게, 2012년 병원에서 나왔을 때 방송국에 다시 가는 게 그렇게 겁났어요. 그러다 딸이 시집을 갔죠. 결혼식에서 신부 입장을 하는데, 내가 눈총을 받는 아빠니까 딸 마음은 좀 그랬을 거예요. 밝게 웃고 있지만, 내겐 그런 수심이 느껴졌죠. 그래서 그때 속으로 ‘아빠가 널 위해 다시 한 번 정상에 설게’라고 했죠. 그날부터 나와의 싸움이 시작된 거예요.

결국 가족이 밑바탕에 자리하고 있었던 거네요. 그럼요. 지금은 그때 결혼한 딸이 손녀를 낳아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집으로 데려와요. 애가 두 살인 데 말도 못하게 귀여워요.(웃음)

엊그제 공연장에서, 들국화 시절 가졌던 성격에 대 해 말씀하셨죠? 옛날 얘길 뭉뚱그려 한 말이었어요. 나같은 옛날 사람은 두 가지 성격을 지닐 수밖 에 없어요. 하나는 1970~1980년대의 군부독재에 순응해온 나, 그리고 하나는 본래의 나. 본래의 나는 현실적인 걸 싫어해요. 게다가 오랫동안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내가 아는 자유라는 게 있어요. 그런데 그게 막힌 거죠. 그리고 그런 걸 다 무시하고 현실에 순응하는 바보 같은 내가 있어요.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난다’는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것이 또 다른 나였죠.

그래도 들국화 시절엔 ‘순응’보다 ‘저항’ 쪽이었잖아요. 바이브레이션 없이 절규하듯 내지르는 전인권 목소리에 당시엔 늘 사람들이 몰렸죠. 들국화를 만들고 힘을 발휘한 건, ‘우린 명랑운동회에 안 나간다. 싫다’ 그걸 확실히 주장한 거였죠. 그 당시 유행한 <가요 톱 텐>에서 연락이 왔을 때도, 난 우울증 환자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하고 안 나갔어요. 그런 식으로 들국화는 나름 현실에 맞선 이미지가 있죠.

‟내 진실을 찾고 싶어요. 난 내가 누군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저 이제 막 내 안에 있는 작은 섬에 나무 하나 심은 거예요. 지금까진 아무것도 못 심고 산 거고. 이게 언제 숲이 될진 모르겠어요. 근데 이게 바로 나죠.”

당시에 자연스레 몸에 밴 관습이나 행동거지 같은 것 때문에 화가 나진 않으세요? 근데 화가 난다고 뭐 어쩔 수 있나? 지금도 나이 좀 먹은 사람들은 당시의 충격에서 벗어 나질 못했어요. 내 친구들을 만나도 그렇죠. 아직도 굉장히 도덕적이에요. 그래서 다들 ‘도덕의 한계’ 안에서 얘기해요. 그래도 들국화가 한 가지 잘한 게 있다면 끝까지 그시대에 세뇌를 안 당한 거예요. 그런데 이젠 그런 모습조차 정이 들어버렸어요. 그 둘이 내 안에서 합쳐져 조화를 이룬 것 같아요.

2013년 10월 드러머 주찬권의 죽음으로 들국화가 다시 해체됐어요. 많은 팬이 들국화의 해체를 두고 “머리로는 이해하나 마음으론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표현했죠. 그런 상황에서 다시 새롭게 팀을 결성하게 된 계기는 뭔가요? 나는 음악을 하는 사람이고 밴드 활동을 오랫동안 했어요. 들국화를 안 할 때도 계속 밴드를 해왔고요. 그래서 왠지 고집하고 있어요. 나도 모르겠어요.

이젠 많은 곳에서 ‘환갑의 레전드’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어요. 음악계의 어른이 된 거죠. 어른의 눈에 지금 음악계는 어떻게 비치나요? 내가 어른인지 사실 잘 모르겠어요.(웃음) 그냥 음악 하는 친구들이 열심히 하면 좋겠어요. 그래야 자기 철학이 생기거든요. 우리나라엔 젊은 시절의 아픔을 달래줄 수 있는 음악이 너무 없어요. 우린 어차피 다 같이 죽을 사람인데, 그냥 한번 서로 안아주자. 그런 멋과 맛이 있는 음악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부족해요.

음악계에서 큰소리를 내도 되는 사람이 그렇게 유하게 말하니 좀 색다르게 들려요. 록 스타라면 자고로 믹 재거처럼 독설도 하고 그래야 멋있는데. 하하. 그래요? 우리나라 음악 하는 사람들이 잘하는 게 뭔가 하면, “너 한 곡 할 때 나 열 곡 한다” 그게 자랑이에요. 그런데 외국에 가보면 공연 하나를 위해, 자기 파트든 아니든 음악 틀어놓고 하루 종일 연습만 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연습하는 걸 좀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주변에도 많아요. 근데 정말 잘하는 친구들은 오히려 그런 말 안 하고 연습하죠. 이건 음악을 계속 파고들면 알 수 있는 거예요.

건강은 어떠세요? 작년부터 운동을 시작했어요. 공원도 돌고, 성곽 쪽으로 2시간쯤 걷다가 오기도 해요. 내가 지금처럼 살아난 건 운동 덕분이에요. 특히 요샌 ‘산속’에 들어가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요. 옛날엔 삼청공원 위쪽으로 철조망을 쳐놨는데, 지금은 다 들어갈 수 있게 해놓았어요.

‘전인권’과 ‘숲’이라니, 솔직히 잘 그려지지 않네요. 뭐, 퇴폐를 동반한 분위기로 걷는 거지.(웃음) 난 그런 생각을 안 하려고 하는데, 계속 그런 게 떠오르더라고요. 근데 그냥 줄이려고 애쓰는 거지. 사람은 누구나 그런 것 같아요.

본성 같은 거겠죠? 그렇죠. 그걸 얼마나 잘 숨기느냐, 아예 없애느냐.

없애는 건 어렵죠. 프란치스코 교황은 했잖아요. 교황도 다른 사람이랑 똑같거든.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절제를 하게 된 거예요. 그런데 아직은 모르죠. 그 사람 속에 안 들어가봤으니까. 절제를 하면서 그렇게 되고 있는 건지.

옛 들국화 앨범과 이번 ‘전인권 밴드 그리고 친구’의 첫 앨범이 다른 점은 뭐예요? 난 이제 들국화 시대를 떠났어요. 그래서 내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아는데, 거짓말로 예전처럼 슬프게 노래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옛날엔 소리 빽빽 지르면서 내가 이렇게까지 질러야 하나, 그런 생각도 했는데 이번 앨범은 편하게 만들었어요. 이렇게 하는 게 좋아요. 우리 밴드는 곧 자유로운 마음으로 하나가 될 거예요.

‘자유로운 마음으로 하나가 된다’는 말. 어폐가 있는 것 아시죠? 자유로우면 하나가 될 필요가 없잖아요. 이 세상의 모든 중요한 것엔 늘 어폐가 있어요.(웃음) 전인권은 무엇을 위해 노래해요? 내 진실을 찾고 싶어요. 난 내가 누군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저 이제 막 내 안에 있는 작은 섬에 나무 하나 심은 거예요. 지금까진 아무것도 못 심고 산 거고. 이게 언제 숲이 될진 모르겠어요. 근데 이게 바로 나죠. 그 외의 나는 따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아요. 날 좀 잘 아는 사람 있으면 나한테 알려주라고 해줘요.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
사진 LESS(김태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