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이라는 이름의 산
연주자가 고통스럽게, 때로는 희열에 차 산을 오를 때, 우리는 힘껏 박수 쳐줄 준비를 하고 곁에서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베토벤이라는 산이 높을수록 우리의 감동은 커지는 아이러니, 그럼에도 연주자들이 베토벤의 곡을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구나 베토벤을 알고 있다.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을 말할 수도 있고, 오케스트라 연말 공연의 대표적 레퍼토리인 교향곡 9번 ‘합창’은 물론 3번 ‘영웅’, 5번 ‘운명’도 빼놓을 수 없다. 베토벤은 이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음악가지만 실제로 그의 악보를 읽고 연주하는 연주자에게는 힘겹게 도전해야 하는 산과 같은 존재다. 산 중에서도 가장 험하고 높은 산. 평생 독신으로 산 외로움, 청력을 잃고도 작곡에 매진하며 전투적으로 살다 간 베토벤의 격정이 그가 남긴 곡에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음악사의 전무후무한 아티스트, 올해 한국을 찾는 클래식 연주자의 공연에서 유독 베토벤의 이름이 눈에 띄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1년 사이 베토벤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는 피아니스트 김선욱이다. 2012년 3월부터 작년 11월 21일까지 2년에 걸쳐 여덟 번의 공연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 전곡 완주를 끝냈다. 그가 피아니스트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후 가장 큰 도전이었고, 우리나라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완주에 성공한 최연소 연주자가 되었다. 특히 베토벤이 완전히 청력을 잃은 뒤 예술혼을 불태우며 작곡한 마지막 3곡, 30~32번 후기 소나타를 인터미션도 없이 연주해 화제를 모았다. 베토벤이 아니었다면 이처럼 큰 의미를 지닐 수 있었을까?
2014 크레디아 20주년 기념으로 선보인 ‘3일간의 베토벤 소나타 시리즈’는 베토벤의 음악 세계를 조명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에이버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 수상자이자 줄리아드 바이올린 교수인 바이올리니스트 캐서린 조가 바이올린 소나타를, 2008년 연주와 강의를 결합한 베토벤 소나타 연주 DVD를 발매해 평단의 호평을 받은 커티스 음악대학 교수 미아 정이 피아노 소나타를, 마지막으로 세계 정상의 첼리스트이자 1992년과 2005년 두 번의 음반 레코딩으로 베토벤 스페셜리스트임을 인정받은 피터르 비스펠베이가 첼로 소나타를 연주했다. 베토벤은 총 55곡의 소나타를 작곡했는데 모두 소나타 형식으로 최고의 표현력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바흐의 평균율 피아노곡을 구약성서에,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2곡을 신약성서에 비유하는 것을 보면 클래식 역사에서 인정하는 그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그만큼 연주자가 어떻게 해석하고 표현해야 할지, 연주 테크닉부터 감정 표현까지 쉽지 않은 고민을 안겨주는 곡이 틀림없다. 10곡의 바이올린 소나타는 바이올린 특유의 음색을 극대화했으며, 보조적 역할의 첼로는 베토벤 첼로 소나타를 통해 독주 악기로 격상했다. 이번 공연을 펼친 연주자들은 테크닉 차원의 실력뿐 아니라 베토벤에 대해 이론적으로 정통한 학구적인 면이 돋보인다. 세 번째 내한 공연을 선보인 피터르 비스펠베이는 말했다. “첼로 소나타 5곡은 곡마다 드라마틱하게 달라지는 멜로디와 분위기를 감상할 수 있어요. 아름다운 서사가 베토벤 음악의 특징이죠.”
4월 17일 내한 공연을 펼치는 바이올리니스트 제라르 풀레도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2곡을 리스트에 올렸다. 그는 바이올린 소나타 7번 C단조 ‘영웅’과 9번 A장조 ‘크로이처’를 공연의 시작과 끝에 배치했다. 18세에 제네바 파가니니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하는 쾌거를 이루며 뛰어난 테크닉은 물론 독창적인 곡 해석으로 바이올린 신동이라는 평을 들은 제라르 풀레. 현재 프랑스 바이올린계의 대부 격인 그도 지금까지 수많은 공연을 펼쳤지만 베토벤의 곡은 연주할 때마다 다르게 다가오고, 해석 또한 달라진다고 밝혔다. 유튜브에서 그가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연주하는 동영상을 찾아 감상해보면, 같은 곡이어도 연주한 시기에 따라 조금씩 음색의 차이가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화려한 기교를 드러내기보다 정확하게 작곡가의 의도를 파악해 연주하는 것에 포커스를 두는 그의 스타일은 이성적인 해석이 요구되는 베토벤의 음악과 잘 어울린다.
피터르 비스펠베이와 함께 무대에 올라 피아노를 연주할 알라스데어 비트손
미국 출신 피아니스트 에드워드 아우어는 6월 5일 금호아트홀에서 열리는 내한 공연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세 곡을 연주할 예정이다. 28번, 31번, 32번 3곡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는 후기 소나타에 해당하며 낭만주의 성격을 띤다. 쇼팽 스페셜리스트로 불리는 에드워드 아우어가 베토벤과의 정신력 싸움에서 만만찮은 에너지를 요한다는 31번을 어떻게 연주할지 오랜 팬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클래식 공연장의 스타, 팬클럽을 몰고 다니는 피아니스트 임동혁의 행보도 주목할 만하다. 2월 한 달 내내 전국을 순회하는 임동혁 피아노 리사이틀에는 ‘가장 낯선 모습으로 다가오다’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가 이번 리사이틀을 위해 준비한 레퍼토리를 보면 고개를 갸웃거릴 만도 하다. 그는 드뷔시, 바흐, 베토벤, 슈베르트의 곡을 연주한다. 지금까지 쇼팽, 프로코피예프, 라벨 등 낭만적이면서 화려한 곡을 주로 연주해온 임동혁이기에 이런 레퍼토리가 낯설게 느껴지는 동시에 어떤 연주를 들려줄지 기대를 품게 한다. 30대로 넘어가기 전 새로운 작품을 선택해 연주자로서 자신의 음악 세계를 확장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까지는 내가 느끼는 대로 치는 것과 방법적으로 이렇게 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치했어요. 그런데 베토벤을 연주할수록 그 간극이 점점 커지는 걸 느꼈어요. 처음에는 무척 당황스러웠죠. 너무 로맨틱하게 연주하나? 일부러 딱딱하게 쳐야 할까? 나름의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죠. 결국 음악은 베토벤이든 바흐든 언제나 아름다워야 하고, 듣는 이의 감성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고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은 철저한 감정 조절, 절제의 미학에 집중하고 있는 지금의 임동혁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곡이다. 잘하는 것,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는 연주자의 고민 앞에서 베토벤이라는 산은 조금 완만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수많은 공연에서 베토벤의 곡을 연주하는 이들은 분명 신인이 아니며 오랜 시간 명성을 쌓아온 음악가다. 그럼에도 베토벤이라는 산 앞에서는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지 많은 고민을 한다. 무엇보다 베토벤이 심어놓은 감정의 결, 음악적 시도를 하나씩 미션 클리어하듯 이해해가면서 얻는 희열이 크기에 이런 시도가 꾸준히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2013년 개봉한 영화 <마지막 4중주>에 등장하는 현악4중주 단체 푸가는 창단 25주년 기념 공연을 앞두고 베토벤의 현악4중주 14번을 연주하기로 한다. 악장과 악장이 이어져 있어 7악장을 쉬지 않고 연주해야 하는 고난도 곡 앞에서는 아무리 오랜 시간 연주해온 연주자라도 진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영화 중반에 단장인 피터가 말한 대사를 기억하면 좋겠다. “전체적으로 완벽한 연주가 아니더라도, 어느 한 부분이라도 감동을 주었을 때, 우리는 그 연주자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객석에 앉은 이라면 누구라도 베토벤을 연주한 무대 위 연주자에게 힘껏 박수를 쳐야 한다.
에디터 고현경
사진 제공 크레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