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LETTER

노블레스 매거진의 뉴스레터를 신청해보세요.
트렌드 뉴스와 이벤트 소식을 가장 빠르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닫기

격대교육은 힘이 세다

LIFESTYLE

조부모가 손주와 잠자리를 함께하며 교육하는 걸 ‘격대교육’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전통 교육 방식이다. 일하는 엄마가 증가하고 어린이 사고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는 지금, 격대 육아가 다시 조명받고 있다.

 

언젠가 리처드 용재 오닐의 가족사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의 어머니는 어릴 적 미국에 입양됐고, 미혼모의 몸으로 그를 낳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용재는 그의 어머니를 입양한 파란 눈의 조부모에 의해 키워졌다. 그의 조부모는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용재가 음악의 길로 접어들 수 있게 도왔다. 병원에서 일하다 은퇴한 뒤 TV 수리점을 운영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살림에도 레슨비만은 꼬박꼬박 내놓았다. 손자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믿은 외할머니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용재의 음악 수업을 위해 10년간 매주 한 차례씩 왕복 6시간을 운전했다. 이렇게 조부모의 헌신적인 열정과 사랑을 받으며 자란 용재는 결국 전액 장학금을 받고 줄리아드 음대의 ‘아티스트 디플로마’ 프로그램에 합격했다. 또 훗날 그래미 어워드 후보에 두 번이나 오르며 명성을 얻었다. 조부모의 조건 없는 사랑과 격려가 그를 훌륭하게 키운 것이다.

격대교육이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는 대표적인 이유로 여성의 활발한 사회 진출과 불안한 육아 보육 시설을 들 수 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자니 마음이 놓이지 않고, 사설 육아 도우미 또한 그리 신뢰가 가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격대교육은 이미 자녀를 길러낸 조부모의 경험과 지혜, 혈육이라는 공통분모가 작용해 여러 가지 이점을 만들어낸다. 현재 국내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격대교육의 형태는 가까이 사는 조부모가 부모가 출근한 후 아이를 직접 돌보는 경우, 그리고 3대가 함께 살며 조부모가 아이의 교육에 힘을 쏟는 경우 2가지다.

2012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이 발표한 연구 결과는 조부모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아이가 성적도 좋고, 성인이 된 후에도 인격이 올곧고 성취도가 높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엘더 교수 팀은 ‘조부모와 손주의 상관관계의 광범위한 연구’에서 핵가족화에 따른 아이들의 사회적·정서적 문제를 조부모의 멘토링으로 해소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캘리포니아 대학 연구진은 감정호르몬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는 노년층이 아이의 눈높이 교육과 관찰 면에서 부모보다 유리하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탄생 순간부터 아이를 지켜본 혈육, 아이가 편안하고 따뜻하게 느끼는 조부모가 일대일 애착 형성이 필요한 시기에 부모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1 리처드 용재 오닐의 음악적 감수성의 시작은 조부모와 살면서부터 가능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외할머니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용재를 10년 동안 6시간씩 운전해 음악 레슨에 데려다줬다. 조부모님의 뜨거운 사랑과 음악적 지지는 그를 세계적인 음악가로 성장시켰다.
2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 역시 어린 시절 부모 대신 할머니의 손에 자랐다. 할머니는 가난한 환경에서도 언제나 오프라에게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녀가 할머니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스스로가 갈망하는 자가 돼라”였다.

사실 격대교육은 수백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 존재했다. 1560년경 퇴계 이황도 손주 교육의 대가였다. 그가 손자 안도에게 보낸 편지가 이를 증명한다. “오늘 안동에서 보내온 과거시험 합격자 명단을 보고 너희들이 합격했음을 알게 되었다. 요행임을 알면서도 너무나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너는 벌써 <주역>을 읽고 있지만 <계몽>도 읽지 않을 수 없으니,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곧장 내려와서 이들과 함께 <계몽>을 읽는 것이 좋겠다.” 퇴계 이황은 44세부터 세상을 뜰 때까지, 무려 16년간 안도에게 125통의 편지를 보내 손자 교육에 힘썼다. 그는 자신의 손자들이 뛰어난 제자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권유했다. 특히 학문이 깊고 똑똑한 제자가 있으면 아들과 손자에게 제일 먼저 소개해주고 함께 공부하게 했다. 근엄한 대학자도 손주의 교육에 일희일비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격대교육연구소의 전영철 소장은 “조부모는 오랜 경험을 통해 축적한 지혜로 아이들을 안정감 있게 키울 수 있고, 부모가 겪는 시행착오와 자녀에 대한 과한 욕심에서 한발 물러나 아이에게 더 좋은 생각과 행동을 균형 있게 가르칠 수 있다”고 격대교육의 이점을 꼽았다. 그는 격대교육을 조부모의 연륜과 손주에 대한 내리사랑이 겹쳐진, 훌륭한 인재를 길러낼 수 있는 교육이라고 평했다.

물론 격대교육을 결정하기 전 유의해야 할 사항도 있다. 한번 손주 양육을 결정했다면 일정 기간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할머니의 꽤 괜찮은 육아>의 저자 김신숙은 “아기의 양육자가 자주 바뀌는 건 좋지 않으며, 손주를 돌본 경험이 없다면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한 주 정도 시험적으로 양육을 맡아보고 신중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그녀는 격대교육의 또 다른 주의점으로 ‘부모의 양육 방식을 존중하는 것’을 들었다. 아이 부모의 양육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지만 격대교육만 강조해 그것을 무시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부모 교육 전문가 임영주는 격대교육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손주 바보가 되지 말 것’과 ‘아이의 인심을 잃을까 걱정하지 말 것’ 그리고 ‘아이의 말에 상처받지 말 것’을 꼽았다. 그녀는 넘쳐도 좋은 게 사랑이지만 그것이 과하면 아이와 조부모 사이의 위계질서가 무너질 수 있다며, 늘 엄격한 면과 느슨한 면 사이에서 적절히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할머니, 할아버지가 키워서 다르다”는 말은 어투에 따라, 상황에 따라 정반대의 의미를 띤다. 한 지방자치단체에서 자녀가 있는 20~60대 여성 70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를 봐도 ‘조부모가 키워서 다르다’는 말의 이중성이 드러난다. 조부모에게 자녀 양육을 맡긴 여성들은 자녀의 인성이 풍부해지고(45.0%) 건강 상태가 향상됐다(19.5%)는 점은 인정했지만, 아이가 버릇이 없어지고(56.6%), 생활 습관이 나빠졌다(26.3%)는 부정적인 의견도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이외에도 옛날 양육 방식을 고집할 때 세대 간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 양육 방식의 차이로 새로운 고부 갈등이 생길 수 있다는 점과 아이의 응석이 늘고 제대로 된 훈육이 어려운 점, 최신 교육용 장난감이나 그림책을 구비해놓아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점, 바깥 활동보다 TV를 보는 경우가 많은 점 등은 격대교육의 단점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장단점을 인정하면서도 10명 중 7명의 여성이 조부모에게 자녀 양육을 맡겼다. 젊은 부모를 대신해 시간적 여유와 삶의 지혜로 무장한 조부모의 격대교육이 자녀 양육에 도움이 된다는 믿음이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갈수록 핵가족화되는 시대일수록 가족 공동체라는 울타리는 소중한 자산이다. 오늘날 조선시대와 같은 전통적 가족 공동체의 모습을 기대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격대교육의 활성화는 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아이들에게 부모의 손길이 가장 필요한 시기와 부모들이 한창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시기가 겹치는 지금, 격대교육의 필요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
참고 서적 <격대 육아법의 비밀>(SBS 스페셜 <그들에겐 특별한 것이 있다: 격대교육> 제작팀 지음, 경향미디어 펴냄), <할머니의 꽤 괜찮은 육아>(김신숙 지음, 예담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