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취할 것인가
남자에게 먼저 데이트를 신청하는 미래형 여자, 여전히 남자가 나서기를 기다리는 과거형 여자. 당신의 선택은?

“게이 아닐까?” 여자는 말했다. 요즘 부쩍 친하게 지내는 여자다. 며칠 전 모임에서 우연히 어떤 남자를 알게된 모양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호감을 느꼈다. 모임이 끝나기 직전 먼저 남자에게 연락처를 물었다. 먼저 데이트를 신청한 것도 여자였다. 남자도 여자가 싫지 않았던 모양이다. 둘은 어느새 카톡으로 일상을 나눴다. 커피 전문점에서 잡담을 나눴다. 일주일 남짓 만에 저녁을 먹으며 눈빛을 나누는 정도까지 진도가 나갔다. 누가 봐도 잘돼가는 사이다. 바퀴벌레 한 쌍으로 발전하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정작 여자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먼저 여자가 호감을 표시했고 데이트를 신청했다. 주변에선 하나같이 그런 그녀를 “멋지다”고 표현했다. 맞다. 그녀는 정말 멋진 여자다. 하지만 아무리 멋있어도 멋 부린 대가까지 피할 수는 없다. 먼저 데이트를 신청한 쪽은 결코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없다. 남녀가 짝짓기를 시작한 이래 만고불변의 진리다. 멋있는 척 데이트를 신청해본 남자라면 누구나 안다.일단 여자가 데이트를 수락한다. 여자가 데이트를 수락한 까닭이 마지못해서인지, 좋아서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였다는 것만으론 마음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남녀 관계는 마음과 육체를 놓고 벌이는 쌍방 거래며 대전 게임이다. 어느 쪽이든 먼저 속내를 드러내는 쪽이 선수를 빼앗기게 돼 있다. 과거엔 남자가 기꺼이 선수를 빼앗겼다. 그 덕분에 여자에겐 선택을 유보할 수 있는 중간 지대가 생겼다. 일단 만나보고 아니면 말겠다는 태도를 취할 수 있었다. 여자가 이 중간 지대에 머무는 동안 남자는 구애하며 마음을 얻어내려고 애썼다. 이 기간 동안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모른 채 일방통 행식 사랑 노래를 불렀다. 여자가 중간 지대에 오래 머물수록 구애는 더 열정적이 됐다.
요즘은 여자가 약자가 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멋진 여자처럼 말이다. 대신 과거 남자들이 겪은 번민과 고뇌를 똑같이 겪고 있다. 멋진 척한 대가다. 멋져서 호감 가는 남자와 데이트할 수 있었지만 멋져서 그 남자의 속내를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돼버렸다. 급기야 그녀는 자기 의심 단계에 접어들고 말았다. “저한테 호감은 있는 거겠죠? 호감이 없으면 저녁까지 같이 먹겠어요? 그런데 그 남자가 너무 옷을 잘 입어요. 혹시 게이 아닐까요?” 너무 억울해할 건 없다. 수천 년 수세대를 거치는 동안 남자들이 빠져 있던 고민이다. 여자들이 그런 고민을 시작한 건 전 세계적으로도 반세기가 안됐고 한반도에선 이제 도입 단계다. 그렇다 보니 마음의 함정에 빠지는 여자가 종종 있다. 사실 멋진 여자는 그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게이인지 아닌지조차 분간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스스로 그 남자를 좋아한다고 느낀다.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 없기에 자기 마음에서 확신을 얻게 되는 게 마음의 함정이다. 상대방을 좋아하는 마음에 스스로 취한다. 상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상대를 좋아하는 자신을 좋아하는 치명적인 함정이다.
남녀 관계는 마음과 육체를 놓고 벌이는 쌍방 거래며 대전 게임이다. 어느 쪽이든 먼저 속내를 드러내는 쪽이 선수를 빼앗기게 돼 있다. 과거엔 남자가 기꺼이 선수를 빼앗겼다. 그 덕분에 여자에겐 선택을 유보할 수 있는 중간 지대가 생겼다. 그러나 요즘은 여자가 약자가 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남자가 어렵게 구애에 성공한 여자에게서 쉽게 마음이 돌아서는 것도 마음의 함정 탓이다. 여자의 마음이 열렸다. 정작 남자의 마음은 알고 보니 텅 비어 있었다. 여자의 마음을 알고 싶어서 남자는 자기 마음을 과장한다. 스스로도 그 마음이 진짜라고 믿는다. 결국 자기 마음이 그 정도는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다. 남자는 당황하고 여자는 상처받는다. 잔뜩 기대하고 홈쇼핑 주문을 했는데 막상 포장을 뜯어보니 기대만 못한 상품과 같다. 사랑도 그렇다. 물론 이런 과대 포장이 없으면 사랑은 거래되지 않는다. 연애 시장에선 반드시 어느 한쪽이 자기 감정을 과장해야 매매가 이뤄진다. 어느 한쪽은 첫눈에 반한 척 해야 흥정이라도 붙여볼 수 있다는 얘기다. 그 후유증은 마음의 함정이다.
그녀의 친구가 있다. 그녀는 전형적인 과거형 여자였다. 그녀에게도 호감이 가는 남자가 하나 있었던 모양이다. 정작 남자가 앞장설 때까지 그녀는 꼼짝도 하지않았다. 그나마 남자는 직설적인 성격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좋아한다”고 구애해왔다. 다소 구식이었지만 싫진 않았다. 그녀는 기꺼이 남자가 마련해준 중간지대에 안착했다. 일단 만나봤다. 매력적인 구석이 많은 남자였다. 그렇다고 덥석 사귀자니 걸리는 것도 많았다. 그렇게 선택을 미루며 중간 지대에 머물다 보니 어느새 1년이 지났다. 여자도 너무 오래 끌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대론 남자가 떠나버릴 거라는 것도 알았다. 남자의 구애가 뜸해지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가끔 카톡도 보내고 전화도 걸었다. 말하자면 어장 관리를 한 셈이다. 그렇지만 중간 지대에서 스스로 나올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른바 썸을 탄 셈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말했다. “밀지도 당기지도 않는 건 이제 그만하자. 난 너한테 충분히 시간을 주고 마음도 보였어. 그만해.” 선택을 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라는 얘기였다. 결국 여자는 남자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남자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다. 구식인 남자는 여자가 무안하지 않게 먼저 저녁 약속 얘기를 꺼냈다. 그래도 이번 데이트는 여자가 남자에게 신청한 게 분명했다. 누가 봐도 그녀는 참 멋대가리 없는 여자다. 전형적인 과거형이다. 그녀는 리스크를 감내하지 않기에 안전하지만 대신 얻는 것도 없다. 선택할 권리가 주어졌지만 선택할 용기가 없다. 멋이 없기에 마음의 함정은 피할 수 있다. 대신 선택의 함정이 작동한다.
마음은 뇌가 만들어내는 화학작용이다. 뇌는 선택을 하는 주체가 아니다. 선택을 합리화하는 기계다. 일단 누군가를 선택하면 그 선택을 합리화하게 된다. 사랑에 빠지면 상대방의 단점에 너그러워지는 건 사랑 때문이 아니다. 선택에 대한 자기 합리화가 자기방어 기제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결국 여자는 남자를 좋아하게 되겠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라 선택에 대한 합리화일 뿐이다. 그녀는 결코 사랑을 할 수 없다. 많은 과거형 여자들이 용감한 사랑 대신 합리적 선택을 해온 것도 그래서다. 사랑은 언제나 먼저 구애하는 자의 전유물이었다. 구애에 순응하는 자는 피동적 선택을 할 수 있을 뿐이다.
현대사회엔 미래형 여자와 과거형 여자가 혼재한다. 남자 입장에선 데이트를 하면서 과거와 미래를 오가게 된다는 얘기다. 마음의 함정에 빠져 자기 감정을 증폭하는 여자와 선택의 함정에 빠져 자기 마음도 모른 채 남자에게 끌려오는 여자 사이에서 좋은 여자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 같다. 어떤 남자 입장에선 미래형 여자가 유리한 거래 대상일 수 있다. 멋진 여자는 말했다. “이번엔 너무 일찍 자지 말아야겠어요.” 미래형 여자에게 섹스는 남자와의 협상에 쓰이는 카드가 아니다. 섹스는 섹스일 뿐이다. 그녀가 원하는 건 자신이 선택한 남자의 마음이다. 반면에 남자는 마음의 함정에 빠진 멋진 여자와의 섹스를 취할 수 있다. 남자 입장에서 멋진 여자는 그만큼 쉽게 잘 수 있는 여자를 뜻한다. 그녀도 몇 차례 그런 일을 겪었다. 이번엔 좀 다르게 가고 싶다는 얘기였다.
반대로 과거형 여자는 섹스에 무심한 편이다. 남자가 구애를 해도 뭔가 조심스럽다. 섹스는 과거형 여자에겐 무기와 엇비슷하다. 섹스를 하려면 자신을 더 오래 중간 지대에 머물게 해줘야 한다고 설득한다. 결과적으로 여자는 수많은 남자의 유혹을 받지만 아무하고도 자지 않게 된다. 이때 남자는 비로소 합리적 선택을 하게 된다. 미래형 여자와 자면서 과거형 여자에게 구애하는 선택이다. 여자 입장에선 최악이지만 남자 입장에선 최선이다.
과거엔 현재형 남자와 현재형 여자만 있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구애했다. 여자는 예의 바르게 거절하거나 반갑게 맞아줬다. 연애는 영원한 현재를 뜻했고 그건 결혼과 유사어였다. 여자에게도 마음의 함정과 선택의 함정이 일어날 여지가 적었다. 지금은 다르다. 과거의 연애와 미래의 연애가 현재의 연애와 공존하고 있다. 비동시성의동시성이다. 게다가 현대사회에선 연애를 거래로 여기기 일쑤다. 상대방보다 나은 조건에서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계산한다. 그런 계산이 싫으면 미래형 여자가 되지만 그런 계산에 능숙하면 과거형 여자가 된다. 그런 여자를 상대하는 남자들은 점점 덜 남자다워진다. 선수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꼼수를 쓴다. 그렇게 남녀는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된다. 이건 인류사적 비극이다. 이런 조건에선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데이트를 하기 어렵다. 아무도 몸과 마음을 주고받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어느 쪽도 멋있지도, 현명하지도 않다. 단지 사랑이 저만치 갈 뿐이다.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글 신기주(저널리스트) 일러스트 신준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