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수놓다
섬유 디자인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2명의 디자이너를 만났다. 그들이 펼치는 섬유 예술과 작품 속 ‘미학’에 관해 나눈 이야기.
거대한 직물을 캔버스 삼아 화려한 작품 세계를 펼치는 바르바라 브루크만
거대한 직물 예술, 바르바라 브루크만
세계적 디자인 가구 브랜드 모오이(Moooi)는 가구와 조명, 오브제뿐 아니라 감각적인 카펫 컬렉션을 선보인다. 스튜디오 욥, 로스 러브그로브, 네리 & 후 등 내로라하는 디자이너가 만든 카펫은 저마다 예술 작품 못지않은 강렬한 색감과 다채로운 패턴을 자랑한다. 그중 바르바라 브루크만(Barbara Broekman)의 ‘DairyⅠ’이 단연 시선을 끈다. 멀리서 보면 빨려 들어갈 듯한 소용돌이 형상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수천 개의 인물 사진과 신문, 잡지 이미지로 이루어진 대형 콜라주 작품이다. 폭 4m에 달하는 이 카펫은 2005년에 작업한 동명의 작품을 샘플링했다. “각 이미지의 의미를 내세우기보다 이를 융합해 하나의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하는 데 중점을 뒀다”라는 그녀의 말처럼 심오한 이야기를 품은 이미지가 한데 어우러져 한 폭의 추상화 같은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암스테르담 출신의 바르바라 브루크만은 섬유를 기반으로 작업하는 디자이너다. 주로 사랑과 이별, 억압과 갈등 등 인간의 보편적 경험을 주제로 실을 직조해 대형 작품을 만든다. 그녀의 작품은 추상화 같지만 그래픽처럼 정교하고 회화처럼 색면 구성이 다양하다. 직물을 캔버스로 활용해 다양한 시도를 하는 그녀에게 ‘섬유 예술’은 어떤 의미일까?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에 예술가가 될 수 있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언제부터 예술가를 꿈꿨나요?
친구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 저는 헝겊과 물감, 찰흙을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었어요. 제가 ‘창조’하는 것에 남다른 관심과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어머니는 네 살이 되던 무렵 제 손을 잡고 미술 수업에 데려가셨죠. 그 후로 자연스럽게 암스테르담 헤릿 릿벌트 아카데미(Gerrit Rietveld Academy)에 진학했고, 버클리에 위치한 CCA(California College of the Arts)에서 본격적으로 섬유 디자인을 공부한 이후 1982년부터 아티스트로 활동했습니다.
남다른 창의성을 발현할 수 있는 디자인 분야는 많은데, 섬유 디자인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섬유는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삶에 생기를 부여하는 매개체라고 생각합니다. 신석기시대부터 섬유를 만들어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인간의 역사와 함께한 매력적인 소재죠.
작업 과정이 궁금합니다. 디지털화되면서 섬유 디자인 제품에서도 수공예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데, 수작업을 어떻게 활용하나요?
직조기를 사용하지만 수를 놓는 것만큼은 직접 손으로 하죠. 물론 수작업과 디지털 기술의 적절한 상호작용이 중요해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관련 이미지를 모으고 손으로 스케치합니다. 이때 수집한 이미지를 컴퓨터로 변환해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미리 예측해봅니다. 그런 다음 직물, 타일, 세라믹, 유리 등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 있는 재료를 모색하죠.
텍스타일만 가지고 작업하는 건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제가 표현하고 싶은 이미지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은 텍스타일입니다. 하지만 소재에 제한을 두진 않아요. 배경 재료로 세라믹, 타일, 종이를 사용하기도 하고 표현하는 도구로 유화물감을 더하기도 해요.
Good & Evil, Jacquard Machine Woven Carpet, 300×600cm, 2013
photo by Gert Jan van Rooij
Faith Irak, Jacquard Woven, 205×148cm, 2014
Photo by Gert Jan van Rooij
당신 작업은 카펫으로 공간 전체의 바닥을 덮어씌우는 것은 물론 계단, 건물 외벽과 광장을 커버링하는 것까지 스케일이 상당합니다. 큰 작품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나요?
거창하게 들릴 수 있지만 사회의 한 부분이 되는 예술을 하고 싶어요. 많은 사람의 눈에 띄어 그들이 작품을 향유하고 영감을 얻길 바라는 마음에 크게 만들죠. 주제도 대부분 사랑, 죽음, 탄생, 성(性) 등 우리가 일상에서 직면하는 문제와 연관이 있어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거든요.
때론 전쟁 같은 사회적 이슈를 다루기도 합니다. ‘Loss’ 시리즈는 규칙적인 패턴 아래 투영된 사람들의 표정이 몹시 심각하죠.
그 작품은 미국 오클라호마 시티의 폭탄 테러, 유고슬라비아 내전 같은 20세기 주요 사건을 포착한 신문 사진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전쟁과 재앙으로부터 도망치는 여성과 아이를 중점적으로 표현했어요. 사건이 일어난 나라의 전통 직물로 작업해 더 큰 의미를 부여했죠. 아메리칸 패치워크 퀼트, 유고슬라비아의 보스니아인이 사용하던 이슬람 문양이 들어간 천 등을 활용했어요.
세계 각국의 직물을 연구했나요?
2000년부터 여러 나라의 직물을 광범위하게 파고들었죠. 그리고 이를 반영해 암스테르담 시빅 가즈 갤러리(Civic Guards Gallery)를 장식할 40m 길이의 거대한 카펫을 제작했습니다. 암스테르담의 다국적 삶을 표현한 작품으로 벨기에 레이스, 터키 카펫, 남아프리카 줄루 왕국의 의복 등 각국의 독특한 직물을 조합해 완성했습니다. 이 카펫 또한 생활 밀착형 작품입니다. 누구나 무료로 볼 수 있고 밟으며 걸을 수 있죠.
어머니뿐 아니라 가족과 관련된 작품이 많습니다. 특히 오래된 사진을 보고 창조한 ‘My Family’ 시리즈 중 ‘J+L+E’가 인상적이에요.
실제로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어머니, 언니, 딸입니다. 그들을 담은 작품이에요. 전 평소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자료 조사를 꼼꼼히 하는 편이지만, 이 작품은 ‘어떻게 얼굴을 겹칠까?’, ‘어떤 컬러를 사용할까?’ 등 오로지 색상과 구조에 집중했습니다.
현재 진행 중인 작품에 관해 설명해주세요.
암스테르담 대학교를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5×30m에 이르는 거대한 패브릭 작품으로 새로 짓는 법학과 건물에서 공개할 예정입니다.
사람들에게 어떤 아티스트로 기억되고 싶은가요?
깊은 색감을 담은 생동감 넘치는 작품을 스케일 크게, 감각적으로 풀어내는 아티스트? 일단 제가 추구하는 것을 이해해주면 좋겠어요. 모두가 공감하는 이야기를 직물의 구조와 패턴의 아름다움으로 알리고 싶어요.
아제르바이잔의 전통 카펫을 입체적으로 재해석하는 파이크 아흐메트
섬유 연금술사, 파이크 아흐메트
이란과 러시아 사이에 자리한 이슬람권 국가 아제르바이잔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 파이크 아흐메트(Faig Ahmed). 그를 설명할 때 카펫을 빼고 이야기하긴 어렵다. 아제르바이잔의 특산품이 카펫이기도 하지만 전통 카펫을 가지고 실험적인 시도를 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를 주목할 만하다. 윗부분은 일반 카펫처럼 편평한데 아랫부분은 녹아내리는 듯한 독특한 모양의 ‘Liquid’, 노란색 페인트가 카펫을 뒤덮은 ‘Flood of Yellow Weight’, 주파수 진동처럼 솟아오른 ‘Carpet Equalizer’ 등 전에 본 적 없는 독특한 디자인의 카펫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그는 아제르바이잔 국립미술대학교 (Azerbaijan State Academy of Fine Art)에서 조각을 전공한 후 2007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아제르바이잔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참가해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한 인터뷰를 통해 “카펫은 동양 문화의 아이콘과 같다. 종교적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시각적으로 매우 아름답다. 터키에선 기도할 때 바닥에 까는 용도로 활용했고, 중동에선 이슬람 사원을 형상화한 무늬를 카펫에 새기기도 했다. 하지만 카펫의 기존 의미를 뛰어넘는 대담한 실험을 해보고 싶었다”라고 밝히며 카펫을 비롯한 텍스타일을 매개로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당신은 지속적으로 카펫을 탐구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텍스타일 중에서도 카펫을 주제로 작업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10년 전에 고대 언어와 영적인 가르침을 연구했는데, 카펫도 그 범주 안에 있었습니다. 그때 카펫이 단순한 인테리어 소품이 아니라 자아 성찰을 위한 이상적인 도구이자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요. 그런 카펫에 매료되어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인에게 아제르바이잔은 다소 생소한 나라입니다. 카펫이 특산품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들도 많고요.
아제르바이잔은 비교적 신생 국가지만, 문화와 민족성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카펫입니다. ‘내 카펫이 있는 곳에 내 집이 있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죠. 이곳에 와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도시 곳곳에서 카펫을 볼 수 있습니다. 카펫 박물관부터 카펫을 파는 노점상, 카펫으로 창문을 막아놓은 집…. 여기서 디자인, 생산, 유통, 판매 등 카펫과 관련한 일을 하는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전통적 아제르바이잔 카펫의 특징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변형하는지 궁금합니다.
이란의 직조 기술과 터키의 매듭 방식 등 아제르바이잔 카펫은 여러 문화의 혼합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역이나 환경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요. 겨울철 혹은 산악 지대에서는 거친 양모로 파일이 길고 두꺼운 카펫을 짜고, 여름철 혹은 저지대에서는 가는 양모로 짧고 촘촘한 카펫을 만들기 때문이죠. 다만 제가 만드는 카펫은 전통 카펫의 소재나 문양의 범주 안에서 형태를 완전히 입체적으로 바꾼 거죠.
Liquid, Handmade Woolen Rug, 200×290cm, 2014
ⓒ Faig Ahmed Studio
프로토타입 작품인 ‘Carpet Equalizer’
ⓒ Faig Ahmed Studio
Section, Plastic, Acrylic Paint, Carpet, 170×120cm, 2011
ⓒ Faig Ahmed Studio
카펫이 고무줄처럼 늘어나거나 초콜릿처럼 녹아내리는 디자인이 정말 특이합니다. 이런 디자인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나요?
조금 철학적인 이야기인데, 행복이나 불행 두 감정 모두 정점에 이르면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온전히 쉬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잖아요. 아무 생각 없이. 반면 가만히 있지 못하고 다른 무언가를 찾게 되기도 합니다. 복잡하게 들릴 수 있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통해 극복하고 싶은 이중적 심리 상태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카펫을 가지고 평면뿐 아니라 입체적 작업을 하는 것도 놀랍습니다. ‘Carpet Equalizer’는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허물어 카펫이 움직이는 듯하고, ‘Section’은 카펫의 절단면을 보여줍니다. 실을 직조해 입체적으로 만들기가 쉽진 않을 것 같은데요.
‘Carpet Equalizer’는 프로토타입 제품입니다. 저는 3차원 카펫을 만들기 위한 기술을 개발했어요. 구체적인 방식을 설명할 순 없지만 편평한 카펫 위에 돌기처럼 직물이 솟아오르게 하는 것이죠. ‘Section’은 카펫이면서 동시에 플라스틱입니다. 카펫을 입체적인 구 형태로 보고 단면을 잘라 직물의 짜임을 보여주었죠. 이건 구조, 결합, 존재 같은 개념과 연관이 있습니다.
카펫 재활용을 시사하는 ‘Recycled’ 작품도 만들었습니다. 환경문제에도 관심이 있나요?
처음에는 환경문제보다 카펫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싶은 생각이 컸습니다.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다 ‘재활용’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한 거죠. 작품에 사용할 오래된 카펫을 4개월 동안 찾아 헤맸어요. 150~200년 이상 된, 재활용을 상징할 수 있을 만큼 허름한 카펫을 원했거든요. 절친한 카펫 상인이 제가 찾는 것과 비슷한 카펫을 가진 할머니를 추천해주었죠.
그 할머니의 카펫이 작품으로 재탄생한 거군요?
네, 맞아요. 하지만 우여곡절이 있었어요. 그 카펫은 그분이 결혼할 때 할머니에게 받은 유품이었어요. 몇 번이나 설득한 끝에 제게 판매했는데, 알고 보니 역사책에 나올 만큼 가치가 있는 카펫이더군요. 카라바흐(Karabakh) 지역의 전통 카펫이었어요. 카라바흐는 아르메니아에 점령된 도시라 지금은 역사 속에만 존재하죠. 전 늘 전통이란 단지 오래된 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그 카펫을 소중히 여긴 할머니를 보며 전통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옛 카펫을 재활용했지만 제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작품이죠.
지난 8월 19일까지 뉴욕에서 < Black Sheep > 전시를 열었죠. 어떤 전시였나요?
실크와 울을 재료로 작업한 카펫을 선보였습니다. 이 두 재료는 아제르바이잔의 역사, 문화와 연관이 있고 상징적 의미도 큽니다. 울은 유목민이 주로 쓰는 소재고, 실크는 그들에 의해 아제르바이잔에 전해졌습니다. 이 재료를 이용해 만든 작품으로 아제르바이잔의 고대 문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죠.
현재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나요?
올해 11월에 바쿠의 야랏(Yarat) 현대미술센터에서 전시가 열립니다. 캅카스와 이란 지역의 인류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한 프로젝트예요. 주제는 ‘전통 사회에서의 성(sex in a traditional society)’입니다. 이번에 선보일 작품을 위해 제가 사용한 모든 재료는 성이라는 주제와 직접적 관련이 있어요. 금기시하는 영역을 가시적인 물건을 통해 자유롭게 표현했죠. 문명의 시작을 탐구하는 흥미로운 전시가 될 거예요.
사람들에게 어떤 텍스타일 디자이너로 기억되고 싶은가요?
먼 미래를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저 오늘을 잘 살아가는 거죠.
에디터 문지영(jymoon_@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