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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의 의연한 걸음

ARTNOW

이중섭 탄생 100주년, 작고 60주기를 맞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전관에서 10월 3일까지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이 열립니다. 짧지만 굴곡 많은 삶을 살다 간 천재 화가의 작품을 감상하며 그의 마음과 맑은 영혼을 느껴보기 바랍니다.

이중섭(1916~1956년)
1916년 9월 16일 평안남도 평원군의 부유한 지주 가문에서 2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격적인 미술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동경제국미술학교와 문화학원을 졸업했으며 일본 자유미술가협회, 조선신미술가협회 등에서 활동했다. 태평양전쟁으로 파리 유학의 꿈을 접고 원산에서 작가 생활을 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남쪽으로 피란해 부산, 제주, 통영, 진주, 서울, 대구 등을 떠도는 삶을 이어갔다. 지독한 궁핍으로 가족과 이별을 겪는 고통 속에서도 소, 아이들과 가족, 새, 물고기, 게 등을 그리며 창작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 그는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1956년 9월 6일, 40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예술의 순수성을 지향하고 표현주의 화풍을 제시한 한국의 대표적 모더니스트라는 평가와 함께 ‘국민 화가’, ‘민족 화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로 불린다.

또 하나의 자화상
‘황소’

황소, 종이에 유화물감, 35.5×52cm, 1953, 서울미술관 소장

‘소’는 이중섭이 짧은 예술 인생에서 가장 오랫동안 그린 소재입니다. 화면 가득히 자리 잡은 소는 이중섭의 여느 그림과 달리 매우 강한 붓질로 표현한 것이 특징입니다. 또 이상적인 풍경이나 행복한 모습보다는 울부짖거나 싸우고, 혹은 고통을 참으며 걷는 것 같습니다. 이런 소의 모습은 이중섭의 또 다른 자화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1955년 그리고 2013년 서울
전쟁 후, 남으로 내려온 이중섭은 생활고 때문에 부인과 아이들을 친정이 있는 일본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돈을 벌어 가족과 함께 살 날을 꿈꾸며 열심히 그림을 그렸죠. 그러던 중 1955년 1월, 서울 미도파백화점 화랑에서 그동안 그린 작품들을 모아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이전에 평론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은 적도 있고, 밤낮없이 열심히 작업했기에 기대가 컸습니다. 그리고 이 전시에서 한 컬렉터가 쌀가마니를 수레에 싣고 와 이중섭의 그림 3점을 사갔습니다. 전시장을 잠시 비우고 돌아온 이중섭은 자신의 그림이 팔렸다는 소식에 화들짝 놀라 작품을 사간 컬렉터를 찾아갔죠. 그는 팔린 작품 중 가족을 그린 그림이 있는데 그것만은 팔 수 없다며 다른 그림으로 바꾸자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대신 내놓은 것이 바로 ‘황소’였습니다. 이중섭은 이 작품이야말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대표하는 것이고, 훗날 이것이 더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라며 작품을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갈급해 한 말이라지만 그림 앞에서 양심을 중시한 이중섭이 ‘황소’를 두고 자신을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한 것은 그만큼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황소’를 찾는 이가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우연히 본 모사본에 마음을 빼앗겨 진품을 사겠다고 다짐한 서울미술관의 설립자 안병광 회장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는 2013년 한 컬렉터가 ‘황소’를 내놓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가격이 너무 높았죠. 세금을 빼고도 35억 원. 아무리 꿈꾸던 작품이라 해도 안 회장은 그만 포기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길 떠나는 가족’을 컬렉터에게 넘기고 차액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그토록 바라던 ‘황소’를 손에 넣습니다. 이로써 1955년 당시 구입한 작품을 ‘황소’와 맞바꾼 컬렉터도 마침내 처음 산 ‘길 떠나는 가족’을 품에 안게 됩니다. 이중섭은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작품은 58년 후 이렇게 두 사람의 연을 이어주었습니다.

작품 속으로
이중섭은 그림을 그릴 때,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오랫동안 관찰하곤 했습니다. 소 옆에서 하도 뚫어져라 쳐다봐 소도둑으로 오해를 받은 사건도 있었죠. 그는 관찰한 대상의 움직임과 생김새를 자신의 몸과 마음에 새겼습니다. 그러곤 강한 붓질로 그려냈죠. 이를 어떤 이는 ‘몸찰’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이 소가 된 듯 온몸으로 관찰한다는 의미죠. ‘황소’ 역시 그렇게 그린 작품입니다. 고개를 웅크리는 듯하면서 우리를 바라보며 힘차게 한 걸음을 내딛는 모습에서 힘이 느껴집니다. 노란빛 붓질은 간결하지만 강하고 빠르게 그었으리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힘찬 붓질이 만들어낸 근육은 강한 생명력을 나타냅니다. 더불어 무심한 듯 툭툭 찍은 붉고 짧은 선으로 황소의 정열을 표현했죠. 이중섭은 힘든 현실에도 불구하고 예술에 대한 열정을 소 그림을 통해 지속적으로 드러냈습니다. 다시 한 번 그림 속 황소와 눈을 맞추고 찬찬히 그 열정과 에너지를 느껴보세요. 황소에게 스스로를 투영한 화가 이중섭을 떠올리면서 말입니다.
글. 허나영(미술평론가)

은지 위의 실험
‘탄생불’ & ‘낙원의 가족’

탄생불, 은지에 새김, 8.7×15.2cm, 1950년대, 개인 소장

낙원의 가족, 은지에 새김, 유화물감, 8.3×15.4cm, 1950년대, MoMA 소장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는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에는 이중섭의 은지화를 위해 마련한 전시실이 있습니다. 작고 섬세한 은지화 작품을 안전하게 보존하면서도 관람자들이 자세히 감상할 수 있도록 설치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죠. 어두운 전시실에서 은은한 조명을 받고 있는 은지화 작품을 하나씩 천천히 들여다보면, 마치 고대의 유물을 살펴보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은지화’ 혹은 ‘은종이 그림’이라 불리는 이 작품들은 담배를 싸는 속포장지에 흠집을 내고, 거기에 물감을 채우는 기법으로 그렸습니다. 재료를 구하기 어려운 환경에서도 창작 의지를 불태운 가난한 화가의 생활상을 대변해 많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작품이죠. 이중섭은 재료나 기법에 대한 실험정신을 꾸준히 유지했습니다. 평면을 긁어내 안료를 채우는 제작 방식은 상감이나 금속공예의 은입사(銀入絲)와 같은 맥락이라 그가 한국의 전통 기법을 차용했다는 긍정적 평가도 받고 있습니다.

작품 속으로
대부분의 은지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뾰족한 삼각형에 연결된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의 기둥 2개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은종이가 오랜 시간 담뱃갑 안에 접혀 있을 때 생겨난 자국이죠. ‘탄생불’은 두 기둥의 자리에 불상을 그려 넣은 작품으로, 왼편의 복숭아와 오른편의 꽃 아래 접힌 자국을 그림의 일부처럼 이용하고 있습니다. 복숭아 위에 올라선 아기 부처는 바닷가에서 뛰어놀던 화가의 아이들처럼 다소 익살스러운 자세에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네요. 평범한 불화에서는 볼 수 없는 배꼽이나 고추를 태연히 드러내 그의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작품 세계를 다시 한 번 확인시킵니다. 화가는 은지화가 훗날 벽화를 그리기 위한 밑그림이라며, “자택이나 사원 같은 곳의 천장과 벽에 온통 그림을 그리고 싶어. 먹을 것만 준다면 말이야”라는 말도 남겼다고 합니다. 이런 불상으로 가득 찬 사원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참 아름답죠. ‘탄생불’이 비교적 선명한 은색 표면에 단순한 선 위주로 구성한 반면, ‘낙원의 가족’은 누르스름한 종이에 많은 모티브가 혼재합니다. 이 작품은 이번 전시에 나온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소장품 중 하나로, 이중섭이 1955년 1월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을 당시 대구의 미국공보원 원장이던 아서 맥터가트가 구입한 뒤 기증한 것입니다. 지금은 ‘낙원의 가족’, ‘복숭아밭에서 노는 아이들’, ‘신문을 보는 사람들’ 세 작품이 하나의 액자에 들어 있는데, 보존 상태가 양호한 ‘신문을 보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마치 금속판이 부식된 것처럼 누런 표면에 검은 얼룩이 있는 ‘낙원의 가족’은 보면 볼수록 은지화 특유의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소 복잡하고 거친 선으로 표현한 인물, 새, 복숭아, 꽃, 나비 등 화가가 즐겨 그리던 소재도 하나씩 눈에 들어오죠. 감상자의 심경에 따라서는 표면이 깔끔하지 못한 지금의 상태가 그림에 제법 잘 어울리는 세월의 흔적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습니다.

작품의 가치를 넘어선 예술가의 신화
물질적 측면만 본다면 은지화는 너무 작은 크기에 부실한 재료를 사용한 작품으로 시대의 걸작이라기엔 하찮은 외관을 하고 있습니다. 이중섭이라는 예술가의 일생이 결부되지 않았다면 이미 쓰레기통 속으로 사라져버렸을 작은 종이쪼가리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은지화를 보면서 가슴이 뭉클해진다고 말하는 이유는 이처럼 연약하고 초라한 모습과 점점 사라져가는 형상이야말로 이중섭의 인간적 매력에 부합해서일 겁니다. 미술 작품에 엄격한 가치 판단의 기준을 들이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은지화를 지나치게 부풀려 평가하는 게 아닌가 의심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감동하는 것은 작품에 앞서 다가오는 화가의 기구한 사연 때문일까요? 이중섭의 좋은 벗인 시인 구상도 은지화에 대해 “정황을 아는 사람으로서는 예술적 감상보다 눈물이 앞설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좋다, 멋지다라는 평가보다 먼저 눈물을 부르는 예술가의 작품을 두고 우리는 ‘신화’라는 단어를 씁니다.
글. 신혜성(미술평론가)

그리움을 담아
‘바닷가의 아이들’

바닷가의 아이들, 종이에 연필, 유화물감, 32.5×49.8cm, 1952~1953, 금성문화재단 소장

‘이중섭’ 하면 대개 소 그림을 떠올리지만 그가 소만큼이나 즐겨 그린 것이 바로 가족과 아이들입니다. 남한으로 피란 오기 전 원산 시절부터 이중섭은 아이들을 그렸다고 합니다. 특히 제주에서 피란 생활을 한 시기부터 가족과 떨어져 지낸 생애 마지막 시기에 아이들 그림을 많이 그렸죠. 그림 속 아이들은 화가가 그토록 그리워한 두 아들의 모습이면서 보편적인 아동의 이미지입니다. 이중섭의 아이 그림과 고려청자에 나타나는 포도동자문(葡萄童子文)의 연관성이 논의되기도 하는데, 이중섭도 처음에는 자신이 그린 아이들을 ‘동자’라고 불렀답니다. 그의 작품 속 아이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선 단순한 형태로 묘사한 까까머리 남자아이고 벌거숭이라는 거죠. 또 자기 몸 크기의 게, 물고기, 새와 함께 등장하고 하나같이 눈을 감고 있습니다.

작품 속으로
‘바닷가의 아이들’에는 7명의 아이가 크고 작은 물고기 열두 마리와 어우러져 있습니다. 물결로 보이는 곡선이 배경을 메운 가운데 조각배 세 척이 보입니다. 상단에는 수평선이 있군요. 그 위의 느슨한 곡선은 햇살이 번지는 모습이나 구름을 연상시킵니다. 수평선 바로 아래에는 작은 배가 떠 있는데, 배에 탄 두 사람은 아이들의 부모일까요? 그중 한 사람이 이쪽을 향해 손짓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이나 발, 혹은 줄이 달린 막대로 크고 작은 물고기를 잡는 데 열중하고 있네요. 보다 정확히 얘기하면 아이들은 물고기를 잡으려 안간힘을 쓴다기보다 물고기와 어울려 한껏 뛰노는 모습입니다. 중력의 지배를 벗어난 상상의 공간이니 아이들이 물에 빠질 염려도 없겠죠. 이 작품의 가장 큰 조형적 특징은 그림을 가득 채운 선입니다. 강렬한 선, 그중에서도 반복되는 곡선으로 인해 화면은 생명력으로 충만합니다. 선묘적 표현은 이중섭의 작품 전반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의 독특한 제작 방식이 이런 특징을 더욱 두드러지게 합니다. 이 그림은 종이에 엷게 채색한 후 밑그림을 그리고 다시 색을 올린 다음 연필로 힘 있게 눌러 굵은 선을 완성했습니다. 이로써 몇몇 색의 겹침 효과가 돋보이는데, 전체적으로는 청색조이나 인물이 있는 부분에 주황색을 더해 변화와 생동감을 부여합니다.

고난 속에서 그린 이상향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워즈워스의 유명한 시 구절이 있죠. 피카소, 마티스 등 수많은 현대 예술가도 때 묻지 않은 동심과 원시성의 세계를 지향했습니다. 이중섭 역시 그랬습니다. 천진난만한 아이의 맑은 눈으로 본 세계는 너와 나의 구분이 없고 모두가 평화롭죠. ‘바닷가의 아이들’에서도 하늘과 바다, 아이와 물고기는 조화를 이룹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이 동화 같은 그림을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 그렸다는 사실입니다. 아이들의 감은 눈은 현실의 고통을 직시하기보다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 이상향을 꿈꾼 화가의 태도를 반영합니다. ‘한국이 낳은 정직한 화공’을 자처한 이중섭은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의 포부를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세계의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이 최악의 조건에서 생활해온 표현, 올바른 방향의 외침을 보고 싶어 하고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소.” 차디찬 고통을 겪으면서도 따뜻한 그림을 그린 이중섭에게 그림은 현실을 견디는 힘이자 그리움의 표현이었을 겁니다. 지독한 외로움과 궁핍을 이겨내고 아이 같은 순수함을 지키려 한 화가이기에 많은 이들이 그의 그림에서 큰 감동과 위로를 얻는 게 아닐까요.
글. 김보라(미술평론가)

에디터 안미영 (myah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