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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보다 찬란한

ARTNOW

김이환 이영미술관 관장과 신영숙 신영숙컬렉션 관장은 60여 년을 함께한 부부다. 둘은 화가 박생광을 8년간, 전혁림을 21년간 그들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후원했다. 이 노부부는 지금도 여전히 “혈육을 넘어선 두 작가와의 만남이 우리 인생의 빛”이라고 담담히 말한다.

지금 경기도 용인의 이영미술관과 그 바로 옆에 자리한 신영숙컬렉션은 한국 미술계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화가 박생광과 전혁림의 작품 300여 점과 각종 공예품 10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2004년 이곳에선 <박생광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이 열렸고, 지난해엔 전혁림 탄생 100주년 기념전 <백 년의 꿈>을 개최했다. 재벌도 아닌 한 개인이 자신이 좋아하는 예술가를 돕고, 그들을 위한 미술관까지 설립한다는 게 과연 쉬운 일일까? 미술계 변방에 머무른 두 예술가에게 마지막까지 찬란한 예술 세계를 선물한 후원자 부부를 만났다.

이영미술관의 김이환 관장과 신영숙컬렉션의 신영숙 관장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이영미술관

1960대 말에 제작한 전혁림의 도자기 작품 / ⓒ 이영미술관

신영숙 관장의 옛 수집품을 전시하는 신영숙컬렉션 내부

통영 작업실에서 고(故)전혁림 작가 / ⓒ 이영미술관

1970년대 후반부터 동양화가 내고 박생광 선생(1904~1985년) 을 후원했습니다. 그가 세상을 뜨는 순간에도 곁을 지켰죠. 당시 미술과는 큰 연결 고리가 없는 공무원 생활을 하셨는데, 어떤 계기로 한 미술가의 삶에 그렇게 관심을 갖게 되었나요?
김이환(이하 김)/ 1977년 국무총리실 조정관으로 있을 때였어요. 그 전부터 1점, 2점 그림을 사 모으는 취미가 있었는데, 내고의 ‘흑모란’이 좋다는 것과 그분이 진주 사람이라는 얘길 우연히 듣게 됐어요. 그래서 마침 동향인이라 무턱대고 그가 사는 서울 수유리 댁으로 찾아갔지요. 그랬더니 자그마한 몸집의 영감이 딱 한마디 하더군요. “기리(그려)주지.” 그런데 이후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운 영감께서 제게 도와달라고 하셨어요.

‘흑모란’을 청하러 갔다가 엉겁결에 후원자가 되신 거군요?
/ 말하자면 그래요. 3평 남짓한 좁은 방에 온갖 화구를 늘어놓고, 키가 160cm도 안 되는 작은 체구의 화가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칠십 평생 한길을 걸어온 삶에 절로 존경심이 들었죠. 그래서 매주 일요일 아내와 함께 선생의 수유리 작업실을 찾아갔어요. 선생이 필요하다는 물감은 외국에서라도 구해줬고, 그림을 위해 해외여행이 필요하면 동반해서라도 다녀왔고요. 힘닿는 데까지 전시회도 주선해드리고 지인에게 그림도 소개하고 그랬죠.

당시 후원의 대가는 없었나요?
/ 아니요. 처음엔 비용을 대고 대신 그림을 받는 식으로 후원했어요. 근데 그러고 나니 구설이 생기더라고요. 후원을 명목으로 시세차익을 노려 투자한다는 말이 나왔죠. 그래서 1984년 개인전 이후 선생에게서 손을 뗐어요. 당시 화랑에서도 선생에게 슬슬 관심을 갖길래 우리가 더는 돕지 않아도 되겠다 싶었죠. 게다가 선생이 그때 후두암으로 몸이 안 좋으셨어요. 어느 날 그림을 찾길래 그간 맡아 가지고 있던 그림을 전부 돌려드렸죠. 근데 선생 사후에 미술관을 열면서 그 그림을 다시 사들였어요. 대표작 ‘명성황후’는 1990년대 초 당시 압구정 현대아파트 50평짜리 한 채 값을 현금으로 주고 샀죠.

박생광 선생을 후원한 건 관장님 인생의 2막이 열리는 순간이었을 겁니다. 그 기간에 선생은 ‘명성황후’와 ‘무당’, ‘무속’, ‘전봉준’ 등 대표작을 연달아 발표했죠.
/ 선생의 트레이드마크인 울긋불긋한 한국적 색채는 선생이 세상을 뜨기 전 8년간, 저희가 한창 선생을 돕던 시기에 집중돼 있어요. 당시 선생은 오랜 시간 그려온 수묵화에서 벗어나 단청 안료를 쓴 강렬한 색의 그림으로 작품 세계를 넓혀갔죠. 그래서인지 몇몇 신문에 “내고의 예술이 김이환 덕에 꽃을 피웠다”라는 기사도 더러 실렸죠.

그 시절 박생광 선생의 작품에 왜 그렇게 끌리셨나요?
/ 글쎄, 그냥 보니까 좋대요.(웃음) 근데 저도 그 실체가 무엇일까 오랫동안 생각했어요. 그래서 선생이 떠나고 10년 후 환갑 나이에 일본 와세다 대학원에서 동양 미술사를 공부하기 위해 1년 6개월 동안 유학까지 다녀왔죠. 선생이 원래 일본에서 공부한 분이라 어떤 사람에게 배워 그렇게 됐는지, 무엇을 보고 그렇게 됐는지 알고 싶었어요. 사실 그런 게 아니면 (미술가를 그렇게 전폭적으로 후원하는 일이) 저도 설명이 안 돼요. 뭔가를 계획하고 한 일은 아니지만, 살다 보니 운명이 그렇게 이끌더라고요. 사람이 그렇게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에 우리 부부 역시 많이 놀랐죠.

1985년 박생광 선생이 타계한 후에도 ‘후원자의 삶’은 계속됐습니다. 통영 출신인 전혁림 선생(1915~2010년)의 후원이었죠. 이 후원은 어떻게 이루어진 건가요?
신영숙(이하 신)/ 박생광 선생을 후원하다 자연스레 연결됐어요. 1992년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열린 전혁림 선생의 전시를 보러 갔는데, 선생이 먼저 알은체를 하며 말을 거셨죠. 그렇게 맺은 인연이 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여 년간 이어졌어요. 박생광 선생을 돕던 시절 매주 수유리에 간 것처럼, 그 당시엔 일주일에 한두 번씩 통영 작업실에 내려갔죠. 집안일로 두어 번 못 내려갔을 때 (전혁림 선생이) 얼마나 섭섭해하시던지, 그 뒤로는 차마 못 간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김이환·신영숙 부부가 처음으로 구입한 전혁림 작가의 ‘한려수도’ / ⓒ 이영미술관

박생광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명성황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비통함을 표현했다. / ⓒ 이영미술관

이영미술관에 전시한 전혁림 작가의 ‘한국의 문’. 그의 대표적 목기 회화 작품 중 하나다.

좋아서 한 일이겠지만, 즐겁기만 한 건 아닐 것 같아요. 예술가를 돕는 일에 금액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대가가 따르는 것도 아닐 테니까요.
/ 맞아요. 몇 번이나 그만두고 싶었고. 그럼에도 쉽게 그만둘 수 없었던 건 노화가가 붓을 놓는 게 안타까워서였어요. 우리 부부가 통영에서 떠날 채비를 하면 선생은 꼭 “언제 오요?”라고 물으셨어요. 우리가 찾아가지 않으면 그림을 그리지도 않았죠. 그래서 통영에 내려갈 때마다 은행에 들러 새 돈을 찾아 드렸어요. 돈을 드리면 그걸 침대 밑에 숨겨두고는 손자들 등록금, 자식 생활비 대줄 생각에 신바람이 나서 다시 그림을 그리셨고.

얼핏 듣기에 두 분이 하신 일은 화랑이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 화랑은 화가에게 잘 팔리는 그림을 그리게 하죠. 그런데 후원자는 달라요. 화가가 원하는 작품 세계를 구현할 수 있게 도와주죠.

전혁림 선생은 민화에 깃든 한국의 색과 질감을 캔버스에 풀어놓는 작업으로 알려졌습니다. 특히 추상적 문양이 인상적인 ‘바다와 새’, ‘아침’, ‘현무도’, 2005년 이영미술관을 찾은 노무현 대통령이 반해 주문했다는 ‘통영항’ 시리즈 등이 유명하죠. 한데 그런 선생이 말년에 소나무 목기 1050점에 일일이 유화물감으로 만다라(우주의 진리를 표현한 불화 중 하나)를 그려 넣어 만든 대작 ‘새 만다라’(2005년)를 발표한 건 독특한 일입니다. 혹시 두 관장님의 영향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두 분이 통영에 내려가 선생에게 목기에 그림을 그려달라고 청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것과 관련 있는 일인가요?
/ 아마 그때가 2000년대 초반이었을 거예요. 전 한창 소반과 함지박, 궤 등 생활 가구를 수집하고 있었고, 선생의 강렬한 오방색 그림을 목가구에 표현하면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선생에게 목기에 그림을 그려달라고 청했는데 반응이 매몰찼어요. 한데 어느 날 미안함을 느꼈는지 “그 목기 좀 다시 가져와라”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새 만다라’입니다. 2005년 이영미술관에서 열린 선생의 <구십, 아직은 젊다>전 오프닝에서 작품의 초기 버전을 본 선생이 딱 한마디 하신 게 기억나요. “이게 정말 내가 그린 거요?”

이영미술관은 오래전 돼지 축사를 개조해 오픈한 미술관으로도 유명합니다. 1979년 공무원을 정년퇴직한 후 몇몇 대기업(효성, LG) 계열사에서 임원을 거친 김이환 관장님이 노년을 대비해 양돈 사업을 했고, 주변 환경의 변화로 좋지 않은 상황이 되자 미술관으로 변신시켰죠. 미술관은 어떻게 열게 된 건가요?
/ 1979년부터 1994년까지 이곳에서 돼지 3000마리를 키웠습니다. 어릴 때부터 전 어머니가 돼지 치는 걸 봐왔고, 농업학교까지 나온 터라 양돈이 전혀 낯설지 않았죠. 그리고 만약 제가 양돈 사업을 하지 않았다면 두 선생을 돕는 건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분들의 후원금은 전부 돼지 친 돈으로 충당한 셈이니까요. 하지만 미술관을 여는 건 사실 쉽지 않았어요. 1991년 사립 미술관 승인을 받았는데, 건물을 지은 건 그 후 10년이 지나서였죠. 승인 후에도 할까 말까 오래 고민했어요.(웃음)

그럼에도 미술관을 연 이유는요?
/ 제가 전생에 두 선생에게 빚을 많이 져서 그 빚을 갚는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사실 우리가 당시 갖고 있던 수많은 그림의 ‘처치 곤란’ 문제도 있긴 했어요. 두 분이 자꾸 그림을 주셨는데 그걸 어떻게 합니까?(웃음)

두 관장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책도 펴냈습니다. 김이환 관장님이 2004년에 박생광 작가의 삶과 예술 세계를 다룬 <수유리 가는 길>을 냈고, 신영숙 관장님은 2012년 전혁림 작가의 작품 활동을 도운 20년 세월을 기록한 <통영 다녀오는 길>을 펴냈죠. 책 소개 좀 해주세요.
/ 수유리는 박생광 선생이 타계할 때까지 머무른 서울 강북의 한 동네고, 통영은 전혁림 선생의 고향이자 말년 작업실이 있던 남녘 항구도시죠. 책은 운명처럼 저희에게 다가온 두 화가와 함께 호흡하며 나란히 걸어온 여정을 담기 위해 쓴 거예요. 특히 <수유리 가는 길>은 박생광 탄생 100주년(2004년)에 펴낸 거라 더 의미가 있어요. 제가 책에 쓴 마지막 문장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미술관에 관람객이 끊어진 시간 나는 종종 내고 전시실에 홀로 들어간다. 내고의 이 작품 저 작품을 눈으로 한 번씩 쓸고, 맨 나중에 ‘명성황후’ 앞에 가 조용히 마주 선다. 내고는 어김없이 거기 있어 나를 반긴다. 그것이면 나는 되었다.”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나요?
/ 그런 건 따로 없어요. 그냥 지금처럼 하는 데까지 해보는 거죠.

1981년 서울 삼각산 도선사에서 김이환·신영숙 부부와 박생광 작가 / ⓒ 이영미술관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