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k It Place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관이 부지기수지만 그 의미를 따라올 수 없는 곳이 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작가를 한평생 후원한 페이트런이 설립한 미술관이다.
미술관 야외에 설치한 프랑스 조각가 다미앙 카반(Damien Cabanes)의 작품 ‘Sagesse’
마그 재단 현대미술관의 외관 건축
Maeght Foundation Modern Art Museum
샤갈, 마네, 르누아르, 마티스, 피카소, 모딜리아니를 아우르는 한 단어가 있다. 이 당대의 화가들이 머물러 쉬며 위로를 얻은 마을, 생폴드방스(Saint-Paul de Vence)다. 지중해의 따뜻한 햇볕과 바람을 품은 생폴드방스엔 ‘예술 여행자’들이 버킷 리스트 상단에 이름을 올리는 꿈의 공간이 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미술 재단, 마그 재단이 운영하는 ‘마그 재단 현대미술관’이다.
마그 재단 현대미술관의 컬렉션은 유럽 국영 미술관의 컬렉션 수준을 능가한다. 마르크 샤갈, 앙리 마티스 같은 현대미술 거장의 작품을 1만2000점 이상 보유하고 있다. 1964년 예술품 수집가이자 재단 설립자 에메 마그와 마그리트 마그 부부, 전 프랑스 문화부 장관 앙드레 말로의 주도로 문을 열었다. 이후 오늘날까지 주 정부의 도움 없이 독립적으로 미술관을 운영해오고 있다.
마그 재단이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작품 수집과 후원의 방향은 신진 예술가의 발굴이다. 재능은 있지만 기회가 적은 신진 작가들과 함께 현대미술의 최전선에서 미술계를 이끌어왔다. 마그 재단 현대미술관이 거장 마르크 샤갈과 앙리 마티스의 희귀 컬렉션을 다수 소장한 것도 두 작가의 활동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후원해왔기 때문. 마그 재단이 자랑하는 최대 컬렉션의 작가, 호안 미로와 알베르토 자코메티도 마그가와 예술가와 후원자의 관계를 넘어 가족 이상의 친분을 이어온 것으로 유명하다. 그 밖에 바실리 칸딘스키, 마르셀 뒤샹의 컬렉션도 소장, 전시 중이다. 다음 세기의 현대미술 거장이 궁금하다면 오늘날 마그 재단이 주목하는 신인 작가들의 전시를 주시할 것.
미술관의 실내 전시 전경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의 감각적인 카페테리아
미술관의 실내 전시 전경
Louisiana Museum of Modern Art
덴마크의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은 예술품에 버금가는 건축미로 이름 높다. 설립자 크누드 W. 옌센은 1958년 덴마크 출신 장교 알렉산더 브룬의 저택을 사들여 오늘의 미술관으로 단장했다. 건축가 빌헬름 볼레르트와 예르겐 보는 외레순(Øresund) 해안이 한눈에 담기는 저택과 정원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공간을 증축했다. 본관과 신관은 북유럽의 청명한 빛을 담는 유리 복도로 연결된다. 미술관의 전형적 형태, 바깥과 단절된 화이트 큐브와 달리 초원과 바다, 숲에서 경계 없이 예술을 감상할 수 있다. 알렉산더 콜더의 모빌, 호안 미로의 조각 사이에서 피크닉을 즐기다 언덕 아래 해변으로 수영하러 달려가는 코펜하겐 로컬들의 주말이 이곳을 배경으로 한다.
3500점이 훌쩍 넘는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의 컬렉션은 당대의 사조를 대표하는 유럽 예술가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완성됐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덴마크의 대표적 예술가 로베르트 야콥센, 리샤르드 모르텐센 같은 구성주의 화가는 ‘덴마크 현대미술 아지트’를 짓고자 한 크누드 W. 옌센의 뜻에 힘을 보탠다. 1950년대에 코펜하겐, 브뤼셀, 암스테르담의 아방가르드 아티스트들이 결성한 코브라(CoBrA) 그룹, 1960년대 누보레알리즘 운동의 대표적 화가 아르망과 이브 클랭 등도 궤를 함께했다. 대중에게 친숙한 앤디 워홀, 릭턴스타인, 라우션버그 컬렉션을 비롯해 21세기 현대미술의 최전선, 요나탄 메제, 볼프강 틸만스, 올라프 브로이닝 등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독일 표현주의 작가 막스 베크만(Max Beckmann)의 작품

힐티 아트 파운데이션과 쿤스트무제움 리히텐슈타인의 건물 외관
The Hilti Art Foundation
대부분의 사람이 오스트리아의 소도시쯤으로 착각하는 작은 나라, 리히텐슈타인에 ‘유럽의 아름다운 미술관’ 목록에 새롭게 이름을 올린 곳이 있다. 2015년, 수도 파두츠에 들어선 ‘힐티 아트 파운데이션’이다.
바젤을 베이스로 활동하는 건축가 듀오 모르제와 데겔로는 힐티 아트 파운데이션과 함께 과거의 풍경을 품은 올드 시티의 풍경을 현대적 장면으로 전환시킨 획기적인 건축물 ‘화이트 큐브’를 선보였다.
재단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온 갤러리답게 힐티 아트 파운데이션은 설립자 우베 비크초레크(Uwe Wieczorek)의 컬렉션을 기반으로 한 소장품을 선보이고 있다. 130년 전의 고전, 현대 명작부터 현대 아트 신의 최신 트렌드를 아우르는 아카이브를 목표로 한다. 건축가 모르제와 데겔로는 공간을 명료하게 구분 짓고 힐티 아트 파운데이션의 시대별 컬렉션을 효율적으로 전시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현재 열리고 있는 개관전 <회화와 조각-클래식 모더니즘에서 현대까지(Painting and Sculpture-From Classical Modernism to the Modern Day)>는 힐티 아트 파운데이션의 화려한 소장 리스트를 망라한 전시다. 고갱, 조르주 쇠라, 피카소, 마그리트, 자코메티부터 요제프 알버스, 이미 크뇌벨까지 근·현대미술사를 대표하는 거장들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전시관 1층에서 3층으로 오르는 동안 관람객은 표현주의, 입체파, 초현실주의, 추상주의 등 현대미술 사조의 흐름을 서사 순으로 감상할 수 있다. 전시는 10월 9일까지 계속된다.
디이히토르할렌 미술관의 외관과 전시 풍경. 과거 기차 역사로 사용되던 곳이다.
디이히토르할렌 미술관의 외관과 전시 풍경. 과거 기차 역사로 사용되던 곳이다.
압둘라예 코나테(Abdoulaye Konate)의 작품 ‘Coffee Beans-Container’
Deichtorhallen Hamburg
함부르크의 다이히토르할렌 미술관은 컨템퍼러리 아트와 포토그래피 분야에서 유럽 최대 규모의 컬렉션을 자랑하는 미술관이다. 전신은 ‘베를리너 반호프 기차역’으로, 거대한 2개의 홀로 구성된 공간이 압도적이다. 19세기 아르누보 스타일과 강철, 유리 소재를 사용한 20세기 인더스트리얼 아키텍처 스타일이 혼재된 독특한 건축미는 도시에 첫발을 들인 여행자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미술관 쿤스트밀레, 함부르크의 도시 재생 사업으로 탄생한 하펜시티(HafenCity)와 함께 도시의 랜드마크로 꼽히는 장소다.
다이히토르할렌을 기차역에서 미술관으로 변화시킨 주체는 쾨르버 재단(Korber-Stiftung)이다. 설립자 쿠르트 A. 쾨르버는 독일을 비롯해 유럽의 미술, 음악, 영화, 문학 등 전 예술 분야에 걸쳐 많은 사업과 아티스트를 후원해왔다. 다이히토르할렌 미술관은 ‘유러피언 포토 엑시비션 어워드’, ‘인터내셔널 오페라 스튜디오’ 등과 함께 재단이 주력하는 주요 문화 프로젝트 중 하나다. 다이히토르할렌의 실질적 컬렉션은 쾨르버 재단과 함께 활동하는 개별 후원자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으로 채워진다. 사회사업가, 예술가, 교육자 등 직업과 취향이 다양하고 나름의 컬렉션을 보유한 후원자들이 전시 기획의 주체가 되고 있다.
팔켄베르크 컬렉션(The Collection Falkenberg) 전시는 다이히토르할렌의 주목할 만한 소장전이다. 변호사이자 사업가인 하랄트 팔켄베르크가 미술관에 기증한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로, 2008년부터 꾸준히 컨템퍼러리 아트와 멀티미디어 아트 분야에서 아카이브를 쌓아왔다. 올해는 세계적 일러스트레이터 레이먼드 페티본의 개인전을 선보인다. 사진 예술계에서 독보적 위상을 자랑하는 독일답게 ‘포토그래피 컬렉션’ 수준도 높다. 미술관 남쪽 홀, ‘하우스 오브 포토그래피’에선 독일 최고의 패션 사진가이자 현대사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손꼽히는 F. C. 군틀라흐(F. C. Gundlach)의 컬렉션을 만날 수 있다. F. C. 군틀라흐는 다이히토르할렌의 사진전을 총괄하는 아트 디렉터로 활동하며 자신의 작품을 미술관에 기증해왔다. 쾨르버 재단과 페이트런 커뮤니티의 적극적인 공조로 다이히토르할렌은 현대사진과 컨템퍼러리 아트 분야의 다양한 예술가를 포용하는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루카 비토네(Luca Vitone)의 ‘Natura morta con paesaggi e strumenti musicali’
미술관에서 운영하는 키즈 프로그램
이탈리아 출신 작가 디에고 페로네(Diego Perrone)의 작품 ‘Una mucca senza faccia rotola nel cuore’
Fondazione Brodbeck
이탈리아 남부 휴양지, 시칠리아의 항구도시 카타니아는 기원전 8세기 그리스인이 세운 고대도시다.
십 수세기에 걸쳐 200회가량 폭발한 에트나 화산의 활발한 지각변동 탓에 온전한 건축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도시 곳곳에 여전히 2~3세기 로마부터 중세 바로크 시대까지 풍경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이 고도시에 들어선 폰다치오네 브로드베크 미술관은 카타니아에 몇 안 되는 현대적 장면 중 하나. 폰다치오네 브로드베크의 설립자는 사업가이자 교육자인 파올로 브로드베크다. 그는 카타니아의 산업 단지에 버려진 공장 창고를 개조해 오늘의 미술관으로 재탄생시켰다.
폰다치오네 브로드베크는 주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작가의 작품을 수집하고 그들의 활동을 후원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유럽 작가의 작품 세계를 깊이 있게 탐구할 수 있는 ‘개인전’을 후원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현대미술에 대한 파올로의 진지한 관심과 열정은 그가 한 인터뷰에서 밝힌 “아티스트의 솔로 전시회를 후원하면서 그들과 세계를 확장하고 연결시키는 일이야말로 나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자 카타르시스다”라는 말에 잘 드러나 있다. 주로 아트 딜러와 함께 수집 활동을 하는 대부분의 컬렉터와 달리 파올로 브로드베크는 모험적이고 신선한 전시를 기획하는 갤러리, 큐레이터와의 활발한 협업으로 컬렉션을 확장 중이다.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한 파키스탄 출신의 시엘 플로이어, 텍스트를 소재로 개념미술을 선보이는 로런스 위너, ‘One-Minute Sculpture’ 시리즈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출신 설치미술 작가 에르빈 부름 등이 폰다치오네 브로드베크의 수혜를 받은 아티스트다.
조지 이코노무 컬렉션 건물의 외관

그리스 아테네에 위치한 조지 이코노무 컬렉션의 전시 전경. 20세기 초반부터 현재까지 독일 표현주의에 기반을 둔 작품을 주로 수집한다.
The George Economou Collection
그리스 아테네에 위치한 조지 이코노무 컬렉션은 세계적 아트 페이트런 조지 이코노무의 열정적인 수집 역사와 아카이브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아테네 출신 사업가이자 억만장자 조지 이코노무는 그의 예술적 동반자인 아트 딜러 디미트리와 함께 이틀에 한 작품꼴로 예술품을 사들이는 수집가로 이름 높다. 미술관 조지 이코노무 컬렉션의 매력은 설립자가 공격적으로 수집하는 작품의 업데이트가 활발히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조지 이코노무 컬렉션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20세기 초까지 유럽 미술을 중심으로 아카이빙해왔다. 그는 특히 20세기 초반부터 오늘날까지 독일 표현주의에 기반을 둔 작품을 심도 있게 수집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참혹한 현실을 고발해 나치에 전 작품을 압수당한 독일 화가 오토 딕스, 집시와 원시적 서정성을 주제로 독자적 세계를 구축한 판화가 오토 뮐러의 전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그 밖에도 안젤름 키퍼, 게오르크 바젤리츠,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등 독일 근·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하며 후원한다. 조지 이코노무의 컬렉션은 뉴욕, 시카고의 유수한 갤러리에서 활동한 아트 디렉터 스칼릿 스메타나의 진두지휘로 펼쳐진다. 올해는 머리카락, 코끼리의 변, 닭의 깃털 같은 소재로 사회문제를 위트 있게 비트는 작품으로 유명한 뉴욕 할렘 출신의 행위·설치미술가 데이비드 해먼즈의 첫 그리스 개인전을 주목할 만하다. 6월 13일부터 9월 30일까지.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글 류진(프리랜서) 사진 제공 마그 재단 현대미술관,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 힐티 아트 파운데이션, 다이히토르할렌 미술관, 폰다치오네 브로드베크 미술관, 조지 이코노무 컬렉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