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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성 세계관

ARTNOW

일상 속 녹색 바람이 거세다. 도시에서 자연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조화와 균형을 찾는 가운데, 식물과 인간의 관계를 통해 생성보다 ‘깊은 소멸’의 의미를 환기하는 예술 작업이 눈에 띈다.

지속 가능한 형태를 유지하는 식물 작품을 선보이는 박기철의 가드닝 스튜디오

몬스테라 줄기의 곡선을 강조하고 진달래 가지를 걸쳐 균형을 잡은 박기철의 2015년 작품, ‘몬스테라-진달래 혼합’

공간을 드로잉하는 가드닝
프랑스 화가 앙리 마티스는 덩굴성 관엽식물인 몬스테라를 친애했다. 그의 작품 속에도 사사로이 등장하는 몬스테라와 같은, 자신만의 ‘식물 콘텐츠’가 있는가? 올해 세계적 메가트렌드 중 하나는 ‘가드닝’이다. 자연을 갈구하나 도시와 완전히 이별할 수 없는 현대인은 식물과의 동거로 균형을 찾는다. 취향에 따라 자기만의 식물 콘텐츠를 만들기가 본격화된 시점에 원예가 박기철의 작업이 눈에 띈다. 그는 운니동에 ‘식물의 취향’이라는 가드닝 스튜디오를 마련했다. 원예가가 아니라도 야생 초목을 관리하기 쉽도록 여러 가지 기능적인 방법으로 보완했고, 분재 기법을 활용하는 방법도 차별화했다. “관엽식물, 야생 초목, 다육식물, 선인장 등 모든 식물을 다루지만 특히 야생 초목류가 본디 가진 자연스러운 형태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해요. 야생 초목은 물 관리를 자주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는데, 그것을 기능성 화기로 보완하죠. 또 뿌리를 내리고 형태를 유지하는 과정을 살피면서 식물의 적응력을 높이는 작업을 먼저 해줍니다. 식물에게 과도한 물과 빛은 해로워요. 가급적 힘을 빼고 무심하게, 하지만 관심을 줄 때는 온기를 담은 애정을 쏟는 태도가 중요해요.” 사람 사는 이치도 이와 같지 않을까?
박기철은 개인 공간부터 기업, 브랜드, 백화점 등에 다양한 가드닝 컨설팅을 해주는 게 주요 업무지만 그가 좀 더 중점을 두는 일은 식물 본연의 아름다움을 집중도 있게 드러내는 작업이다. 꽃꽂이로 자신을 표현하는 정신성을 중시하는 일본 꽃꽂이 ‘이케바나’, 나무를 바라볼 때 대자연이 그려내는 풍경을 연상하고 그 정서를 느끼는 한국의 분재처럼 ‘철학’에 닿아 있는 작업 같다. “어떤 식물을 공간에 들임으로써 그곳에 상주하는 이들의 기운에 영향을 주도록 연출하거나 잎이 큰 식물과 줄기가 가느다란 식물을 함께 놓아 음양의 조화를 맞추기도 하죠. 또 야생 초목류는 꽃이 오래 피지 않으니 한 꽃이 질 즈음 다른 하나가 피는 식으로, 식물이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즐거움을 누리도록 연출하기도 해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여러 가지가 섞였을 때 조화와 균형을 맞추는 깊이죠.” 그는 식물이 마르거나 썩더라도 아름답게 보이도록 애초에 식물을 ‘사물화’하는 작업도 한다. 처음의 그 형태를 오래 두고 볼 수 있도록 오브제로 만든다. 식물이 죽을 경우까지 고려한 작업이다.

씨앗과 싹을 매개로 생성, 성장, 소멸을 사유하는 김주연의 ‘Metamorphosis VII’, 2013년 작품

약 2만 장의 신문, 씨앗, 비계 구조물로 완성한 ‘Metamorphosis III’

싹을 틔우는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한 김주연의 새로운 작업, ‘존재의 가벼움 I’

김주연의 사진 작품 ‘존재의 가벼움 VI’

자연의 질서와 조응하는 예술
식물의 ‘소멸’ 이후에도 ‘과정’은 지속 가능하다. 김주연의 작업은 인간에게 언젠가 도래할 수밖에 없는 명제인 소멸의 의미를 환기시킨다. ‘Metamorphosis’ 시리즈는 한 장 한 장 신문을 쌓아 구조물을 만들고 전시 공간에서 물을 뿌려 10여 종의 씨앗을 발아시킨 후 소멸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업. “굉장히 더디지만 그 시간이 곧 작업 과정이에요. 제가 서두를 수도, 인위적으로 개입할 수도 없어요. 그 가운데서 리듬을 찾는 데 집중할 뿐이죠.”
그녀는 1990년대 초반부터 자연 재료로 실험적인 작업을 해왔다. 1996년 베를린 국립예술대학교 순수조형예술대학에서 유학하며 우연히 만난 프랭크 바두어 교수가 던진 ‘동양철학’에 대한 질문이 작업의 시초가 됐다. “교수님은 동양철학에 박식하고 그것에 바탕을 둔 미니멀한 작업을 하는 작가였어요. 교수님을 만난 뒤 동양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서 제 작업이 시간 속에 자연스럽게 소멸해가는 과정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죠.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다른 존재로 성장한다는 ‘이숙(異熟)’이라는 단어를 발견했고요. 그런데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고 느꼈어요. 그때부터 요가, 기공, 단전호흡 같은 것에 몰두하며 채식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마당 귀퉁이에 채소를 심어 길렀고, 그 과정에서 이것을 작업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녀의 생태 작업은 드레스와 침대 등에 식물을 옮겨 심은 ‘이숙’ 시리즈, 일상의 옷에 씨앗을 틔운 ‘존재의 가벼움’ 시리즈에서 볼 수 있듯 전시가 끝나는 동시에 작업도 끝난다. 작업의 특성상 추운 겨울에는 씨앗이 자라기 어렵고 여름에는 벌레가 꼬일 수 있으며 너무 습할 때는 썩을 수 있어 쾌적한 계절에만 가능하다. 그럼에도 작가는 ‘자연의 이치’를 따른다. 영은미술관에서 선보인 ‘버려진 은행나무’를 작업해본 경험 때문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미술관 주변을 산책했는데, 영안천에 버려진 나무 중 1년이 지난 후에도 유일하게 살아 있는 은행나무를 발견했어요. 그것을 그대로 미술관으로 옮겨 설치 작업을 했죠. 한 달여의 전시 기간 동안 뿌리에 붙어 있는 흙에서 1m 이상 잡초가 자랐고, 물만 준 은행나무가 그 상태로 버텨내더군요. 그 모습에서 강한 생명력을 느꼈어요.”
최근 삼청동 트렁크갤러리에서 그녀의 개인전 <‘싹’ 그리고 ‘정물화’: 살아 있는 것의 소고>가 열렸다. 일상의 오브제인 ‘옷’에 싹을 틔운 작품을 사진으로 다시 옮긴 작업이다. “제 작품은 결국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항상 비디오 다큐멘터리나 사진으로 기록해왔어요. 독일 유학 시절부터 집에 암실을 두고 사진 작업을 했는데, 본격적으로 사진에 집중하게 된 건 작년 일본 브로큰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준비하면서였어요. 씨앗을 다른 나라로 옮기는 게 쉽지 않아 어떻게 하면 작품을 손쉽게 이동해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 찾은 방법이죠. ‘존재의 가벼움’ 시리즈는 옷에 무, 배추, 알파파 등 10여 종의 씨앗을 사용했는데, 자세히 보면 힘 있게 싹이 올라온 자락도 있고 여린 부분도 있어요. 모두 발아하는 타이밍도 다르죠. 저는 씨앗을 심을 때 그림을 그리는 느낌이 들어요. 눈에 잘 안 보이지만 대단히 섬세한 작업이에요.” 작가는 매일 그날의 날씨를 살피며 타이밍을 기다려 인공조명이 아닌 자연광만으로 사진을 찍는다. 어떻게 보면 그 ‘예민한 나날’이 감각적인 삶이라고 말한다. 환경과 소통하기 위해 예민하게 반응하는, 깨어 있는 삶 말이다.

에디터 안미영 (myahn@noblesse.com)
장남미(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