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롭지 않아도 돼
뿌리지 않아도 존재 가치가 충분한 향수.
왼쪽부터_ 리필이 가능한 향수로 참 액세서리로 활용할 수 있는 Hermes 골드 락 케이스, 하드 클러치로 사용 가능한 패키지가 특징인 By Kilian 블레부 꾸셰 아베크 무아, 사과 모양 향초는 D.L.&Co.
세상의 모든 취향 중 ‘향’만큼 개인적이고 침범하기 어려운 구역이 있을까. 뿌리는 것으로 모자라 태우고, 바르고, 불고, 그냥 한자리에 놓아두는 등 향을 즐기는 방법에 대한 선택의 폭이 끝없이 넓어지는 이유일 것이다. 요즘은 리빙 오브제 역할을 하는 향초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실제로 태울 때를 고려해 천연 성분으로 만든 수제 향초의 뒤를 이어 태우지 않더라도 소장하고 싶은 역설적인 향초의 시대가 온 것. 형체가 망가지는 걸 허락할 수 없는 향초는 씨흐 트루동의 버스트 캔들이 대표적이다. 이 향초는 씨흐 트루동이 국가 소유 미술품을 활용해 나폴레옹, 마리 앙투아네트, 벤저민 프랭클린 같은 역사적 인물을 그대로 본뜬 제품. 씨흐 트루동은 프랑스 입헌군주국 최후의 날까지 베르사유 궁전에 향초를 납품한, 프랑스의 유산과도 같은 브랜드이기에 국가에서 특별히 제작을 허가했다고 한다. 향초보다는 작품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이 향초에 서슴없이 불을 붙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최근의 향 제품은 이처럼 고상한 소품 역할을 하는 한편, 어린아이의 장난감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메종 프란시스 커정의 ‘솝 버블’이 그 예. 가벼운 플라스틱 용기에 담은 이 제품의 사용법은 아이들의 비눗방울 놀이와 다를 게 없다. 조향사 프란시스 커정은 (엄마가 향수를 뿌려주는 게 아니라) 아이가 주체적으로 향기로운 추억을 만들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향수를 제조했고, 브랜드의 다른 제품에 비해 파격가에 내놓았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향수, 그가 아이들을 위해 만든 이 비눗방울이 아닐까 싶다.
패션 액세서리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는데, 그저 고급 소지품 개념을 넘어 환경보호에 기여하는 향수도 있다. 지난해 LVMH 창립자의 손자이자 향수 브랜드 바이 킬리안(By Kilian)의 수장인 킬리안 헤네시(Kilian Hennessy)와의 인터뷰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완벽한 최고급 향수를 만들고 싶었다는 그의 말처럼, 바이 킬리안 향수는 멋들어진 음각 패턴과 뱀 장식이 어우러진 패키지가 공들여 제작한 명품임을 입증했다. 한데 그는 뜻밖에도 자신의 브랜드가 에코-럭셔리(eco-luxury)를 표방한다고 말했다.
탐욕스럽게 날름거리는 혀, 맹독을 연상시키는 뱀을 장식하고서 에코 컨셉이 웬 말? 이 괴리감은 그의 진지한 대답을 듣고 해소됐다. “진정한 명품은 버리지 않고 대물림한다. 세월이 흘러도 간직하고 싶은 향수를 만들고 싶었다. 아내가 나의 블랙 향수 상자를 백 대신 들고 나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힌트를 얻어 향수를 여심을 뒤흔들 정도로 치명적인 백처럼 만들자고 생각했다. 그런 향수는 리필 사용을 유도하고, 나아가 뷰티업계의 과도한 쓰레기 배출량을 줄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바이 킬리안 향수는 지적이고 패셔너블한 파리 여성에게 ‘진정성 있고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옷’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 에스티 로더 컴퍼니즈는 하이엔드에 대한 바이 킬리안의 철학이 자신의 가문과 어울린다고 판단해 브랜드 인수를 결정하기도 했다.
향을 분산시키는 본연의 역할을 넘어 독특한 분야로 진출한 이 제품들에 관심이 없다고 해서 취향이 세련되지 않다고 볼 수는 없다. 이런 향 제품은 하나의 시그너처 향수를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쓰는 프렌치식 향수 사용법과도 거리가 머니까. 다만 어느 집 현관에 뻔한 룸 스프레이 대신 향기 비눗방울이나 향기를 풍기는 성냥이 놓여 있다고 생각해보라. 낭만적이지 않은가? 때와 장소에 맞게 향기를 가지고 놀 줄 아는 사람, 그로 인해 주변에 향기롭고 행복한 순간을 선물하는 사람이란!
왼쪽부터_ Buly 1803레 알루메 퍼푸메, 서랍처럼 좁은 공간에 두면 옷이나 소지품에 은은한 향이 배는 성냥. 프랑스 국가 소유의 나폴레옹 석고상을 그대로 본떠 만든 Cire Trudon 나폴레옹 버스트 캔들
상큼한 민트, 허브 향기로 둘러싸여 비눗방울 놀이를 즐길 수 있는 Maison Francis Kurkdjian 솝 버블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_ 티포트 모양의 캔들 Chapter1, 오페라극장에서 영감을 받은 Astier de Villatte 인센스 오페라는 10 Corso Como에서 구입 가능. 황홀한 장미 향기를 느낄 수 있는 Santa Maria Novella 로즈티. 티 스테이너와 호박석이 향기를 머금어 오랜 시간 발향하는 Mad et Len 포푸리 어포티캐리 릴리 네롤리는 모두 Chapter1에서, 티백 모양의 Kerzon 행잉 센티드 폼은 10 Corso Como에서 구입할 수 있다.
위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_ 검은 해골 모양 초는 Chapter1, 공간을 평화로운 라벤더와 타임 향기로 채우는 Fornasetti 센티드 룸 스프레이 R.I.P는 10 Corso Como에서 구입 가능. 포르투갈 도예 장인이 만든 마노 무늬의 캔들홀더는 Diptyque 포토포어 페이사쥬. 방아쇠를 당기면 향기를 즉각 분사하는 Editions de Parfums Frederic Malle 퍼퓸 건 쥬라식 플라워
에디터 성보람(프리랜서)
사진 박지홍 스타일링 차샛별 일러스트 김참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