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나는 캔버스
알리고 싶은 제품이나 특별한 메시지, 더 나아가 예술적 가치를 퍼뜨리기 위해 비행기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 대해.
뉴욕의 거리 예술가 레트나가 그림을 그린 비스타젯의 글로벌 익스프레스 XRS
지난 3월 말, 삼성전자 갤럭시 S7 엣지와 갤럭시 S7이 글로벌 런칭했다. 히트 예감 제품이 출시되면 세계 곳곳에서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많은 이들이 아침부터 스토어 앞에 줄을 서는 장면이 연출되는데, 이번에는 멕시코에서 좀 더 진풍경이 펼쳐졌다. 멕시코시티의 베니토 후아레스 국제공항에 갤럭시 S7 엣지와 갤럭시 S7으로 래핑한 에어로멕시코 비행기가 등장한 것. 제품 출시를 기념해 특별한 옷을 입은 비행기는 주인공인 갤럭시 제품 못지않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화제가 되었다.
래핑(wrapping)은 건물의 벽면이나 기둥, 버스, 지하철 등을 특정 그림으로 감싸는 것을 말한다. 즉 형체를 바꾸지 않으면서 색다르게 연출하는 하나의 묘책이다. 튜닝과 일맥상통하는 자동차 래핑은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케이스. 최근 독일의 튜너 M&D 익스클루시브 카디자인이 메르세데스-벤츠 CLS500을 위한 커스텀 튜닝 패키지를 선보였다. 차체에 화이트 & 블랙 컬러를 씌우고 밝은 오렌지 컬러로 악센트를 주었는데 그 덕분에 날렵한 쿠페형 CLS가 전투기를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변신했다. 이외에도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서울 시내 고층 빌딩에 태극기를 두른 건물 래핑, 신문 1면을 광고로 장악한 구찌의 신문 광고 래핑까지, 다양한 규모와 기발한 형식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래핑의 목적은 단 하나, 많은 이들의 눈길을 끌고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것. 그런 의미에서 하늘을 날며 전 세계를 도는 비행기는 가장 강력하고 거대한 스케일의 래핑 수단이다.
스타워즈의 인공지능 로봇 BB-8의 모습을 새긴 전일본공수(ANA)의 보잉 787-9
비행기 래핑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몸체에 특별한 이미지를 그린 비행기가 승객에게 친근감을 줄 뿐 아니라 여행의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는 점 때문에 많은 항공사에서 래핑을 시도했다. 스포츠, 여행지, 애니메이션 캐릭터, 세계문화유산 홍보 등 레퍼토리도 다양하다. 그중 신선한 재미와 특별한 비행 경험을 선사하는 건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 단장한 비행기다. 외관뿐 아니라 내부까지 그 분위기가 이어지기 때문. 3월에 개봉한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은 실제로 영화의 주요 장면을 터키항공 기내에서 촬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터키항공은 이를 기념해 보잉 777을 영화 이미지로 감쌌는데, 그 안에서 배트맨 캐릭터를 붙인 기내 어메니티 파우치와 컵케이크, 쿠키 등을 제공해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전일본공수(ANA)는 스타워즈 마지막 시리즈가 개봉하는 2020년까지 스타워즈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선언했다. 지난해 말 스타워즈의 마스코트인 R2-D2 로봇을 그린 보잉 787-9을 운항한 데 이어 이번에는 동그란 몸체의 귀여운 인공지능 로봇 BB-8의 모습을 새긴 비행기를 공개해 스타워즈 마니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내가 그린 예쁜 비행기’ 사생 대회 1등 수상작을 그려 넣은 대한항공
FC 바르셀로나 래핑 항공기를 선보인 카타르항공
스포츠를 테마로 하는 경우는 주로 규모가 큰 국제 스포츠 행사 유치를 위한 홍보나 승리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는다. 카타르항공의 FC 바르셀로나 래핑 항공기가 그것. 보잉 777을 카타르항공의 오릭스(Oryx) 로고와 FC 바르셀로나의 문양으로 화려하게 감싸며 ‘세계를 하나로’라는 캠페인 컨셉을 더욱 부각시켰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일주일간 수작업으로 특별 맞춤 제작한 이 비행기는 FC 바르셀로나를 상징하는 진홍색과 푸른색으로 외관을 도색했는데, 구단 깃발이 펄럭이는 듯한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음영 효과까지 선사했다. 이외에 매년 ‘내가 그린 예쁜 비행기’ 사생 대회를 개최하고 1등 수상작을 항공기에 래핑하는 대한항공이나 핑크 리본 캠페인의 일환으로 핑크 비행기를 운항하는 델타항공처럼 시각적 즐거움보다 특별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비행기 래핑을 시도하기도 한다.
에어프랑스 설립 80주년을 기념해 존 원이 그린 새로운 버전의 로고 디자인
이언 대번포트가 파베르제의 달걀을 모티브로 그린 그림
비행기 래핑이 활발해지자 아티스트와 협업을 통해 비행기에 예술적 감성을 녹이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에어프랑스는 2014년 설립 80주년을 맞아 특별한 이벤트를 고민하다 그라피티를 현대미술로 발전시킨 뉴욕 출신 아티스트 존 원(Jone One)에게 로고 디자인의 새로운 버전을 의뢰했다. 그는 기존의 붉은색 로고를 프랑스 국기를 상징하는 블루, 화이트, 레드 컬러로 물들인 후 그라피티 특유의 낙서처럼 긁는 방식을 활용해 물방울이 움직이는 듯한 디자인을 만들어냈다. 이 로고는 에어프랑스를 대표하는 보잉 777 몸체 뒤쪽에 4m가량 크기로 새겨 넣었다.
스위스에 기반을 둔 글로벌 항공사 비스타젯도 아티스트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 2011년에 워싱턴에서 열린 개인전을 후원하면서 인연을 맺은 뉴욕의 거리 예술가 레트나(Retna)는 그에 대한 화답으로 글로벌 익스프레스 XRS 꼬리에 고대 문자처럼 기하학적 무늬의 그림을 그렸다. 비스타젯은 유럽 장식미술의 최고 거장으로 꼽힌 파베르제(Faberge)를 기리는 특별한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주력 항공기 중 하나인 봉바르디에 글로벌 6000 꼬리 부분에 파베르제 달걀에서 모티브를 딴 디자인을 새기고, 기내에서는 한정판 파베르제 파인 주얼리 달걀 펜던트를 판매한 것. 이를 위해 영국의 현대미술가 이언 대번포트(Ian Davenport)가 나섰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19세기에 파베르제가 러시아 로마노프 황제를 위해 아름다운 부활절 달걀을 만들었다면, 21세기에 살고 있는 나는 그 달걀을 예술적 디자인으로 재현해 비행기에 담았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파베르제 달걀’을 본떠 레드, 퍼플, 그린, 블루, 오렌지 등 오색 창연한 달걀 모양을 수놓았는데, 수많은 보석으로 화려하게 빛난 파베르제 달걀을 다채로운 컬러가 물결치는 현대적 감각으로 표현했다.
지금까지 비행기 래핑은 브랜드나 제품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이자, 특별한 가치와 메시지를 전하는 매개체의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머지않아 비행기 래핑이 영역을 넓혀 하늘 위 갤러리처럼 아티스트의 예술적 감수성을 입고 전 세계를 날아다니리라 기대해본다.
에디터 문지영 (jymoo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