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세계에도 법(法)은 있다
LA의 엔터테인먼트 회사나 영화사엔 배우나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들 외에 또 하나의 전문가가 있다. 다름 아닌 변호사다. 이 거대한 할리우드가 냉정하지만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한 데에는 이들의 힘이 크다. 화려한 엔터테인먼트 세계에서 이성의 힘을 발휘하는 사람들. 영화나 TV 프로그램 한 편에 그들의 손길이 미친 수많은 일이 얽혀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영화 속 꼭 필요한 조연 같은 그들의 존재가 영화를 더욱 빛나게 하니 말이다.
왼쪽부터 매튜 에라무스피, 진 강, 스테판 샤프
엔터테인먼트 전문가들, Lawyers at O’Melveny & Myers
이들을 만나게 된 계기는 사실 단순했다. 지난 10월호의 인터뷰를 통해 할리우드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한국인을 찾다가 오멜버니 & 마이어스(O’Melveny & Myers)라는 유명 법률 회사의 재미교포 변호사 진 강(Gene Kang)을 만났고, LA 인근의 센츄리 시티(Century City) 사무실에서 같은 팀의 시니어 변호사 스테판 샤프(Stephen Scharf)와 매튜 에라무스피(Matthew Erramouspe)를 마주해 색다른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 법률 회사는 서울을 포함한 전 세계 16개 사무소에 850여 명의 변호사를 두고 있는 다국적 로펌. 특히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폭넓은 지식과 경험을 갖춘 거의 독보적인 메이저 로펌이다. 진은 이 회사가 100여 년 전부터(정확히 말하면 125년!)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복잡한 거래를 이행하는 서비스를 해왔다고 했다. 놀랍게도 무성영화 시절부터 할리우드엔 이런 전문 변호사가 존재했지만, 아직 우리에겐 ‘엔터테인먼트 로(entertainment law)’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기만 하다. 이에 대한 매튜의 설명. “그 단어가 적당한 것 같진 않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엔터테인먼트라는 특정 산업 분야에서 법적 거래를 다루는 것입니다. 라이선스, 배급, 자금 등 다양한 종류의 계약 거래를 이행합니다. 기업 합병과 인수 관련법, 법인 자금 관련법 등의 특수법도 엔터테인먼트 미디어 산업에서 적용해야 할 때가 많아요. 노동법과 고용법 같은 것도요. 또 기업 혁신 전략이나 파산에 관해서도 다룹니다.”
그 어떤 분야보다 수많은 사람과 기업, 어마어마한 자금이 얽혀 있는 독특하고 특화된 산업이니 그들의 역할이 꼭 필요하고 중요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주요 클라이언트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MGM, 월트디즈니, 워너브러더스 같은 영화 제작사와 배급사, TV 방송사 등 엔터테인먼트 전 분야에 걸쳐 있다. 제작과 콘텐츠 개발에 자금을 대는 금융업계 기업도 있고, 더 나아가 국제올림픽위원회 같은 대형 스포츠 기구도 포함돼 있다. 스포츠 팀을 인수하거나 독점권을 판매할 때, TV나 다른 배급 경로를 통해 그들의 행사나 경기를 방송하길 원할 때도 법에 따른 거래와 변호를 이행한다. 여기에 대해 이 팀의 최고 경력자인 스테판이 덧붙였다. “배우나 제작자, 작가, 감독 또는 운동선수 같은 개인의 변호보다는 기관을 상대로 산업적 실무를 담당하는 일이라 영화배우들이 돌아다니거나 하는 화려한 쇼비즈니스 회사와는 달라요.”
사실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로펌과 변호사 역할이 미국만큼 크지 않은 한국을 포함한 대다수의 아시아 국가에선 생소하기도 하고 별다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스테판은 최근까지 제작이나 고용, 재정 등 전반적인 부분에서 정부의 지배를 받아온 중국을 일례로 들었다.
“프라이빗 마켓이 발달한 건 5~10년 정도밖에 안 된 것 같아요. 아직도 정부의 지배를 받는 곳이 많긴 하지만 중국 밖에서 계약을 하는 사례가 점차 늘고 있어요. 스포츠 콘텐츠나 영화 등을 다루면서 계약 거래를 대신해줄 전문가가 필요해진 거죠. 그들은 무엇이 중요하고 자신의 권리와 규제는 어떤 것인지, 영화에 얼마를 투자해야 하는지 잘 몰라요. 그럼에도 중국은 아주 빠른 속도로 21세기 산업의 흐름에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아요.”
매튜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미국에서도 여타 산업과 확연히 다른, 특화된 분야라고 했다. 헷갈리는 부분도 많고 매우 복잡하단다. 그들의 클라이언트 중에는 헤지펀드를 보유한 자산가도 상당수인데, 다른 산업에서 일한 그들도 엔터테인먼트 세계의 구조나 방식이 특이하고 미스터리한 것투성이라는 사실에 당황하곤 한다. 그럴 때 비용이 비싸더라도 이 산업에 대해 많은 경험과 지식을 갖춘 오멜버니 앤 마이어스 같은 로펌의 변호사를 고용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이득임을 강조했다. 할리우드로 몰려드는 다양한 자본 유입도 그들의 손을 거친다. 최근에는 중국의 자본 투자가 서서히 늘고 있고, 거대한 영화 시장을 갖추고 새로운 엔터테인먼트 강자로 떠오르고 있는 인도도 그들의 새로운 클라이언트다.
이들의 역할은 시대의 흐름이 변하면서 점차 커지고 있다. 이를테면 온라인과 디지털 시장의 성장 같은 급속한 변화. 스테판은 진이 이 분야에서 자본을 관리하고 거래를 성사시키는 전문가라고 귀띔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재능 있는 영화인들이 영화제에 뛰어난 독립영화를 출품해도 배급 지원 선정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독립영화 제작사들이 배급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디지털 서비스 런칭을 돕는 일을 합니다. 콘텐츠를 종합적으로 취합해 아이튠즈나 넷플렉스 같은 디지털 플랫폼으로 보내주는 어그리게이터(aggregator, 여러 회사의 상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정보를 모아 하나의 웹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인터넷 회사 혹은 사이트) 거래를 협상하기도 하고요. 이것은 결국 회사가 독특한 기회를 가질 수 있는 동시에 소규모 영화 제작사들이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35mm 영화 제작 장비를 디지털 장비로 바꾸는 일에도 진의 전문 지식과 능력이 필요하다. 디지털로 전환하면 비용도 줄고 관객에게 선보이기까지 시간도 훨씬 빨라지니 그 과정에서 예전엔 상상할 수 없던 다양한 형태의 복잡한 거래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의 현재와 미래, 전 세계 영화 산업의 흐름, 더불어 한국 영화 산업에 대한 것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꽤 오랜 시간 자유롭게 오갔다. 그들과 나눈 대화는 어느 유명 감독이나 배우의 의견과는 다른, 국내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어떤 방향을 보고 나아가야 할지에 관해 흥미로운 시사점을 던져주었다. 그들의 말대로,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국내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더 글로벌해질 수 있는 호기일 수도 있다. 싸이도 전혀 예상치 못하게 유튜브를 통해 세계적 히트를 쳤으니까. 한국 문화에 대한 세계의 관심, 니콜 키드먼 같은 톱배우가 꼭 일해보고 싶은 감독으로 꼽을 만큼 신뢰를 받고 있는 박찬욱 감독 같은 재능 있는 영화인, 온라인과 디지털 컨버전스의 발달에 빠르게 반응하는 영민한 마인드. 이런 강점이 버블 현상처럼 사라지지 않고 발전을 위한 초석이 되려면 주먹구구식이 아닌 체계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제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도 오멜버니 앤 마이어스 LLP같이 오랜 경험과 노하우, 지식과 협상 능력을 갖춘 로펌의 전문적이고 이성적인 역할에 눈길을 돌려야 할 시점이 아닐까 싶다.
미술 작품 컬렉터인 그의 사무실에 걸려 있는 중국 현대 작가의 작품
제3의 영화인, Chris Yin at Paramount Pictures
두 번째로 만난 엔터테인먼트 로 분야의 변호사는 파라마운트픽처스에 소속된 중국인 변호사 크리스 인(Chris Yin)이다. 파라마운트에서 제작하는 영화 관련 업무만 한다는 점에서 오멜버니 앤 마이어스의 변호사들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 역시 영화 개발 및 프로덕션 부서에서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 모든 일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수많은 영화인이 거쳐간 어마어마한 세트장을 갖춘 LA 현지의 파라마운트사. 그곳에서 크리스 인과 영화계 이면에서 벌어지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나눴다.
구체적으로 어떤 업무를 하나요? 시나리오 작가와 제작자, 감독, 배우 고용, 장소 섭외 시 합의, 장비 임대, 특수 장비, 특수 효과… 그 과정에서 모든 법적인 문제가 우리 부서를 거칩니다. 규모가 아주 클뿐더러 미국은 주(state)마다 세금을 비롯한 각종 정책이 다르기 때문에 협의하고 성사시켜야 할 재정적 문제와 계약도 많습니다.
그렇게 많은 일에 관여하고 있다는 건 잘 몰랐네요. 흔히 변호사라고 하면 법정에서 소송을 다룬다고 생각하지만 전 소송은 하지 않습니다. 순수하게 영화의 업무 거래만 하는 변호사예요. 어떤 사업이나 프로젝트든 법적 차원에서 문서화하고 협의해야 할 일이 생기게 마련이죠. 우리가 움직여야 모든 복잡한 일이 순조롭게 돌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영화에 관여하고 있나요? 지금은 <트랜스포머 4>와 <미션 임파서블 4>. 아직 개봉하지 않은 것도 있어요. 그런데 이런 대규모 영화는 한 명의 변호사로는 부족해 팀이 필요합니다. <미션 임파서블>의 경우엔 2명의 변호사와 법률가가 붙었어요. <트랜스포머>는 3명의 변호사가 일했고요.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에서는 이런 직업이 새로운 컨셉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주로 어떤 계약과 협상이 이루어지나요? 이런 계약 건은 관련된 제작사 사람들이 보통 큰돈을 받기 때문에 일을 시작하기 전 언제 일하는지, 어떤 부수입이나 재정적 특전이 있는지 확실히 해두어야 합니다. 특히 배우들과의 협상은 규모가 큰 경우가 많아요. 촬영 시 다른 도시나 해외에 나가게 되면 어느 호텔에 묵고 하루에 얼마를 쓸 수 있는지까지 계약 조건에 포함되어야 해요. 배우에 따라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대부분 스타들은 개인 트레이너나 헤어 & 메이크업 스타일리스트 등 많은 사람을 대동하니 더 그렇습니다. 비단 액수뿐 아니라 신용 문제도 중요해요. 예를 들어 2명의 빅 스타가 출연할 경우 크레딧에 누구 이름을 앞에 둘 것인지 같은 문제도 강도 높은 협상 중 하나입니다. 이런 것은 개인의 연봉과는 상관없어요. 스턴트맨이나 폭발 장치를 쓸 때에도 연기자와 촬영 장소인 빌딩 모두 확실히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를 위한 합의 계약서가 필요해요.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고 복잡한 일입니다.
스타 배우가 일반적이지 않은 요구를 한 일화가 있나요? 물론 있어요. 이름을 밝힐 순 없지만. 종종 배우 본인보다 소속사나 매니저가 배우를 지키려고 그러는 경우도 있어요. 전에 인지도가 비슷한 2명의 주연급 배우가 둘 다 경찰 역할을 한 영화 제작에 관여한 적이 있는데, 배우가 대기하는 트레일러를 누가 더 세트장에 가깝게 배치하느냐 하는 문제를 협의해야 했어요. 이럴 경우 둘 중 한 명을 고르는 게 정말 쉽지 않아요. 그래서 그 스타들에게 영화에 출연하는 어느 누구보다도 세트장에서 멀지 않을 거라고 설득하며 타협할 수밖에 없었어요. 결국 그 둘은 똑같은 위치에 트레일러를 놓았고요. 영화 한 편을 살리고 망치는 데 배우의 힘이 중요하기 때문에 일일이 맞출 순 없어도 최대한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려고 합니다. 가변적인 게 많아 한마디로 이렇다고 얘기할 순 없지만, 분명한 건 우리 역할이 제작사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제작사에서 투자하는 비용은 어느 정도 규모인가요? 한국은 상대적으로 적은 자본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에 솔직히 잘 감이 오지 않습니다. 얼마나 위험을 감수하고 투자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대규모 영화에는 다른 파트너들과 공동으로 자본을 대는 경우가 많아요. 누구도 위험을 혼자 감당하길 원치 않으니까요. 대규모 예산이 들어간 영화의 크레딧에 ‘파라마운트사와 000 공동 제작’이라고 쓰여 있는 걸 심심치 않게 봤을 거예요. 여기서 대규모 예산 영화라 함은 1억 달러 예산을 훌쩍 넘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렇게 막대한 예산이 드는 가장 큰 이유는 노조의 규칙을 따르기 때문이죠. 배우와 작가, 감독, 제작자가 모두 노조연합의 회원이에요. 그러니 제작 기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죠. 반면 독립 영화사는 제작 기간이 훨씬 짧은 대신 배급하는 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식사를 제 시간에 하지 않으면 회사에서 부과금을 낸다던데 정말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다양한 노동조합이 작업 현장을 지배하고 있지만 변호사는 노조에 속하지 않아요. 그저 일이 잘 돌아가게 하면 그걸로 족하죠.(웃음)
홍콩에서 태어난 크리스 인은 수십 점의 미술 작품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지적이고 세련된 취향을 지닌 중국인이다. 이곳에 오기 전 8년간 대형 로펌에서 엔터테인먼트 분야와는 거리가 먼 은행이나 법인 회사 관련 일을 한 그는 MGM을 거쳐 파라마운트픽처스에서 매일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 “사실 아버지는 홍콩에서 영화감독, 어머니는 유명 여배우였어요. 남동생도 지금 홍콩에서 배우로 활동하고 있고요. 제가 변호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집안에선 저를 일종의 골칫덩이로 여겼죠.(웃음) 팝 음악 중독자고 어릴 때 어머니의 아들 역으로 출연한 적도 있지만 배우는 정말 내 길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다른 방식으로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네요.”
어린 시절과 가족 이야기를 하며 한결 표정과 태도가 부드러워진 그는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게 매우 즐겁다고 했다. 더 이상 대형 로펌의 변호사로 살지 않는 것을 후회한 적도 없다. 오히려 유명 영화인을 위해 거래하고 논쟁을 벌이는 과정 자체가 사람의 인생과 관련된 일이라 흥미롭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후 촬영을 위해 사무실 뒤편의 어마어마한 세트장으로 들어섰다. 뉴욕을 재현했다는 바깥쪽 세트장에서 포즈를 취한 그의 표정이 문득 우디 앨런 영화의 주인공처럼 유머러스해 보였다. 그의 존재 덕분에 이 세트장에서 펼치는 영화의 한 장면이 더 완성도 있는 모습으로 우리와 만난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게 느껴진 순간이다.
다이아나 강은 음식과 문화를 통한 VIP 마케팅으로 해외 글로벌 브랜드의 국내 시장 진출을 돕는 전문 컨설팅 회사 원더 박스의 대표다. 한국의 음식과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은 강 대표는 다양한 문화 이벤트를 통해 한국과 외국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해오고 있다. 이번 인터뷰 시리즈에는 다양한 분야 인사와의 만남을 통해 인생을 보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방법에 대해 제안하고자 한다.
에디터 이정주(프리랜서)
사진 안지섭 컨트리뷰팅 에디터 다이아나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