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건 그에게서
햇수로 12년째 ‘배우’라는 역할에 몰입한 주민진에게 ‘드라마투르그’라는 새로운 역할이 주어졌다.

주민진은 <마이 버킷 리스트>, <여신님이 보고 계셔>, <해를 품은 달> 등을 통해 연기력을 입증한 배우다. <마르틴 루터>에서 드라마투르그로서 제 역할을 해낸 그는 다시 배우로 돌아와 11월 4일부터 12월 10일까지 뮤지컬 <배니싱>, 11월 24일부터 내년 2월 4일까지 연극 <밀레니엄 소년단>에 출연한다.
2년 전 대학로 소극장에서 열린 토크 콘서트 현장. 여느 때처럼 평화롭던 나의 여가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바로 옆 좌석에 앉은 관객이 공연 중간에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졌기 때문.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사람을 부축하려 애썼지만 역부족이었고, 결국 공연은 중단됐다.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는 찰나 무대에서 사회를 보던 배우가 망설임 없이 객석으로 뛰어와 관객을 업고 나갔다. 그렇게 주민진 배우는 그곳에 있던 모두의 머릿속에 각인됐다. 그날 이후 몇 편의 뮤지컬과 연극 무대에서 다양한 캐릭터로 분한 그를 보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MBC의 <이야기 속으로>라는 프로그램에 직접 제 사진을 보냈어요. 전화를 받고 처음엔 거짓말인 줄 알았죠. 그때부터 단역으로 방송 생활을 시작했고 고등학교 땐 춤에 빠졌어요. 하지만 방송 쪽보다는 춤, 노래, 연기를 다 할 수 있는 뮤지컬 무대가 어울린다는 조언을 듣고 오디션을 보러 다녔죠. 뮤지컬 콘서트 <패션 오브 더 레인>과 창작 뮤지컬 <하루>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뮤지컬과 연극계에 발을 들였습니다. 어느덧 햇수로 12년째가 됐네요.” 그리고 얼마 전 뮤지컬 <마르틴 루터>에서 그의 이름을 다시 한번 마주쳤다. 주민진이라는 이름 앞엔 ‘드라마투르그(dramaturg)’라는 생소한 이름이 붙었다.
드라마투르그는 극작술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극작법 연구와 극작을 뜻하는 독일어 ‘드라마투르기(dramaturgy)’에서 유래한 단어다. 드라마투르그는 극작 이론을 바탕으로 오페라와 연극, 뮤지컬의 극본 집필, 각색, 연출, 제작, 캐스팅, 리허설, 홍보에 이르는 전 과정에 개입하며 창작진이 원하는 내용을 실제로 구현할 수 있도록 극작의 이론적인 면을 자문한다. 외국에선 전문 자격증이나 수업이 있을 정도로 보편화된 직업이지만 국내에는 정식 드라마투르그가 거의 없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배우가 캐스팅에 관여하거나 스태프와 상의해 극본을 완성하고, 상대 배우의 연기 노선을 설정하면서 드라마투르그의 기능까지 대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당분간 쉬려고 마음먹은 시점에 <마르틴 루터> 팀의 전화를 받았어요. 대본을 보완하고 액팅 코치를 맡을 사람을 찾고 있는데 배우들이 저를 추천했대요. 전 예술 전공자가 아닌데 괜찮으냐고 물었죠. 그런 건 상관없다는 말에 처음으로 배우가 아닌 드라마투르그로 뮤지컬 공연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선후배와 동료 사이에서 갑작스레 연기를 코치하는 것이 낯설지는 않았을까? “처음엔 걱정이 많았어요. 같은 배우에게 연기에 대해 말하기가 조심스러웠죠. 그런데 제 생각을 열심히 설명하고 함께 토론하니 오히려 배우들이 더 마음을 열더라고요. 각자 취향이 있을 텐데도 제 의견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어요. 배우들과 쉴 새 없이 연기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느라 집에도 못 가고 밤을 새우는 날도 많았죠. 열정적인 배우들을 보니까 저도 드라마투르그로서 더 고민할 수 밖에 없더라고요.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시간이 아니었나 싶어요. 스트레스도 많았지만 고생한 만큼 대본을 더 깊이 파고들 수 있었습니다. 제가 하던 일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제 고민을 실현해볼 수 있는 고마운 시간이었어요.”

1 <레드북> 커튼콜. 2 <배니싱> 공연 장면.
보통 드라마투르그는 극작 이론을 공부한 사람이 맡는다. 현역 배우로, 그것도 젊은 나이에 이런 역할을 해내긴 쉽지 않았을 터. “극작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인문학에 가까운 책들이에요. 많이 읽고 공부하면 더 많은 사람을 이해할 수 있어요.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서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제가 추구하는 방식을 다른 배우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제 연기가 상대 배우의 역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궁금합니다. 더 많은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연기 노선을 잡고 싶어요. 앞으로 배우로서 몰두하는 시간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1년에 한 번씩은 배우가 아닌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해도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창작진이나 스태프, 배우 사이의 경계가 무너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기를 해본 작가, 노래를 해본 연출이라면 서로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동안 주민진 배우는 유독 창작극의 초연을 많이 맡았다. 그만큼 누군가 이미 만들어놓은 캐릭터를 연기하기보다는 새로 캐릭터를 잡아나가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캐릭터의 방향성과 연기 노선을 설정해야 하는 드라마투르그라는 역할이 그에겐 배우만큼이나 어울린다. “초연 섭외를 많이 받아요. 개인적으로 캐릭터를 잡아나갈 때 제가 시작점을 만드는 걸 좋아해요. 물론 제 취향이나 생각 안에서 캐릭터가 탄생한다는 단점도 있죠. 하지만 점점 공연과 대본이 살아 있는 존재라는 확신이 듭니다. 캐릭터는 계속 변화해요. 연기는 결국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과 똑같습니다. 인생은 한 편의 연극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과거엔 이 말이 추상적으로 느껴졌지만 지금은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온 힘을 다해 배역에 빠져들다 보면 후유증이 클 것 같다. 그도 마찬가지로 막이 내려온 후 밀려드는 공허함을 피할 수 없다. “꽉 찬 객석에서 박수를 받다가 빈 공간에 혼자 들어갔을 때 공허한 기분이 들어요. 특히 마지막 공연 때는요. 연습이나 공연 기간엔 잠잘 때 빼고는 제가 맡은 캐릭터만 생각하잖아요. 제가 연기한 캐릭터는 왜 이런 말을 하고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깊이 고민하다 보면, 진짜 주민진의 삶을 잊을 때도 있어요. 그래서 스스로 환기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공연이나 연습이 끝난 밤에 바이크를 타면서 바람도 쐬고 여행도 자주 다니죠.”
몇 년 동안 일에만 몰두했다며 앞으로 자신과 가족을 돌보고 싶다는 배우 주민진. “배우를 꿈꾼 한 남자아이가 어느새 배우로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그는 어느새 드라마투르그라는 새 역할까지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그가 배우이자 드라마투르그로서 자신을 깎아내며 연기에 몰입한 만큼 수많은 캐릭터가 생명력을 얻었고, 여전히 관객의 마음속에 살아 숨 쉬며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앞으로도 그가 무대 안팎에서 다양한 인물과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길 기대한다. 그리고 캐릭터 바깥의 진짜 ‘주민진’을 놓지 않길 바란다.
에디터 백아영(xiaxia@noblesse.com)
사진 김잔듸(인물) 헤어 & 메이크업 김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