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xt Generation
부산 미술계는 세대교체 중이다. 1세대 갤러리에 이어 젊은 갤러리 오너가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이들이 들려주는 다음 세대의 ‘부산 미술’ 이야기.
미술 탐구 생활
아트소향 남은진 대표
“운명은 우리에게 기회와 재료와 씨를 제공할 뿐이다”라고 말한 철학자 몽테뉴처럼 자신에게 다가온 운명적 순간을 쟁취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아트소향의 남은진 대표는 영어학을 전공했지만 어느덧 미술의 길을 걷고 있다. 졸업 후 그녀는 이탈리아 피렌체로 떠나 복원전문학교에서 회화복원학을 전공했다. 이탈리아에서 복원가로 일하며 국내 갤러리와 해외 아티스트를 연결해주는 코디네이터 역할을 한 것이 본격적으로 미술계에 입문하는 계기가 됐고, 한국에 돌아와 지난 2013년 ‘아트소향’이라는 갤러리를 오픈했다. 남은진 대표는 국내에 몇 안 되는 회화 전문 복원가로, 얼마 전에는 경남도립미술관의 의뢰를 받아 약 1천여점에 이르는 소장품을 조사하고 전혁림 선생의 초기 작품 등 총 5점을 복원했다.
전시를 할 때, 그녀가 절대 거스르지 않는 두 가지 철칙이 있다. “첫 번째는 작가 자신이 자란 지역의 색을 가질 것, 두 번째는 역설적으로 지역색과 함께 국제적 감각을 갖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보편적 공감대를 형성할 때 작품의 가치가 빛을 발하니까요.” 첫 전시를 함께한 권순익 작가가 좋은 예시가 될 것이다. 그의 작품은 한국적 색감과 추상적 고민을 담아내면서도, 마티에르를 두텁게 올려 반복적으로 만든 원과 사각형 등의 도형이 라틴아메리카에서 발달한 ‘옵아트’를 연상시킨다. 그는 2015년 베네수엘라 국립 미술관에서 생존 작가 최초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작가의 해외 전시를 적극적으로 도와준 이도 바로 남은진 대표로, 그녀는 갤러리와 함께 성장하는 작가에 대한 자부심을 숨기지 않는다. 부산 출신으로 나무와 못, 낙엽, 철사 등 주변의 흔한 재료로 기하학적 조각과 설치 작품을 만드는 이재효 작가의 전시는 서울과 대구에서도 관람객이 찾아올 만큼 큰 호응을 얻었다. 아트부산과 키아프 같은 국내 아트 페어에 꾸준히 참여하고, 유럽과 아시아를 넘나들며 탐구하고 배우는 열정 덕에 아트소향은 4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성장할 수 있었다.
지금 남은진 대표는 부산을 넘어 아시아 미술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오는 4월 국내에 처음 소개할 중국 작가 구어리웨이(Guo Liwei)가 그 고민에 대한 답이 되어줄 것이다. 이 작가도 아트소향에서 앞서 소개한 작가가 그랬듯 동양적 소재를 서양화의 재료와 표현법을 이용해 그린다. “최근 미술계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중국의 유명한 작가들은 실은 문화 수준이 앞선 서양의 큐레이터가 발굴해 먼저 선점했죠. 이제 아시아 미술이 성장한 만큼 서양에 끌려가지 않고 우리 힘으로 발굴해 키운 작가가 주목받을 수 있게 해야 할 시점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좋은 전시를 선보이려 합니다.”
대를 이은 미술 열정
유진화랑 진정호 대표
도시의 변화에 따라 미술계 역시 변한다. 지금은 마린시티와 센텀시티에 갤러리가 모이고 있지만, 불과 3년 전만 해도 대다수 갤러리가 달맞이고개에 포진해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전 부산 미술의 중심지는 바로 중구 동광동이었다. 광복동과 남포동 등 구도심에 인접한 이곳에서 1970~1990년대까지 활발히 미술품 거래가 이뤄졌다. 여전히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이는 신옥진 대표의 ‘부산 공간화랑’과 더불어, 동광동 미술가(街)의 전성기를 이끈 이는 바로 ‘진화랑’의 진이근 대표다. 수준 높은 문화재급 고미술(古美術) 작품만 거래한 화상(畵商)으로 1990년 11월 조선시대 후기 회화사의 결정적 증거가 될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의 작품을 비롯한 18점의 작품을 공개하며 부산 지역에 흩어져 있던 가치 있는 작품을 한데 모으는 역할을 했다.
그 후 20여 년이 지나 아버지 진이근 대표에 이어 아들 진정호 대표는 자신의 화랑 ‘유진화랑’을 해운대에 오픈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손을 잡고 자연스레 오래된 그림을 찾아 나선 아이에겐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법학을 전공하다 이끌리듯 고미술에 눈길이 갔어요. 그래서 미술사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불교 미술관 중 권위 있는 성보미술관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안목을 키웠습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한국의 고미술 화랑 중 부산에선 진화랑을 꼽을 수 있다”고 평했을 만큼 전국의 컬렉터가 사랑하는 고미술 화랑을 이어가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다. 가치 있는 그림을 찾기 위해 전국을 유랑하는 그는 작품 속 이야기를 잘 읽어내는 것이 고미술 컬렉팅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옛 그림이기 때문에 작가에게 직접 물어볼 수 없습니다. 그만큼 컬렉터가 알고 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죠. 시대상은 물론 그린 이의 삶은 어땠는지, 그리는 방법과 재료는 어떠했는지 세밀한 사항에 대한 통찰력을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그가 최고의 그림으로 꼽는 것은 바로 ‘고려불화’다. 불교를 국교로 삼은 고려에서는 비단을 캔버스 삼아 붉은색, 녹색, 청색 등 원색적 색채를 사용해 부처의 모습을 그렸다. 화려한 금분 장식은 중국과 일본에서도 나타나지만 고려의 것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다. 이런 불화는 당시에도 왕족이나 귀족 같은 특권층만 누릴 수 있었기에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거의 없을뿐더러, 귀한 것은 일제강점기 대다수가 일본으로 건너가 지금껏 되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고려불화는 단 20점이 있습니다. 이중 7점을 저희 화랑에서 소개하고 판매한 것이라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개인 컬렉터가 소장한 사례는 부산의 두 컬렉터가 유일한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새로운 시도로 부산 미술계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한다. 현대미술과의 합일이 그것이다. 대체로 고미술은 상설전으로 기획하므로, 틈틈이 현대미술도 함께 소개하며 화랑의 역할을 넓혀갈 계획. 작년 6월부터 이어진 전시에는 30대 이상의 젊은 청년 작가가 함께했다. 신대준, 김등용, 차현욱 등 10명이 넘는 작가가 이곳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작년부터는 고미술과 현대미술을 아우르는 갤러리로 아트 페어에도 참여하고 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마치 제집 드나들듯 ‘진화랑’을 방문한 오랜 컬렉터들 덕분에 우리 화랑이 고미술 갤러리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화랑뿐 아니라 다양한 곳에서 새로운 컬렉터를 만나고, 고미술과 현대미술의 매력을 함께 전하고 싶어요. 또 훗날 태어날 제 아이에게 화상 일을 물려주어 부산은 물론 한국 미술계에서 유진화랑의 명맥과 명성이 계속 유지되길 바랍니다.”
속 깊은 갤러리
춘자아트갤러리 정선미 대표
‘춘자아트갤러리’의 정선미 대표는 한국화 화가다. 통창으로 빛이 한가득 들어오는 갤러리 뒤쪽 화실에서 그녀는 여전히 풍경 좋은 산수화를 그린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다 서른 살이 됐을 때 고민이 많았어요. 그림 그릴 작업실도 필요했고, 지금도 그렇지만 젊은 작가들은 전시 할 공간이 거의 없으니까요. 앉아서 걱정하기보다는 행동하는 쪽을 택했고, 3년 전 춘자아트갤러리를 열었어요.”
‘춘자’라는 정감 어린 이름은 그녀가 생각하는 갤러리의 정체성을 잘 드러낸다. 춘자처럼 누구에게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갤러리, 그것이 정선미 대표가 생각하는 이 공간의 존재 이유다. ‘팔고자’ 하는 목적보다 ‘좋아서’ 시작한 갤러리지만, 상업적 목적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그녀는 춘자아트갤러리의 역할을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부산 미술의 젊은 동력으로 자리매김한 대안 공간(반디, 오픈스페이스 배 등)과 상업 갤러리 사이에서 찾는다. 그동안 대안 공간은 다소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을 전시하며 미술에 대한 폭을 넓혀왔지만, 그에 비해 대중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한 면도 있었다. 정선미 대표는 회화에 국한하지 않고 설치와 조각, 도자, 사진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전시하되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작품을 찾고자 노력한다. 첫 번째 기획전 <내향적 사고>에 이어 지난해에 개최한 기획전 <내 서랍 속의 이야기>는 그래서 비교적 젊은 30~40대 컬렉터의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실력있는 작가 발굴에 목 말랐던 지역 평단의 호응도 이끌어냈다.
이곳에서 젊은 작가만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녀의 열정에 이끌려 동의대학교 미술학과 교수이자 한국화 화가인 최광규, 그리고 40년간 목수로 일하며 가구를 만들어온 서기열과 도예가 윤세호 등 중견 작가도 춘자아트갤러리에서 전시를 열었다. “어린 나이에 갤러리를 운영하는 걸 기특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일반적 상업 갤러리에선 시도하지 못할 실험적 전시를 이곳에서는 마음 놓고 할 수 있다’는 농담 섞인 말씀도 하시고요.(웃음)” 그리고 기획전시가 있을 때마다 작가와 컬렉터, 그리고 평론가를 모아 진행하는 포럼은 미술에 대한 정선미 대표의 진지한 태도를 보여준다.
2016년을 맞아 그녀는 그동안 미흡했던 부분을 돌아보고, 새롭게 거듭나는 한 해가 되길 소망한다. 하얀 북극곰을 통해 현대사회에 대한 따뜻하면서도 통렬한 비판의 시선을 드러내는 박지희 작가의 개인전을 비롯해, 3월에는 부산시립미술관의 주목할 만한 젊은 작가에 뽑힌 박상은 작가의 설치와 영상 작품전이 열린다. 항상 그래왔듯이 정선미 대표는 직접 자료를 모으고, 글을 쓰며 전시 팸플릿을 디자인하고 만들 것이다. “가끔 ‘그림만 그리면 더 편하게 지낼 수 있을 텐데 왜 갤러리를 열어 이 고생을 하나?’라는 후회가 밀려올 때도 있지만, 부산의 많은 작가에게 작품을 전시할 편안한 공간 하나 마련해주고 그들을 돕는 것에 보람을 느낍니다. 제가 작가로 전시할 때 느낀 모자란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갤러리를 만들고 싶습니다.”
‘복잡’하지 않은 ‘복합’ 공간
갤러리 정 컨템포러리 정희영 대표
정희영 대표는 지난 12월, 4년간의 큐레이터 생활 끝에 자신의 이름을 딴 갤러리 정 컨템포러리를 오픈했다. 그동안 해운대아트센터, 퍼스트아이콘, 갤러리 도도앤 등 유서 깊은 유명 화랑에 몸담아온 그녀다. “저는 비교적 일찍 큐레이터 일을 시작했고, 갤러리를 떠난 후에는 국내외 아트 페어에서 프리랜스 큐레이터로 활동했어요.” 어린 나이에 미술 시장의 최전선에서 종횡무진 활약한 그녀는 지금 높은 평가를 받는 작가보다 잠재력 있는 청년 작가를 발굴해 소개하고, 그들과 함께 성장하는 갤러리를 꿈꾼다. 찰스 사치나 래리 가고시안처럼, ‘지금 잘나가는 작가’를 좇기보다 ‘잘나갈 수 있는 작가’를 찾아내는 데 자신의 역량을 다할 생각이다.
갤러리의 첫 전시인 김현주 작가 개인전은 독특한 전시 방식으로 지난 연말 부산 미술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마치 모던한 한옥 같은 갤러리 내부는 그녀의 독특한 큐레이팅 스타일을 표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곳. 긴 나무 문 위에 작품을 걸기도 하고, 책장에는 작은 소품을 두었다. 또 작가가 작업 시 사용한 이젤을 들고 와 작품을 올려두고, 대체로 인쇄물로 만드는 작가 노트는 유리창에 작가가 직접 적었다. “저는 문화를 판매하는 사람입니다. 갤러리의 역할이 다소 상업적이라는 것을 부인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컬렉터에게 친절한 판매원이 돼야 합니다. 초보 컬렉터가 가장 고민하는 게 ‘과연 저 작품이 내 집에 어울릴까?’라는 생각이기에, 실제 거주 공간처럼 갤러리를 꾸미고 작품 역시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 공간에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와 더불어 색을 입히고 시간이 지나면 그 위에 다른 색 물감을 덧입힌 후 긁어내며 형태를 만드는 김현주 작가의 작품은 첫 개인전임에도 관람객의 주목을 받는 데 성공했다. 올해 5월 열리는 아트부산에서는 신체를 조금씩 왜곡하고 귀와 콧속 털을 과장해 자화상을 그리는 김범수 작가의 솔로 부스를 구성한다. 부산의 원도심 창작공간 ‘또따또가’에서 먼저 주목받은 작가여서 지역 미술계가 거는 기대가 크다. 또한 정희영 대표는 올 하반기에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은 북유럽 작가를 초대해 기획전을 열 계획이다.
부산 미술계의 오랜 중심지인 달맞이고개에서 그녀가 이렇듯 파격적인 시도를 할 수 있는 것은 든든한 친구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 바비큐 레스토랑 ‘스모크 하우스 & 스탠더드’의 허윤 셰프, ‘플라워 소셜’ 로즈 킴 대표, 스트리트 패션 포토그래퍼 김재현 등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들이 자칭 타칭 ‘해운대 컬래버레이션’이라는 그룹으로 모여 활동하고 있다. 미술과 연극을 결합한 공연, 꽃을 예술 작품처럼 감상하는 전시 등 경계 없는 예술 활동이 이곳에서 펼쳐진다. 3월이면 해운대 팔레드시즈로 자리를 옮겨 지금보다 활발한 활동을 이어갈 계획이다. “바다처럼 자유로운 감성과 고급문화가 공존하는 해운대의 정체성에 기반을 두고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것, 이것이 저와 제 친구들이 꿈꾸는 것이죠.”
에디터 신숙미(프리랜서)
사진 공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