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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에 가고 싶다

LIFESTYLE

어느 날 문득, 어느 길 위에서 노곤히 지쳐 있는 당신에게 정영주의 그림을 보여주고 싶다. 빼곡히 머리를 맞댄 기와집과 굽이진 골목 사이로 어둠을 비집고 밝은 빛이 새어 들어오는 풍경. 가슴 한편에 어떤 그리움을 품은 이라면, 그 따스한 느낌에 발길을 멈출 게 분명하므로.

 

정영주 작가의 작품을 처음 눈에 담은 날의 느낌이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어둑해진 저녁 무렵 어느 산동네의 낡은 집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 그 색감이 너무 따뜻해서, 지난겨울의 유난스러운 한기가 일순간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실제 작품의 테마가 사랑과 정(情)이 담긴 ‘따뜻함’이라고 했다.
“서울 신림동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어요. 1970년대 서울은 개발되기 전이라 이런 풍경이 흔했어요. 그땐 그게 가난하다기보다 일반적인 서민의 모습이었죠. 학창 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부산에서도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감전동이라는 산동네에서 잠시 살았는데, 지금은 옛 모습 그대로 보존한 채 관광지로 개발하고 있어요. 지금은 이런 풍경이 많이 사라져서 아쉬워요.”
주인의 손때가 묻은 오래되고 낡은 집. 인위적으로 꾸미기 위함이 아니라 비를 피하고 햇빛을 가리기 위해 처마를 덧대고 고쳐가며 살던 집. 집과 집 사이에 아담한 동산도 있고 고개를 들면 저 멀리 흘러가는 하늘의 구름도 보이는, 자연과 어우러진 편안한 안식처. 지금의 빌딩 숲에선 쉽게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녀의 기억 속에 자리한, 그녀가 좋아한 도시의 모습은 그랬다. 정영주 작가의 ‘집’ 시리즈는 그런 옛 도시의 잔상을 엮어 탄생했다.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후 파리와 뉴욕에서 활동하며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정작 귀국한 2000년대 초반의 국내 미술계 상황은 달랐고, 8~9년 전 시작한 이 작업은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후 발표하게 되었다. “그즈음 국내 미술계엔 평면 구상 작업보다 팝아트와 미디어 아트 등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어요. 당시의 주류였지만 거기에 편승하고 싶진 않더라고요. 나만의 세계를 보여주고 싶었고, 사람들이 알아줄 때까지 기다리자고 생각했죠. 그래서 부산으로 내려와 대학에서 강의하며 계속 그림만 그렸어요.” 인고의 시간이었다. 시간과 열정을 온전히 작품에 쏟으며 고집스럽게 그 시간을 견뎌냈다. 그렇게 자신만의 특별한 작품 세계를 만든 그녀는 스스로 만족스럽다고 생각한 시점에 세상에 ‘집’ 시리즈를 내놓았다. 2009년이었다. 좋은 반응을 얻었고, 많은 이들이 알아준다는 기쁨과 자신감도 얻었다.
정영주 작가의 감성 표현 매개체는 한지다. 그녀는 이 흔하고 평범한 재료를 이용해 자신만의 방식인 마티에르가 느껴지는 한지 작품으로 재창조한다. “스케치를 한 후 한지를 캔버스에 붙여요. 기왓장과 창문같이 작은 면 하나하나를 붙이는데, 그 방식이 다 조금씩 달라요. 그 모양대로 주름지게 구겨서 입체감 있게 표현한 거예요. 마르면 그 위에 아크릴로 채색하고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내손을 거치는 작업이라 보통 힘든 게 아니에요. 대학 때부터 종이와 나무 등 여러 재료를 사용하며 온갖 시행착오를 거친, 내 느낌을 가장 잘 표현하는 나만의 기법이죠. 이렇게 표현한 판자촌 집의 낡은 느낌을 많은 관람객이 독특하게 느끼고 좀 더 자세히 봐주는 것 같아요.”
그녀의 말대로, 빛을 흡수하는 한지의 특성은 따스한 느낌을 배가시킨다. 손맛으로 낸 불규칙한 주름 사이사이 흠뻑 머금은 빛이 촉각을 자극하는 텍스처를 입고 어두움을 은은하게 물들인다. 그 따뜻함의 정서 덕분일까? 40~50대 이상의 연령층에게만 받아 들여지리라 생각한 이 지극히 한국적인 옛 산동네 모습은 젊은 20~30대에게도, 많은 외국인에게도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따스한 빛의 색감에 매료돼 발길을 멈춘 관람객은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상상한다. 언뜻 비슷비슷해 보이는 풍경이지만 구도와 색감이 조금씩 다르고, 사람을 직접 그려 넣진 않았지만 그 안에 사람의 이야기가 숨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실제로 그녀는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환하게 불을 밝힌 집 안, 저녁밥상을 차려놓고 둘러앉아 정(情)을 나누는 모습을 담은 것이라고 했다.
도회적이고 똑 부러지는 이미지의 정영주 작가 내면엔 사람과 사랑을 소중히 여기는 따뜻한 감성이 숨어 있다. 좀 더 아기자기하고 컬러풀한 색감으로 물들인 ‘낮은 집’ 시리즈도 그런 그녀의 감성으로 채색한 작품이다. 뉴욕의 거대한 빌딩 숲보다 옛 건물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 유럽의 풍경이 친근하다는 그녀는 대도시가 주는 차갑고 공격적인 위압감과 그 안의 사람을 고려하지 않은 듯한 모습에 유쾌하지 않은 기분과 불안감을 느꼈다고 했다. “집은 사람이 들어가 살 정도의 크기가 적당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가로로 긴 캔버스에 수평으로 자리한 낮은 집을 그렸어요. 작고 아담한 집이 모여 있고 전봇대가 이어져 있죠. 사람이 사는 방식은 이래야 한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어요. ‘저녁’ 시리즈도 그래요. 크기가 거의 차이 나지 않은 집들을 통해 물질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태에 반하는 느낌을 표현했죠. 부의 정도로 사람의 내면까지 평가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낮은 집들 위로 하얗게 비어 있는 여백, 비슷비슷한 집들 뒤로 희미하고 끝없이 펼쳐져 있을 듯한 어느 동네의 모습과 아스라이 사라져가는 하늘의 풍경…. 그녀는 비어 있거나 멀리 사라지는 화면 구성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없는 게 아님을, 가득 찬 내면의 아름다움을 담고 싶다고 했다.
“제 그림엔 기본적으로 그리움이 깃들어 있어요. 이미 흘러간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과거는 아무리 아름다워도 약간의 서글픔이 있기 마련이에요. 시간은 되돌릴 수 없으니까. 그럼에도 차가운 현실을 서로 보듬고 다독이며, 따뜻한 사랑과 희망의 빛을 느껴야 한다는 걸 부드러운 어조로 얘기하고 싶어요. 그게 바로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가치예요.”
정영주 작가의 최근작은 더 밝고 다채롭다. 스스로에 대해 외롭고 고된 그림 작업을 잘 이겨낼 정도로 내성적이고 외골수 기질이 있지만 나이가 들면서 한층 여유로워지고 유들유들해졌다고 표현한 그녀 자신의 모습처럼. 작은 보폭이지만 깊고 폭넓은 변화가 담긴 그녀의 ‘저녁 길’ 시리즈는 3월에 열리는 화랑미술제를 통해 만날 수 있다. 스스로 쉽게 만족하지 못하는 그녀 자신도 마음에 든다고 말한 80호짜리 대작이다. 해가 질 때까지 뛰어노는 아이와 밥 먹으라며 소리 높여 부르는 어머니, 힘든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충만함을 채우는 아버지가 있을 듯한 어느 동네의 풍경을 포착했다.
그런 그녀의 작품을 오랜만에 부산에서도 직접 만날 수 있다. 2월 23일부터 4월 2일까지 갤러리이배에서 열리는 ‘Topophilia’ 전을 통해서다. 제 2의 고향이라 일컬을 정도로 애정과 애착을 갖고 있는 부산이란 도시는 작품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녀가 해외에서 이곳에 다시 정착하기 위해 돌아왔을 때는 해운대가 개발되기 시작했던 터라, 급격한 변화를 지켜봤기 때문이다. 옛 부산 산동네의 정겨움과 그리움의 편린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1년에 10회가 넘는 국내외 아트 페어와 갤러리 전시, 여기에 작품 구입을 원하는 고객의 주문까지, 쉴 새 없이 몰려드는 스케줄에 몸살을 앓고 있는 그녀는 어둡고 힘든 20~30대를 지나 40대 중반에 이른 지금 가장 환하고 밝은 빛을 머금은 전성기를 맞이한지도 모른다. 그녀의 얼굴에 더 깊은 주름이 지는 때가 오더라도, 평생에 걸쳐 표현하고 싶다는 따뜻함의 밀도는 그저 유희로 그치지 않고 관람객에게 더 깊숙이 다가갈 듯하다. 따뜻함을 그리워하는 정서는 누구에게나 영원한 테마이므로. 그녀가 그린 집 앞에 서게 된다면 쉼 없이 내달린 길 한가운데에서 한 번쯤 뒤를 돌아보고, 무심히 지나친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길. 그렇게 멈춰 서서, 작가의 감성을 온전히 공감할 수 있길.
갤러리이배(2월 23일~4월 2일) 문의 051-746-2111, http://www.galleryleebae.com

정영주, 낮은 집, 2015

에디터 이혜진 (hjlee@noblesse.com)
사진 기성률  스타일링 이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