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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듣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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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이용백을 만났다. 예술이 아니라 오디오 얘기를 하기 위해서.

1 이용백 선생과 그의 스피커. 왼쪽으로 보이는 3개의 스피커는 다 다른 브랜드 것이다. 푸른색 스피커는 JBL 4350(1985년), 그 위에 놓인 제품은 ZEISS IKON사의 1945년 제품, 그 옆의 덩치 큰 스피커는 알텍사의 A5(1950년)다.

이용백이 누구인가. 한국에서 ‘세계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아티스트 중 한 명이다. 2011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단독 작가였으며, 세계적 아티스트 팡리쥔과 세계 미술계를 움직이는 인물 중 한 명인 MoMA의 마이클 제이컵스가 선뜻 그의 작품을 구매해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영상과 설치, 조각, 회화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는 그의 작품은 정치와 사회는 물론 일상의 부조리에까지 질문을 던지는 통쾌함이 있다. 하지만 이 작가를 만나기 위해 파주로 떠난 건 아티스트의 작품관이나 철학을 듣고자 함이 아니라 오디오 얘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파주 깊숙이 숨어 있는 그의 주거지 겸 작업실은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주변의 평범한 집들과 확연히 차별되는 외관 때문에. 미니멀한 외관은 겉만 보면 마치 작은 갤러리 같다.

집은 크게 세 공간으로 나뉜다. 그와 아내가 생활하는 거주 공간, 그가 조수들과 함께 일하는 작업실, 그리고 부피가 큰 그의 설치 작품을 저장해두는 일종의 수장고. 그의 오디오는 거주 공간과 작업실에 분산되어 놓여 있는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으리으리한 오디오는 아니다. 소박하게 생긴 빈티지 오디오다. 그는 처음 오디오를 만난 순간을 이렇게 회상한다. “대학 입학 선물로 아버지께서 롯데 파이오니아를 사주셨어요. 그때 돈으로 100만 원 이상이니 굉장히 큰돈이었죠. 그러면서 음악에 관심을 가졌지만 독일 유학과 동시에 사운드를 잊고 지냈어요. 한국에 돌아와 홍대 쪽에 작업실을 얻었는데 근처에 ‘블루스 하우스’라는 오래된 카페가 있었어요. 거기 가서 술 마시면서 스케치하고 구상하고 그랬는데, 파주로 이사 오니 자주 찾아갈 수가 없잖아요. 자체적으로 음악을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는 오디오가 ‘돈 자랑’처럼 보이는 것이 싫다고 했다. 취미라는 것도 결국 가치를 부여하기 나름이니까, 자신만의 재미를 느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작업실의 한 칸을 꽉 채운 빈티지 오디오와 앰프들. 다소 허름해 보이지만 모두 역사적 의의가 있는 제품이다. 중앙에 놓인 박쥐 날개 형상의 스피커는 이용백이 자랑하는 웨스턴 일렉트릭사의 16A 혼. 1930년대에 미국에서 극장용으로 쓰이던 제품이다. 한국의 예병수 선생이 오랜 노력 끝에 오리지널과 똑같이 복각한 제품이다. 풍모가 신사처럼 고상하다.  

처음 이곳에 이사 온 8년 전까지만 해도 이용백은 오디오에 대한 지식이 깊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때 그 앞에 나타난 것이 동료인 문혁민 작가다. 문 작가의 부친은 대단한 오디오 마니아였고, 문 작가도 꽤나 훌륭한 컬렉션을 가지고 있었다. 때마침 문 작가가 가지고 있던 오디오 시스템을 구입할 기회가 왔다. 프리앰프와 파워앰프, 스피커였다. “마침 필요하던 차라 그걸 다 샀죠. 그런데 공부를 좀 하다 보니 다 좋은 제품이긴 한데 짝짝이인 거예요. 하하. 하나씩 짝을 맞추면서 자연스럽게 오디오 공부를 했고, 그러다 여기까지 온 거죠.”
그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작업실에 놓인 오디오를 하나하나 설명했다. “이건 웨스턴 일렉트릭(WE)사가 1922년에 내놓은 세계 최초의 앰프고, 얘는 1928년에 나온 WE의 오리지널 모델이에요. 비싼 거죠. 이건 알텍(Altec)이 만든 1953년산 플랜지인데, 내가 직접 디자인했어요. 이건 WE의 16A 혼(Horn)이라는 거예요. 유성영화 초기인 1920년대에 대형 극장용으로 개발한 스피커인데, 특유의 소리 때문에 지금도 마니아들이 엄청 사랑하죠. 우리나라 오디오 마니아인 예병수 선생님이 오리지널을 똑같이 복각해서 만들었어요. 복각품이지만 거꾸로 외국에 수출할 정도로 퀄리티가 높아요.”
그러니까 작업실 구석구석에 짐짝처럼 심드렁하게 놓인 스피커와 앰프들은 각각 엄청난 스토리를 지닌 역사적 제품이다. 속물적인 추측이지만 꽤 많은 돈이 들었을 법하다. 오디오는 워낙 고가의 취미로 인식되니까. “제가 가진 제품들이 싼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수억 원씩 하는 사치품도 아니에요. 이건 문 작가의 아버님이 주신 거고, 저건 어떤 스님이 쓰던 걸 입양했어요. 이베이에서 조금씩 사 모으기도 했고요. 이걸 다 조합하는 데 무려 2년이 걸렸어요. 이런 게 재미죠.” 그는 오디오가 ‘돈 자랑’처럼 보이는 것이 싫다고 했다. 취미라는 것도 결국 가치를 부여하기 나름이니까, 자신만의 재미를 느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비싼 오디오 많잖아요. 그런데 그런 걸 전 조금 우습게 봐요. 속된 말로 ‘돈지랄하네’ 하죠. 지식이나 애정 없이도 돈만 있으면 누구나 살 수 있는 거잖아요. 그건 큰 의미가 없다는 거죠.”


1 세계 최초의 푸시풀 앰프인 웨스턴 일렉트릭사의 7A(1922).
2 실바톤(Silbatone)의 앰프. 세계적으로 인정 받는 한국 기업의 제품이다.

그는 작품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오디오로 푼다고 했다. 작품은 타인을 위한 것이고, 오디오는 본인을 위한 것이라고. 그러다 보니 인간관계도 오히려 오디오 쪽으로 더 확장되고 있다. “오디오 마니아 중에 정말 창의적인 사람이 많아요. 이 사람들이 예술가다 싶죠. 게다가 누가 새로운 기기를 하나 가져오면 다들 모여서 열린 마음으로 순수하게 감상해요. 요즘은 미술 작가 모임보다 더 즐거워요. 아티스트들 만나면 맨날 돈 얘기나 하고, 살기 힘들다는 얘기나 하고. 재미가 없어요.” 오디오 마니아도 크게 두 부류가 있다. 독일 기기의 정직하고 담백한 사운드를 좋아하는 쪽, 미국 기기의 따뜻하고 감성적인 사운드를 좋아하는 쪽. 이용백은 후자다. “흔히 오디오를 얘기할 때 해상력이라는 개념을 말하는데, 저는 해상력보다는 사운드가 전해지는 느낌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래서 미국 기기가 많은 편이에요. 요즘은 다이애나 크롤을 주로 들어요. 한국에서는 나윤선도 좋아하고. 술이 많이 들어가면? 김현식이지. 하하. 지금 이 알텍 스피커는 여성 보컬은 기가 막히게 잡아요. 한번 들어보세요.” 그는 알텍의 스피커로 다이애나 크롤의 노래를 들려주었다. 폭신한 이불에 둘러싸인 것처럼 아늑하기도 하고, 관객 없는 소극장에서 듣는 라이브처럼 아련하기도 했다.
그가 들려준 마지막 얘기는 이렇다. “남자들이 40~50대 되면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잖아요. 그러면 결국 딴짓해요. 그런데 취미가 있으면 쓸데없는 짓을 안 해요. 그래서 취미가 필요한 거죠. 오디오나 낚시가 그래요. 오디오 좋아하는 분들 보면 연배도 높고 재력도 보통이 아니에요. 하지만 이게 너무 좋으니까, 계속 이거에 몰입하는 거죠. 다들 좋은 취미 하나씩 가졌으면 좋겠네요.”

에디터 이기원(lkw@noblesse.com)
사진 노기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