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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와 예찬 사이

ARTNOW

오는 9월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는 개인전 <적군의 언어>를 앞두고,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와 이야기를 나눴다. 작가는 존재의 경계에서 사유하고, 세계의 잔해에서 조각을 꺼내며 인간 이후의 예술에 대해 묻는다. 애도와 예찬 사이, 그가 남긴 흔적은 우리가 ‘끝’이라고 말하는 감각의 바로 옆에 놓여 있다.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1980년생. 아르헨티나 출신 조각가이자 설치미술가로 문명과 유산, 소멸 이후 세계를 탐구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2011년 제54회 베니스 비엔날레 아르헨티나 대표 작가로 선정되었으며, 2012년에는 카셀 도쿠멘타 13에 참가했고 샤르자 비엔날레, 이스탄불 비엔날레, 광주비엔날레 등 주요 국제 무대에서 꾸준히 작품을 선보였다. Photo by Panos Kokkinias, 2017.

오는 9월 3일부터 아트선재센터에서 개인전을 앞두고 있습니다. 전시 제목이 인상적이에요. ‘적군의 언어(The Language of the Enemy)’는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요. 누구를 적군으로, 또 무엇을 언어로 상정한 건가요? 제가 말하는 ‘적군의 언어’는 의미 생성의 깊은 선역사(prehistory)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즉 현생 인류인 호모사피엔스는 상징을 홀로 발명한 존재가 아니에요.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등 인류의 다른 친족과 함께 진화해왔고, 그들과의 만남 속에서 무언가가 우리 사이를 오갔습니다. 그 교류 속에서 상징적 사고의 첫 불꽃, 즉 의미 창조의 시작도 함께 전해졌죠. 그런 의미에서 ‘적군’은 우리 ‘스승’이기도 합니다. 충돌과 공존, 두려움과 매혹 같은 감정의 층위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인류 문화의 기원을 형성했습니다. 전시 제목 ‘적군의 언어’는 바로 그 역설을 담고 있습니다. ‘적’, 즉 완전한 타자성의 표상으로 출현한 존재는 낯설고 위협적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한 최초의 거울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또 다른 문턱 앞에 서 있는 듯해요. 인간이 아닌 새로운 타자, 예컨대 합성 지능이나 행성적 힘을 가진 존재와 마주하고 있죠. 우리는 그들의 언어를 아직 거의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을까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메시지를 어떻게 이어받을 수 있을까요? 이번 작업은 이런 질문을 던지며 시작되었습니다.
미술관 입구를 흙더미로 봉쇄하고, 또 화이트 큐브를 상징하는 벽과 시설물, 안내물을 모두 없앨 계획이라고 들었습니다. 꽤 파격적인 행보라고 생각했어요. 아트선재센터를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보고 접근했습니다. 2년에 걸쳐 건물 전체를 세밀하게 조사했어요. 건축 도면과 구조를 꼼꼼히 검토했고, 전기 콘센트의 기능과 위치까지 점검하며 관람객에게 혼선을 주는 막다른 복도나 동선의 논리도 추적했습니다. 심지어 원래 시멘트 표면을 가리고 있는 드라이월층, 기둥과 보를 감싸고 있는 다층의 마감재까지 살피며 이런 개입이 공간지각과 재료의 진정성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분석했어요. 지하의 시네마 공간처럼, 한국 최초의 퀴어 영화제가 열린 역사적 장소의 음향, 공기압, 그리고 급격히 재개발되는 주변 도시환경과의 관계까지 고민했습니다. 환기 덕트, 창문 배치, 계단 폭, 비상구 사인까지도요. 모든 요소를 단순한 기능을 넘어, 이 건물이 가진 서사의 일부로 보고 그 가능성을 평가했습니다. 덕분에 이번 작업은 단순히 외형을 바꾸는 표면적 접근 방식이 아니라, 미술관의 건축적 · 제도적 DNA에 깊이 스며드는 변형으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는 올해 개관 30주년을 맞이한 아트선재센터가 “미술관이 한 번도 시도해본 적 없는 것”, 즉 ‘불가능한 일’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된 일종의 ‘창’이 열린 시기였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작품을 볼 수 있나요? 아트선재센터를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보고 접근했습니다. 2년에 걸쳐 건물 전체를 세밀하게 조사했어요. 건축 도면과 구조를 꼼꼼히 검토했고, 전기 콘센트의 기능과 위치까지 점검하며 관람객에게 혼선을 주는 막다른 복도나 동선의 논리도 추적했습니다. 심지어 원래 시멘트 표면을 가리고 있는 드라이월층, 기둥과 보를 감싸고 있는 다층의 마감재까지 살피며 이런 개입이 공간지각과 재료의 진정성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분석했어요. 지하의 시네마 공간처럼, 한국 최초의 퀴어 영화제가 열린 역사적 장소의 음향, 공기압, 그리고 급격히 재개발되는 주변 도시환경과의 관계까지 고민했습니다. 환기 덕트, 창문 배치, 계단 폭, 비상구 사인까지도요. 모든 요소를 단순한 기능을 넘어, 이 건물이 가진 서사의 일부로 보고 그 가능성을 평가했습니다. 덕분에 이번 작업은 단순히 외형을 바꾸는 표면적 접근 방식이 아니라, 미술관의 건축적 · 제도적 DNA에 깊이 스며드는 변형으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는 올해 개관 30주년을 맞이한 아트선재센터가 “미술관이 한 번도 시도해본 적 없는 것”, 즉 ‘불가능한 일’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된 일종의 ‘창’이 열린 시기였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Mi familia muerta (My Dead Family), Unfired local clay, rocks. Installation view in the Yatana Forest, 2nd End of the World Biennial, Ushuahia, Argentina, 2009. Photo by Kanye Di Pilato. Courtesy of the Artist.

상상의 종말 I, 2022, 사라짐의 극장, 2017,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 〈Dancing with All: The Ecology of Empathy〉전 설치 전경, 2025. Photo by Jörg Baumann.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rimanzutto.

상상의 종말 VI, 482×420×260cm, 2024, 유기적 디지털 생태계의 실시간 시뮬레이션과 유기물·무기물·인공물·기계 생성 물질이 층층이 결합된 복합체, 2024, 스위스 바젤 바이엘러 재단 미술관 설치 전경. Photo by Jörg Baumann.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rimanzutto.

상상의 종말 III, 유기적 디지털 생태계의 실시간 시뮬레이션과 유기물 · 무기물 · 인공물 · 기계 생성 물질이 층층이 결합된 복합체, 776×448×522cm, 2022, 호주 시드니 뉴사우스웨일스 주립미술관 설치 전경, 2022. Photo by Jörg Baumann. Courtesy of the Artist Marian Goodman Gallery and kurimanzutto.

‘타임 엔진(Time Engine)’이라는 시스템에 관한 작업도 선보인다고 하던데, 이 개념은 무엇인가요? 최근 ‘트라우마 엔진(Trauma Engine)’이라 부르기 시작한 시스템이에요. 가령 ‘ZBrush’, ‘Blender’, ‘Rhino’ 같은 기존 3D 디지털 툴에 대한 불만에서 출발했어요. 이들은 결국 아날로그 시대의 인간 중심 조형 방식을 디지털화한 것에 불과하거든요. 저는 사물을 만드는 툴이 아니라, 세계를 생성하는 시스템을 원했어요. 그렇게 만든 세계에서는 어떠한 한계도 없죠. 강수량, 중력, 대기의 조성, 종의 진화 속도, 심지어 어떤 존재의 손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설정할 수 있어요. 이런 생태계에서는 인간의 의도가 개입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컵이나 시계, 기념비 혹은 우리가 ‘조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또 다르게 탄생하겠죠. 이런 의미에서 타임 엔진은 여러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해줘요.
이전부터 선보인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Mi Familia Muerta’는 작가님과 함께 가장 많이 떠올리는 작품일 거예요. 숲속에 버려진 듯 설치한 대형 고래는 많은 이야기를 상상하게 합니다. ‘내 죽은 가족’이란 뜻이에요. 상실의 크기에 대한 작품입니다. 개인적 차원은 물론, 행정적이고 인류적인 차원까지 아우르는 상실을 이야기하죠. 2009년 당시 ‘숲속에 좌초한 고래’라는 이미지는 거의 실현 불가능한 장면이었어요. 공간과 시간의 논리를 무너뜨리는, 일종의 멀티버스 이미지에 가까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불가능함’이라는 것도 계속해서 무너지고 있어요. 몇 해 전에 실제로 아마존 숲속 깊은 곳에서 고래가 발견된 적이 있거든요. 과거에는 은유적 표현이던 이미지가 예기치 않게 현실이 되어버린 순간이었어요. 저에게 작품 제목은 균열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고래가 내 가족은 아니지만 고래의 멸종, 숲의 소멸, 하나의 세계가 사라지는 일은 결국 우리 삶과도 분리될 수 없잖아요. 서로의 생존과 긴밀하게 얽혀 있으니까요. ‘내 죽은 가족’이라는 제목은 우리가 역사를 만들며 의식하든 못하든 잃어가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조용한 애도였습니다.
유독 이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두드러지는 작업을 전개해왔어요. 2011년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작 ‘The Murderer of Your Heritage’도 빼놓을 수 없죠. 제 작업은 언제나 소멸과 유산 사이의 경계에서 전개됐습니다. 이제 현대미술이 포스트레디메이드, 포스트뒤샹의 전환점을 지나며 점점 막다른 길에 다다르고 있다고 느껴요. 머지않아 우리 현실을 구성하는 모든 조각이 이미 점유되고, 소비되고, 미학화될 것이고, 그 후에는 더 이상 새로운 무언가를 상상하거나 창조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이건 다른 인간 활동의 영역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피로’와도 닮았습니다. 저는 이것을 상상력이 서서히 소진되고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요. 그래서 제 작업은 늘 그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를, 그리고 인류 전체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만약 모든 편견에서 벗어나, 심지어 문화적 맥락조차 없는 시선을 갖게 된다면?’ ‘이미 길이 완전히 끊겨버린 경계에서,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사유할 수 있을까?’ 제가 작업을 통해 말하는 ‘끝’이라는 개념은 세상의 종말이 아닙니다. 그건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인간 문화의 끝’, 우리 세계의 한 국면의 종결을 뜻해요. 지구는 이미 수많은 끝을 겪어왔습니다. 우리가 지금 마주한 상황은,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그다지 특별한 일도 아닙니다. 세계는 이미 여러 번 끝났고, 지금도 행성의 끊임없는 변형 속에서 또 다른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니까요.

The Theater of Disappearance, Reproduction of the legs of David by Michelangelo in carrara marble, nylon-printed kitten figures, floor and ramped platform coated in glossy epoxy paint. Installation view at Kunsthaus Bregenz, Austria, 2017. Photo by Jörg Baumann. Courtesy of the Artist, Marian Goodman Gallery, and kurimanzutto.

Ahora estaré con mi hijo, el asesino de tu herencia (Now I will Be with My Son, The Murderer of Your Heritage), Unfired local clay and cement. Installation view at the Argentinian Pavilion, 54th Venice Biennale, 2011. Photo by Oliver C. Haas. Courtesy of the Artist and Ruth Benzacar Galería de Arte.

El fin de la Imaginación III, Topographic forensic reconstruction of Apollo 11 landing site comprised of layered composites of organic, inorganic, human and machine-made materials including recreation of NASA’s “R5” Valkyrie android with parasitic structures attached; scale reproduction of David by Michelangelo; replicas of Neil Armstrong and Buzz Aldrin’s extravehicular boots, visors, gloves, 16 mm Maurer Data Acquisition Film Camera and 70 mm Hasselblad Data Acquisition Photo Camera; replica of Soviet Luna Probe 2; AK-47 and M16 assault rifles; F1 Grenade; embroidered flags of speculative mergers between nation-states and corporate entities. Installation view, Secession, Vienna, 2024. Photo by Jörg Baumann. Courtesy of the Artist and Marian Goodman Gallery.

The Theater of Disappearance, Nylon-printed and polyurethane cnc-milled reproductions of human and non-human animal figures, food and artefacts from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s permanent collection, coated in bespoke automotive paint, porcelain tiles, diamond plate flooring, hollybush hedges, public bar, signage, benches, adapted and repainted pergola. Installation view, The Roof Garden Commission at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2017. Photo by Jörg Baumann. Courtesy of the Artist.

우리나라에서도 2018년 광주비엔날레에서 GB커미션을 통해 관람객을 만났죠. 그때 선보인 다큐멘터리 필름 ‘The War of the Stars’는 어떤 작품이었나요? 2014년 사무소(SAMUSO)의 초청으로 ‘리얼 DMZ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처음 한국과 인연을 맺었어요. 그때 양지리라는 DMZ 인근 작은 마을을 짧게 방문했고, 그 직후 제 팀원 5명과 함께 한 달간 레지던시를 제안했죠. 그곳은 지역적 · 정치적 · 사회적으로 굉장히 독특한 마을이에요. 주민 대부분이 80세 이상이고, 거의 기록되지 않은 독특한 기억과 정서가 존재하거든요. 그래서 그들을 연극적 실험이자 하이브리드 영화의 일부로 초대하기로 했습니다. 주민을 배우로 섭외하고, 마을 전체를 무대로 삼았죠. 상호 신뢰와 공감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카메라는 양지리의 일상 속 친밀하고 섬세한 순간을 담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완성한 첫 번째 작품이 2017년에 발표한 ‘The Most Beautiful Moment of War’입니다. ‘The War of the Stars’는 1935년 일제강점기에 지은 광주극장을 무대로 촬영한 두 번째 프로젝트예요. 첫 번째 영화를 출발점으로 삼았어요. 기록 속 기록, 이야기 속 이야기, 허구 속 허구가 켜켜이 겹치는, 마치 러시아 인형 같은 영화적 구조를 만들어보고자 한 시도죠. 무엇보다도 첫 번째 영화를 함께 만든 양지리 주민에게 반드시 이 작품을 다시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주민의 연령대와 생활 패턴을 고려할 때, 각자 가장 편한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영화를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나 자신에게 던진 질문은 이것이었어요. ‘이 영화를 어떻게 그들의 삶과 존엄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다시 건넬 수 있을까?’ ‘그들의 방식으로, 그들이 존재하는 공간에서, 그들이 말하는 언어로 다시 보여줄 수 있을까?’ 이 일련의 과정은 단순한 상영을 넘어, 영화와 그 후의 소통을 잇는 경계를 허무는 연속적 작업이 되었습니다. 광주비엔날레에서는 두 작품을 같은 벽 양면에 설치했어요. 물리적으로 분리돼 있지만, 사운드는 완벽히 연결됐죠. 덕분에 관람자는 두 작품을 하나의 연속적 경험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고, 저는 그 구조가 과거 남북 간 소리 전쟁, 즉 심야 라디오방송과 심리전의 방식과도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사르트르는 “우리는 타인이 우리에게 씌운 것을 근본적으로 깊이 거부함으로써 우리가 된다”라고 말했어요. 저는 이 말을 자주 떠올립니다. 언어는 그런 거부와 저항을 소화하는 가장 근본적인 도구라고 생각해요. 타인의 언어를 말할 수 있어야 비로소 자신에게도 말할 수 있고, 모국어의 과거를 이해해야 그 언어의 미래를 열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보르헤스는 이렇게 썼죠. “우리는 이미 지나가버린 존재다.” 우리는 결국 우리의 죽은 자고, 그들은 언어와 이야기 속에 살아 있습니다. 저는 이야기를 믿습니다. 아니, 우리가 이미 내면에 각인한 것들을 넘어설 수 있도록 이야기를 다시 쓸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요.
그간의 작업을 통해 작가님은 디스토피아적 사회를 그려왔어요. 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서 예술의 힘에 주목하게 했죠. 긍정적 에너지를 전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어떠한 상상을 기반으로 작업하나요? 저를 움직이는 건 ‘예술’이 끝나는 지점 이후에 대한 상상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이 아닌 존재나 초인간적 의식만이 접근할 수 있는 예술, 그런 역설적 상태에 가능한 한 가까이 다가가보고 싶어요. 문화도, 인간 중심적 시선도 없는 상태에서 존재하는 주체성 그 자체에 대해 사유하고자 합니다. 지금 질문을 듣고 떠오른 작업이 있어요. 2010년에 만든 ‘Songs during the War’라는 초기 작품인데, 지금까지 작업에서 다뤄온 사유들이 그 안에 응축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이 작품은 짧은 우화 형식을 띠어요. 제가 설정한 가설은 이렇습니다. 인류의 마지막 순간, 지구에 남은 다섯 남녀가 예술 작품을 만들기로 결심한다면 어떨까? 그것은 인류가 남긴 마지막 예술 작품이 될 것이고, 그 의미는 아주 무겁겠죠. 그들의 마지막 예술 행위는 어쩌면 아름답고도 역설적인 선물로 받아들여질 겁니다.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이 공연을 통해 진화 이전, 그러니까 호모사피엔스가 생존자로 결정되기 전 시점으로 실제로 시간 여행을 하고 있다면? 그 여행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고, 그걸 부정할 순 없어요. 시간과 언어, 재현과 의미는 이제 예술을 남긴 마지막 인류의 것이 됩니다. 그렇게 시공간은 마지막으로 섬뜩하고 불협화음 가득한 주름을 드러내게 되죠. 마치 마주 보는 두 개의 거울, 혹은 서로를 향한 두 개의 마이크가 만들어내는 무한한 피드백처럼요. 이 행위를 통해 우리는 결국 인간 중심적 재현 체계와 예술 자체의 끝, 그 궁극적 종착점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현시대 예술가로서 하루를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작업 여부와 무관하게, 삶의 모든 행위에 ‘예술적 태도’가 스며들 수 있다고 보는지요. 최근 몇 년 사이, ‘일’과 ‘자유 시간’의 구분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워졌어요. 저는 그 경계를 본능적으로 거부합니다. 예술가로서 제가 가장 사랑하는 일을 하며 하루를 보낼 수 있는 특권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동시에,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이미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과 기근, 생명을 향한 무관심을 목격하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요. ‘살아 있는 우리에게는 책임이 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 일에 사랑을 담고, 책임감이라는 가치를 지향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에디터 정송(song@noblesse.com)
사진 아트선재센터, 마리안 굿맨 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