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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당신과 나의 이야기

ARTNOW

베를린에서 열리고 있는 오메르 파스트의 전시 <말하는 것이 항상 해결책은 아니다>, 그 생생한 현장을 전한다.

7점의 영상 작품을 통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1CNN Concatenated, 18 minutes, Single Screen, Looped, 2002, Installation View, Wexner Center of Art
2, 3 마르틴 그로피우스 바우 내부 전경과 외관

베를린에 위치한 미술관 ‘마르틴 그로피우스 바우(Martin-Gropius-Bau)’는 1881년 독일의 건축가 마르틴 그로피우스와 하이노 슈미덴(Heino Schmieden)이 설계한 우아한 르네상스 양식의 벽돌 건물이다. 올라푸르 엘리아손, 애니시 커푸어 등 세계적 현대미술 작가의 개인전과 데이비드 보위, 피나 바우슈 같은 영향력 있는 인물을 주제로 한 대형 기획전을 통해 대중에게 잘 알려진 이곳에서는 현재, 비디오 아티스트이자 필름메이커로 각광받는 이스라엘 출신 작가 오메르 파스트(Omer Fast, b.1972)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올겨울 베를린을 비한롯 독일의 여러 지역을 방문 중이던 나는 12월 이곳을 찾았다. 이미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다른 3개의 기획 전시를 둘러본 터라 3층 갤러리에서 열리는 오메르 파스트의 전시장으로 향하는 다리는 천근만근이었다. 사실 전시장에서 필름, 비디오와 같은 미디어 작품을 감상하는 건 약간 고역이다. 영화관처럼 편안한 의자나 시설이 전무한 곳에서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집중력을 발휘해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특히 여러 미디어 작품을 한 번에 봐야 하는 경우에는 엄청난 ‘미술관 피로(museum fatigue)’가 찾아오고야 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전시장의 이런 상황이 ‘불연속적 시간과 공간 예술’인 미디어만의 독특한 성격을 더욱 확실하게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전시장에서 관람자는 작품과 작품 사이를 이동하면서 작품 속에서 연속적이지 않은 여러 단서를 발견하고 그들의 관계를 맞춰간다. 꿈을 꾸듯 어두운 전시장을 유영하는 관람자는 앞에 펼쳐진 환상을 탐닉하다 현실로 돌아오고, 다시 다른 꿈을 꾸는 과정을 반복한다. 꿈속의 서사는 처음과 끝이 직선으로 명확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이미지로 각인되다 한순간 사라지는 미디어 작품이 돌아가는 전시장은 이렇듯 환상과 실제, 현실과 비현실이 엉켜 있는 공간이다.

45000 Feet is the Best, 30 Minutes, Single Screen, Looped, 2011
5 이스라엘 출신 작가 오메르 파스트

‘말하는 것이 항상 해결책은 아니다’라는 제목의 회고전 형태를 띤 이 전시는 베를린에서 열리는 오메르 파스트의 첫 개인전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제작한 총 7점의 비디오 작품을 상영하고 있다. ‘연결된 CNN(CNN Concatenated)’(2002년), ‘신에게 아름답게 보이려면(G.W. 이후)(Looking Pretty for God(after G.W.))’(2008년), ‘5000피트가 최적이다(5000 Feet is the Best)’(2011년), 연‘속(Continuity)’(2012년), ‘오르다보면 한곳으로 모이게 마련(Everything That Rises must Converge)’(2013년), ‘봄(Spring)’(2016년), ‘아우구스트(August)’(2016년)가 그것이다. 오메르 파스트는 이 미디어 작품 7점을 대형 프로젝션 룸 네 곳과 진료 대기실, 공항 라운지, 출입국관리소 등 세 곳에 배치해 독특한 동선을 완성했다.
그의 유명한 초기 작품 ‘연결된 CNN’은 일종의 푸티지 몽타주(footage montage) 필름이다. 푸티지몽 타주는 크리스천 마클리(Christian Marclay)의 ‘전화(Telephone)’(130여 편의 영화 속에서 전화를 거는 소리, 전화벨 소리, 전화를 받는 소리, 대화하는 소리, 전화를 끊는 소리 등 전화와 관련된 소리만 뽑아내 재편집한 영상)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오메르 파스트는 2001년과 2002년에 미국 TV 뉴스 채널 CNN에서 앵커, 리포터,기자 ,기상예보관의 뉴스 해설 장면을 단어별로 잘게 자르고 다시 이어 붙여 7개의 새로운 모놀로그를 만들었다. 새롭게 조합한 내용은 뉴스 방송과 달리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나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등 개인의 상태나 감정을 묘사한 문장. 이러한 개인적 서사는 2001년부터 2년간 테러와 아프가니스탄 사태 등 미국의 안보 문제를 다룬 뉴스 하단에 적힌 헤드라인 문구들과 상당히 대비된다. 24시간 실제 대중에게 일방적으로 끊임없이 전달된 수많은 뉴스는 어떤 진실을 중재하고 있는지, 그 속에서 언론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6 August, Single Screen, 3D Projection, 2016
7 마르틴 그로피우스 바우의 입구

오메르 파스트는 “나는 경험이 기본적으로 기억으로 바뀌는 방식에 관심이 있다. 그 기억은 이야기가 되고, 녹음되고 방송되면서 조정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연결된 CNN’ 작품을 통해 드러난 개인과 전체, 기억과 경험의 조정은 2011년 작업한 작품 ‘5000피트가 최적이다’에서 한층 심화된다. 2011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상영한 약 30분 길이의 이 필름은 미국 무인 항공기 조종사의 인터뷰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라스베이거스의 한 호텔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조종사는 카메라가 켜져 있을 때에는 자신의 일상과 무인 항공기 업무의 기술적 측면에 대해 설명하지만 카메라가 꺼지면 무인 항공기가 무장 세력과 민간인 모두에게 총격을 가한 사건과 그로 인한 자신의 심리 상태를 얘기한다. 극영화 촬영 장면과 홈 비디오 촬영 장면, 적외선 촬영 장면, 어두침침한 호텔 내부 공간과 불빛 가득 한 라스베이거스의 상공 등을 오가며 다큐멘터리와 픽션이 얽힌다. 또한 플래시백을 통해 장면이 전환되는 중간에 진행한 인터뷰에서 조종사는 같은 내용을 조금씩 다르게 말하며 자신의 기억을 조정한다.
비디오 작업을 주로 해온 오메르 파스트는 점점 완성된 극영화의 형식을 차용했다. 파스트의 작품 중 대중에게 가장 익숙한 ‘연속’은 전형적인 가족 드라마 형식으로 전쟁터에서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독일인 부부가 등장한다. 부부는 차를 몰고 역으로 가서 오랫동안 기다려온 아들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와 일상을 보낸다. 평범한 가족 드라마가 이상한 상황극이 되는 시점은 그 밤을 보낸 직후다. 부부는 다시 아들을 만나러 역으로 떠난다. 이들은 다른 아들을 맞이하는 동일한 과정을 영화 속에서 세 번 반복한다. 아들을 잃은 슬픔을 잊기 위해 부부가 주문한 일종의 롤플레잉 게임일까?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각자 트라우마에 의한 환각을 겪는다. 아들 역할을 하는 젊은 남자들뿐 아니라 부부 역시 차를 타고 아들을 만나러 가기 전 길가에서 낙타를 만나기도 하고 사망한 병사들을 목격하기도 한다.
이번 전시에선 작품 ‘연속’과 연결된 최근작 ‘봄’을 함께 상영했다. ‘봄’에는 ‘연속’에 나온 중년의 부부가 고용한 새로운 2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IS 선전 영상을 줄기차게 시청하는 소년, 군대 내 성폭력에 대한 트라우마적 환각을 겪고 있는 남창이 주인공이다. 한 화면에 5개의 분리된 영상이 다양한 배열로 이어지는 ‘봄’은 같은 상황에 놓인 인물들의 각기 다른 시점을 함께 제시하거나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플래시백을 자유자재로 배치한다. 두 작품은 모두 현대사회에서 벌어진 전쟁을 겪은 개인의 정신적 외상에 대해 탐구한다. 이들은 종종 기억이 흐려지고 현재의 일에 과거의 기억을 이어 붙인다. 과거로 회귀하는 기억은 현재의 삶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줄곧 같은 곳에서 반복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익숙한 중산층 가정이 등장하는 TV 드라마 형식에 불합리하고 반복적인 음모와 초현실적 서사가 얹히면서 영화 속 인물들이 느끼는 근친상간, 동성애 공포증, 죽음과 외로움 같은 어지러운 감정과 공포 속으로 관람객을 밀어넣는다.

8Spring, 44 Minutes, Five-Screen Projection, Looped, 2016
9Looking Pretty for God(after G.W.), 28 Minutes, Single Screen, Looped, 2008
10Continuity, 40 Minutes, Single Screen, Looped, 2012
11Everything That Rises must Converge, 56 minutes, 4-Channel Video, Looped, 2013

그의 작품엔 특별한 직업에 몸담은 이들의 삶이 자주 등장한다. 2008년에 제작한 ‘신에게 아름답게 보이려면(G.W. 이후)’은 장례식 감독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개인이 생에서 누리는 마지막 행사를 준비하는 전문가인 장례식 감독은 메이크업, 상담, 이벤트 등의 일을 진행한다. 2013년에 제작한 ‘오르다 보면 한곳으로 모이게 마련’은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포르노 배우 4명의 일상을 24시간 촬영한 4채널 비디오 작품이다. 그들이 아침에 일어나 포르노 세트장에서 만나 촬영한 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에 추가로 허구의 인물을 등장시켜 새로운 이야기로 묶는다. 시체를 더 생생하게 보이게 하는 메이크업을 설명하는 장례식 감독, 섹스와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설명하는 포르노 무비 감독은 일종의 예술적 탐구처럼 비친다.
마지막으로 작년에 제작한 ‘아우구스트’는 오메르 파스트가 3D 촬영을 시도한 첫 번째 영화다. 독일 사진작가 아우구스트 잔더(August Sander, 1876~1964년)의 노년이 이야기의 무대다. 바이마르공화국 시기 독일인을 유형학적으로 분류한 인물 사진으로 알려진 잔더는 영화 속에서 늙고 병든 장님이 되었다. 그의 사진 속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피사체는 사진가인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영화 속 잔더는 이제 상대방을 보지 못한다. 사진 작업 시 피사체와 카메라 사이의 간격을 밧줄로 세심하게 맞추던 그는 이제 어두침침한 집 안 곳곳을 연결하는 밧줄을 잡고 공간을 이동할 수 있을 뿐이다. 나치 장교에게 아들의 죽음을 전해 들은 이후 그는 죽은 아들과 자신이 촬영한 인물들의 유령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밧줄로 연결된 집 안 곳곳에서 나이 든 잔더의 느릿느릿한 몸짓과 과거 촬영 당시의 반한듯 모습이 대비되고, 과거에서 출몰하는 기억의 유령을 3D 화면을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우리가 스트립쇼에 가는 이유는 단지 벗은 사람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죠. 일종의 변신이라고 할까. 나는 벌거벗은 진실, 벌거벗은 퍼포머에겐 관심이 없습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에 대한 진실에는 관심이 없어요. 나는 우리가 마스크를 쓰고 있다는 사실, 마스크를 쓰고 걸어 다니다 무대에 불려 나온 유령이라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오메르 파스트의 작품에 등장하는, 전쟁과 테러 같은 집단적으로 충격적인 사건 이후 트라우마를 갖게 된 개인은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다. 이들의 내면에는 자신의 기억을 기술하고 현재의 정보를 덧붙여 만들어낸 기억과, 현재로 소환된 과거의 환영이 만들어낸 초현실이 엉켜 있다. 그는 이러한 복잡한 서사를 말하고 소통하는 것을 주저하는 개인을 작품에 드러낸다.

 

에디터 김이신(christmas@noblesse.com)
류정화(전시 기획자)  사진 제공 마르틴 그로피우스 바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