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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퓨머 에이치의 새로운 둥지

BEAUTY

세계적 조향사 린 해리스가 장인정신으로 빚어낸 향의 풍경, 이제 서울에서 만나볼 차례다.

퍼퓨머 에이치의 국내 첫 플래그십 스토어. 영국의 헤리티지와 한국적 감성이 어우러졌다.

영국 럭셔리 니치 퍼퓸 하우스 ‘퍼퓨머 에이치(Perfumer H)’는 독창적 스타일을 고수하며 21세기 하이엔드 향수 브랜드의 새 기준을 제시한다. 퍼퓨머 에이치 서울 스토어 오픈을 기념해 방한한 린 해리스(Lyn Harris)를 만나 그가 그리는 향기의 풍경을 들어보았다.

한국 플래그십 스토어 오픈을 준비하는 데 2년이 걸렸는데, 소감이 궁금하다. 개인적으로도 브랜드로서도 큰 도전이지만, 모든 준비 기간이 마법처럼 아름다웠다. 위치 선정부터 준비 기간 전 과정에 몰입해 완성한 만큼 모든 것이 나의 손길을 거쳤다고 할 수 있다. 전달하고자 하는 많은 메시지를 담은 공간인 만큼 이곳을 방문하는 분들은 나의 진정성을 온전히 느낄 것이다.
1992년 파리 조향 학교에서 조향을 시작해 LVMH 인하우스 퍼퓨머로 활동하다 2000년 첫 향수 하우스 밀러 해리스(Miller Harris)를 창립하고, 2015년 퍼퓨머 에이치를 론칭했다. 이처럼 조향사로서 묵묵히 걸어온 길 끝에서 당신만의 독자적 브랜드 퍼퓨머 에이치를 완성했을 때, 이전과 분명 달라진 점이 있을 것 같다. 퍼퓨머 에이치에 담고자 한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기존 상업적인 방식에서 벗어나고 싶어 만든 것이 퍼퓨머 에이치다. 밀러 해리스를 떠난 뒤 2년 정도 준비 기간을 거쳤는데, 그동안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브랜드를 구상했다. 그러다 하루는 집 안에 있던 유리병이 예뻐 살펴보니 병 밑에 마이클 루(Michael Ruh)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병을 만든 사람이 누구일까’ 하는 궁금증에 만남을 요청했고, 그다음 주 그를 만나 퍼퓨머 에이치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우린 아름다운 유리병을 향수에 어떻게 접목할지 논의했고,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조향사로서 지속 가능한 방식을 함께 고민하기도 했다. 결국 마이클 루의 유리병은 리필 가능하도록 제작해 평생 소장할 수 있는 향수병으로 탄생했다.
퍼퓨머 에이치는 올해 론칭 10주년을 맞았다. 지난 10년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나 성취가 있다면? 퍼퓨머 에이치의 첫 스토어를 오픈하던 순간을 꼽고 싶다. 커리어의 가장 큰 전환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기존에 뮤직 숍으로 운영되던 공간이라 스피커 등 음향 시스템이 좋았고, 약재상이 연상되는 캐비닛과 향수병을 놓으니 꽤 잘 어울렸다. 그런 올드 스쿨적인 부분과 직접 찾아오는 경험을 강조하고 싶어 당시에는 온라인 판매를 하지 않았고, 그 덕분에 고객과 더 가까이에서 소통할 수 있었다.
지금도 포뮬러를 직접 개발하고 원료를 관리한다. 조향 철학에 대해 설명해달라. 요즘 대부분의 향수는 향이 매우 강한 데다 마케팅적으로 강렬하게 접근한다. 퍼퓨머 에이치는 향수를 사용하는 사람뿐 아니라 그 옆에 있는 사람까지 같이 향을 즐기도록 은은하면서 잔잔하게 만든다. 우리는 너무 강한 향으로 공간과 주변을 가득 채우거나 다른 사람의 향과 섞이는 것을 지양한다. “이게 무슨 향이지?” 하고 자연스럽게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싶다. 또 그라스에서 배운 전통적 조향 방식을 고수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온전히 자연 원료로만 향을 표현하기는 어려운 만큼 과학을 통해 나만의 포뮬러를 만들고 있다. 이미 개발된 원료 조합으로 향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오래 걸리지만, 나만의 스타일로 향을 만들기 위한 필수 과정이다. 마치 옷을 디자인하는 것처럼 디테일이 중요하다.
영감의 원천은 무엇인가? 사람들을 만나 어떤 식으로 삶을 살아가는지 이야기를 나누며 에너지를 얻고, 그것을 통해 많은 영감을 얻는다. 특히 아티스트나 공예가와 협업하며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경험을 중시한다.

퍼퓨머 에이치 창립자 린 해리스.

도산공원이 내려다보이는 2층 공간은 티는 물론 퍼퓨머 에이치의 미각적 감각이 담긴 다양한 식료품도 선보일 예정이다.

돌, 물, 곡선 등 목욕과 휴식을 상징하는 요소가 매장 전반에 스며들어 있다.

5 퍼퓨머 에이치는 향수와 캔들, 인센스, 티, 룸 스프레이 등 다양한 제품을 통해 향 중심의 ‘데일리 리추얼’을 제안한다.

그래서 유리공예가, 도예가 등 각 분야의 크리에이터와 협업하고 있나? 그렇다. 아티스트와 함께 커뮤니티를 이루는 걸 중요하게 생각한다. 향수병을 만든 유리공예가 마이클 루를 비롯해 정물화 작가 윌 카버(Will Calver)는 퍼퓨머 에이치만을 위한 그림을 제작하고 있다. 목공예가 보비 밀스(Bobby Mills)의 가구는 세계 여러 매장에서 전시되며 시그너처 그릇도 함께 선보인다. 인센스는 교토에 있는 장인과 협업했다. 아티스트와 협업한 제품은 내일 당장 배송하긴 어렵지만, 오히려 그 기다림 속에서 제품을 받았을 때 기쁨이 배가된다. 나 역시 매장에 놓인 보비 밀스가 만든 의자를 받기 위해 2년을 기다렸다. 그래서인지 그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거나 책을 읽을 때 더 큰 행복을 느낀다. 조금 기다리면 어떤가. 퍼퓨머 에이치의 고객도 나와 같은 경험을 하면 좋겠다. 새롭게 오픈한 서울 플래그십 스토어를 위해 한국 작가와도 협업했나? 영국 감성과 한국 전통의 자연스러운 조화를 눈여겨봐달라. 우선 이 건물은 착착스튜디오팀과 함께 완성했다. 어두운 고동색 외벽에도 브랜드의 감성이 잘 드러나 있다. 램프 등 금속공예가 김동규 작가의 기물을 곳곳에서 볼 수 있고, 커튼은 모시와 삼베, 무명 같은 전통 섬유를 바느질 작업하는 최희주 작가가 만들었다. 앞으로도 한국 작가들과 꾸준히 협업할 계획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가 꼭 보고 느껴야 할 것이 있다면? 향기와 라이프스타일이 어우러진 공간, 진정한 안목을 지닌 이들을 위한 장소라고 말하고 싶다. 퍼퓨머 에이치가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고,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를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연결돼 영감을 주고받는 커뮤니티가 형성되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또 이번 플래그십 스토어의 테마는 ‘목욕(Bathing)’이다. 창가에는 조각가 엘리 브라운(Ellie Brown)의 물 흐름 조형물을 설치하고, 곳곳에 스톤 싱크대와 스틸 선반을 배치했다. 2층에는 티 공간을 마련했다. 내가 블렌딩한 티 셀렉션과 잼, 오일 등이 있으며 다양한 작가와 협업한 제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자신만의 리추얼을 중요시하는 시대다. 린 해리스의 데일리 리추얼도 공개할 수 있나? ‘천천히’의 미학을 중요시한다. 사실 오늘 아침 좀 늦게 일어나 전화를 많이 받았다. 살짝 늦었음에도 내 방식대로 하루를 시작했다. 차를 내려 마시고, 인센스를 피운 뒤 잠깐 자리에 앉아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입은 옷을 만지며 질감을 느끼는 등 아침을 여유롭게 시작하는 편이다.
최근 가장 인상 깊었던 향은? 개인적으로는 비 내릴 때 나는 향을 좋아한다. 2주 전 오스트리아에 갔을 때 여전히 여름이던 영국과 비교해 날씨가 갑자기 춥게 느껴졌다. 비도 많이 내렸는데, 그때 나던 공기 냄새가 인상 깊었다.
10월, <노블레스>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은 향수가 있다면? 새로 출시되는 ‘로즈 위드 인섹(Rose with Insect)’을 추천한다. 실제로 장미 원료가 함유돼 있진 않지만, 예전에 선물 받은 그림 속 장미에서 영감받아 상상 속 장미 향을 구현했다. 시들어가는 장미에 벌레가 꼬인 장면을 형상화한 향으로, 불완전함 속에서 찾은 아름다움을 그려보았다.
린 해리스가 정의하는 ‘향기’란 무엇인가? ‘자연과 아름다움, 그리고 기쁨을 주는 것’. 예술은 개인에게 행복을 안겨준다. 그런 의미에서 조향도 예술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에디터 김현정(hjk@noblesse.com)
사진 조정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