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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 아닌, 영화여야 하는 이유

LIFESTYLE

증권사 애널리스트라는 특이한 이력을 지닌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의 최재원 대표는 언젠가부터 한국 영화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됐다. 1990년대 후반, ‘콘텐츠’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무렵 시작된 그의 드라마틱한 영화 인생 이야기.

한국 영화의 흥행 결과는 대부분 개봉 첫 주말에 결판난다는 말이 있다. 입소문으로 장기 흥행을 이어가는 작품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개봉 직후 관객 수로 성패를 결정지을 수 있다는 말이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를 방문해 최재원 대표를 만난 건 <싱글라이더>가 개봉한 다음 주 화요일. 그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내심 궁금했다. 한국 시장에 로컬 프로덕션을 세우고 투자한 첫 작품 <밀정>으로 성공적 출발을 알린 워너브러더스는 뜻밖에도 두 번째 작품을 신인인 이주영 감독과 제작했다. <싱글라이더>는 최근 한국 영화계에서 보기 드문, 한 남자의 감정선을 잔잔하게 따라가다 큰 반전을 제시하는 신선한 작품이다.
“상업적으로는 실패했죠.” 그는 첫마디부터 담담하게 ‘실패’라는 단어를 꺼내놓았다. 그러나 한두편으로 끝낼 일이 아니니 일희일비할 일은 아니라고. “워너브러더스에는 큰 의미가 있는 영화예요. 대자본을 투자한 <밀정> 이후 20억 원대 초반 규모의 작은 영화 <싱글라이더>를 선보였으니 우선 넓은 스펙트럼을 펼쳐놓은 셈이죠. 앞으로 그 안에 워너브러더스가 지향하는 다양한 작품을 채워갈 겁니다.” 영화계에서 20년 가까이 투자, 제작, 배급을 두루 경험해온 이의 내공일까. 그는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에서 그려나갈 큰 그림에 대한 자신감을 내비친다.
워너브러더스가 한국 진출을 계획하며 다양한 경험을 갖춘 그에게 손을 내민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증권사 애널리스트 출신인 그는 벤처 캐피털 회사에서 근무하다 영화 투자를 추진했고, 30대 초반인 1999년에 직접 영화 펀드를 만들었다. 그것이 한국의 영화 펀드 1호로 꼽힌다. 봉준호 감독의 상업 영화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가 그의 첫 번째 투자작. 이후 아이픽처스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영화 투자자의 길을 걸었다. 그가 선택한 작품이 늘 좋은 결과를 낳은 건 아니었다. 회사 문을 닫아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금융계로 돌아간다면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으리란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건 영화를 매개로 수많은 사람과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 “벤처 투자로 성공하면 큰돈을 벌 수 있죠. 50억 원을 투자해 5000억 원을 번 적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건 주식을 가진 사람들만의 성과예요. 영화는 극장에 걸리는 순간 수십만 명에서 수백만명이 시간을 공유하고 즐거움과 위로를 나눕니다. 그게 재미있고 보람이 느껴졌어요.” 그렇게 금융계에서 영화계로 완전히 방향을 튼 뒤에도 그의 여정은 변화무쌍했다. 2005년에는 바른손 영화사업본부를 맡으면서 제작자로 변신했는데, 처음으로 제작한 영화가 임필성 감독의 <헨젤과 그레텔>이었다. 이후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놈놈놈)>, 봉준호 감독의 <마더>로 연이어 성과를 냈다. 투자와 제작을 거친 뒤에는 NEW에 합류해 배급사도 이끌었다.
지금까지 최재원 대표의 손을 거친 영화는 50편이 넘는다. 투자작 중 손에 꼽는 영화는 2003년에 개봉한 <장화, 홍련>. 배우 임수정과 문근영이 당시 신인이었기에 다른 투자자는 성공을 자신할 수 없다며 떠났고 투자액을 혼자 감당해야 했다. 그 영화가 성공을 거두자 그는 스태프들에게 수익에 대한 인센티브를 주며 성과를 나눴다. 그게 지금도 한국 영화계에 전설로 남아 있는 인센티브다. “영화인으로 살게 해주고, 영화에 대한 제 태도를 만들어준 작품이에요. 서로에게 고마워하며 작업하는 영화인들의 태도가 참 아름다웠어요. 김지운 감독이나 스태프들과의 그런 인연이 <놈놈놈>으로 이어졌습니다.” 또 한 편의 ‘인생 영화’는 그가 위더스필름 대표로 제작한 양우석 감독의 <변호인>. 영화 인생이 끝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만든 작품이었다. 물론 그로 인해 여러 가지 불편한 일도 겪었지만 흥행 결과는 엄청났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의 제안을 받은 건 2014년, 여전히 ‘<변호인> 제작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닐때였다. “처음에는 거절하려 했어요. 그런데 대체 어떤 회사길래 90년간 건재하며 전 세계를 무대로 영화 사업을 하는 건지 궁금하더군요. 또 해외에서 한국에 들어오는 양질의 영화 자본이 제대로 쓰여야 한다는 생각도 했죠. 그래서 한번 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2015년 초에 취임했으니 이제 2년이 넘은 시점. 그렇다면 워너브러더스의 내부로 들어가 경험해본 시스템은 어떨까? “창작자에 대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작업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에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워너브러더스가 백지수표를 건넬 만큼 오랜 시간 믿고 작업해온 감독이죠. 창작에 대한 지원을 충실히 해주고 그 결과를 기다리는 성숙한 태도가 있어요. 대신 한번 결정한 스케줄과 예산에 대해서는 타이트한 관리가 들어갑니다. 이런 할리우드의 방식이 한국화되는 과정을 통해 한국 영화의 제작 환경이 발전할 수 있다면 그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신인 감독을 발굴하는 데 적극적이라는 점도 그가 보고 느낀 워너브러더스의 철학이다. 그 역시 제작자로서 쌓은 경험과 네트워크 덕분에 신인 감독과의 작업을 망설이지 않는 편. 선배로서 작업의 효율성이나 작품의 완성도에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하곤 한다. 앞으로 외화 라인업 외에 매년 4~5편 정도 꾸준히 의미 있는 한국 영화 라인업을 만들어갈 예정이다. 올해는 장동건과 김명민이 출연하는 박훈정 감독의 와 이정범 감독의 <악질경찰>을 준비 중이고, 그 이후 작은 영화를 두 편 정도 더 내놓을 계획. 내년에는 김지운 감독이 <밀정> 이후 다시 워너브러더스와 손잡고 만드는 <인랑>을 만날 수 있다. “오늘 아침에 본사와 콘퍼런스 콜을 하면서 제가 이런 말을 했어요. <싱글라이더>의 관객 수는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이 작품이 한국 영화계에서 지니는 의미는 작지 않다고 말이죠. 앞으로도 그런 작품을 하려고 해요. 워너브러더스가 미국 회사지만 한국의 영화인에게 ‘좋은 파트너’가 되길 바라고 그런 역할을 계속해나가려고 노력할 겁니다.”
최재원 대표는 개인적인 꿈 하나를 이야기했다. 투자와 제작, 배급을 해봤으니 마지막으로 연출을 한번 해보고 싶다고.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데 그 작품이 탄생한다면 송강호를 포함해 지금까지 막역하게 지내온 영화인들이 함께 참여하는 영화가 될 것이다.
“영화를 통해 받은 게 많아요. 현장 출신도 아니고 영화를 잘 모르던 젊은 사람을 영화계가 받아줬고, 여기서 버티게 해줬어요. 투자할 때 쌓은 믿음 덕분에 좋은 감독, 좋은 스태프와 작업할 수 있었고 그만큼 좋은 경험치가 쌓였죠. 모든 것이 선순환됐어요. 현업에서 떠나는 날이 오더라도 영화를 통해 얻은 것을 돌려주는 일은 평생 해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면 워너브러더스 코리아의 행보는 물론, ‘공감’의 힘에 매료돼 영화인으로 살고 있는 최재원 대표의 행보도 주목해야 할 것 같다. 믿고 선택하는 감독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말이다.

 

에디터 안미영(myahn@noblesse.com)
사진 안지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