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세상의 끝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에 다녀왔다. 초록이 넘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르름이 가득한 노르웨이에. 평일 저녁 7시만 돼도 거리가 한산했는데, 모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스칸디나비아반도 북서부에 위치해 1년의 절반 이상이 추운 겨울이지만 한겨울에는 오로라가 하늘을 물들이고 5월부터 7월까지는 백야 현상이 이어진다. ‘행복 지수’조차 논하지 않는 그곳에서 끝을 알 수 없는 행복감을 느끼고 왔다.

하이테크 세라믹 스칸디나비아반도 북서부에 위치한 노르웨이. 5월부터 7월까지는 백야 현상이 이어져 맑고 청명한 날씨를 만날 수 있다.
Honest, Pure, Raw.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 가르데르모엔 공항에서 처음 만난 세 단어다. 그 어떤 장식이나 팻말 없이 잎사귀로 덮인 푸른 벽에 ‘Honest, Pure, Raw’를 말갛게 써놓았다. 노르웨이의 첫인상은 정직하고 순수하고 날것 그대로였는데, 그곳에 머문 마지막 날까지 그 감상은 변하지 않았다.
북유럽 여행을 계획하고 1순위로 삼은 후보지는 핀란드였다. 2순위는 덴마크. 노르웨이는 3순위는커녕 후보지에도 없던 곳인데, 수직으로 떨어지는 절벽 플레케스톨렌(Preikestolen)을 보고 마음이 동했다. 저 산을 오르면 어떤 기분일까. 또 하나 동기부여가 된 건 좋아하는 아티스트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Kings of Convenience)’의 고향이라는 소식! 포크와 팝을 넘나들며 주옥같은 가사 사이사이로 흐르는 기타 연주. 이런 노래를 만드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환경에서 나고 자란 걸까? 그 두 가지 호기심을 안고 노르웨이로 떠났다.
여정은 수도 오슬로에서 시작해 북서쪽으로 올라간 뒤 다시 남서쪽으로 내려와 완전히 한 바퀴를 도는 코스였다. 매일 차를 타야 했고, 조금 두려운 야간열차 일정도 포함돼 있었다. 해외로 여행을 가면 숙소 이동은 최소화하고 일주일 내내 짐을 풀고 퍼져 있길 좋아하는 내게 이번 여행은 짐을 싸고 떠나고 짐을 싸고 떠나고의 반복이었다.
그럼에도 매일 행복했다. 차창 밖으로 바뀌는 풍경이 그러했고, 우리의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가 다르듯 노르웨이 또한 동서남북 모두 다른 분위기와 향기를 품고 있었다. 먼저 동쪽에 위치한 오슬로는 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도시 1위로 꼽히는 곳. 노르웨이 남부 해안에 위치한 오슬로는 경제와 정치의 중심지로 노르웨이 왕궁부터 오페라하우스, 바이킹족의 후예가 살아 숨 쉬는 요새가 공존한다. 북유럽 디자인 숍이 즐비한 메인 스트리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14세기 게르만족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요새가 나오고,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의 미술관이 나타난다. 북유럽 하면 흔히 생각하는 특유의 ‘을씨년스럽고 쓸쓸한 분위기’일랑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곳곳에 따뜻함이 가득했다. 서유럽처럼 화려하고 컬러풀하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자연에 모든 걸 내주고, 때론 자연의 힘을 빌려 초록과 여유가 넘치는 모습으로 행복을 전해줬다.

1 노르웨이의 3대 트레킹 코스 중 하나인 트롤퉁가. 마치 괴물의 혓바닥처럼 툭 튀어나온 절벽이 이색적이다. 2 노르웨이 북부 지역에서 만날 수 있는 오로라. 특히 트롬쇠 지역이 유명하다.
오슬로에서 느낀 감동을 뒤로하고 북쪽으로 떠났다. 노르웨이 여행의 베스트 핫 스폿으로 알려진 피오르(fiord)를 보기 위해. 빙식곡이 침수해 생긴 좁고 깊은 후미인 피오르는 그린란드, 알래스카, 칠레 등의 해안에 널리 발달해 있는데 그중 으뜸으로 꼽히는 곳은 노르웨이의 송네 피오르다. 그 길이만 204km에 달하는 이 피오르 구간은 빙하가 만든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여행지’로 꼽힌다. 3시간 동안 페리를 타고 협곡 사이를 오가며 그 절경을 보았고, 협곡 길을 따라 밤새 차를 달리면서도 온몸으로 느꼈다. 초록과 파랑, 이 두 가지 색을 빼고는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는 듯 청명한 색깔이 마음을 시원하게 해줬다.
며칠간 대자연의 품에 있다 오슬로에 이어 노르웨이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베르겐으로 향했다.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배경지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이 도시는 중세 도시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브뤼겐(Bryggen) 역사지구’에 옛 목조 건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그 가옥 앞으로는 보겐 항구가 자리한다. 1년의 3분의 2가 우기지만, 촉촉한 날씨마저 운치 있게 다가온다. 베르겐은 <겨울왕국>보다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의 고향으로 더 와 닿았는데, 짐을 내리고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나니 뮤지션의 음악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유와 낭만’ 같은 단어로는 설명할 길이 없는, 대자연의 품에서 싹튼 아기자기한 감성이 인디 팝을 촘촘하게 채워줬다.
여행 내내 <단지 세상의 끝>이라는 영화 제목이 떠올랐다. 도시화됐지만 아직은 때 묻지 않은 곳, 세상의 끝 북쪽 어딘가에 조용히 자리한 미지의 섬 같은 느낌. 이런 감정은 단순히 감성적으로만 와 닿은 생각은 아닌데, 노르웨이는 유럽 최대 산유국이지만 자국에서 나는 기름은 모두 수출해 지금까지도 깨끗한 환경을 유지하고 있다. 대신 수력과 풍력으로 에너지를 생산하고, 국영기업에서 수출한 기름은 국부 펀드로 모아 후손들에게 물려준다. 산유국임에도 전 세계에서 인구당 전기 자동차 보급률이 가장 높은 나라이기도 하다. 2025년부터는 내연기관 자동차 판매마저 금지하는 방안을 준비 중이라고. 마치 ‘엄친아’처럼 부와 여유를 다 갖춘 이 나라는 똑똑하게도 자연의 아름다움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부를 축적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천혜의 환경을 안고 태어났지만 언제나 자연에 감사하며 친구, 가족처럼 주변을 돌보고 아끼는 사람들. 도시나 시골 어디에 가도 느낄 수 있는 짙은 푸르름은 산유국의 부를 넘어선 여유로 다가왔다.
단지 세상의 끝에 다녀왔지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이다.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이 그랬고, 순간순간 마주한 풍경이 매일 새로운 생각을 안겨줬다. 노르웨이의 옆 나라 덴마크의 ‘휘게 라이프’까지는 아니더라도 ‘퀵퀵 슬로’ 삶에서 ‘슬로, 슬롤리(Slowly)’로 템포로 바꿔줬으니까. 그렇게 세상의 끝에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다.
From Norway’s Pick
알고 보면 노르웨이 태생. 음악, 문화, 예술을 넘나들며 우리가 잘 몰랐던 노르웨이 출신 몇 가지를 소개한다.

1 Music_ Kings of Convenience
노르웨이 제2의 도시로 꼽히는 베르겐 출신의 인디 팝 밴드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 1999년 데뷔 이래 현재 3집 앨범까지밖에 내지 않았지만 그 파워는 막강하다. ‘Homesick’, ‘I’d Rather Dance with You’, ‘Cayman Islands’ 등 국내에도 다수의 CF에 삽입곡으로 쓰여 이름을 알렸다. 싱어송라이터 남성 듀오가 빚어내는 보컬과 기타, 피아노 연주를 통해 북유럽 감성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2 Art_ Edvard Munch
노르웨이 뢰텐 태생인 에드바르 뭉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처럼 뭉크 하면 ‘절규’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무서우면서도 왠지 유머러스함이 느껴지는 ‘절규’는 실제 ‘공포’로 가득 찬 삶을 살아온 뭉크의 감성이 녹아든 작품. 어린 시절부터 몸이 허약했던 그는 잔병치레가 잦았고 어머니, 누나의 죽음을 연이어 겪으며 늘 공포와 걱정 속에서 살았다. 뭉크의 작품은 노르웨이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데, 오슬로에 위치한 뭉크 미술관(Munch Museum)과 오슬로 국립미술관(Oslo National Gallery)에서 관람 가능하다.
3 Food_ Mr. Lee
이역만리에서 이(李) 가를 만났다. 노르웨이 라면 시장을 제패한 ‘미스터리(Mr. Lee)’가 그 주인공. 한국인 이민자 이철호가 만든 ‘미스터리’는 노르웨이 라면 시장을 독점, 어디에서든 만날 수 있는 국민 브랜드가 됐다. 귀엽게 웃고 있는 한국인을 캐릭터화한 패키지 전면에 아주 작게 ‘소고기 맛’, ‘닭고기 맛’이라는 한국어를 써놓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한국에서 판매하는 라면보다 조금 싱거운 느낌이 들지만 아름다운 풍경 덕분에 그 밍밍함도 새로운 맛으로 승화된다.
4 Place_ Nobels Fredssenter
6개 부문으로 나뉜 노벨상 중 평화상은 노르웨이에서 시상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시상식은 매년 노벨의 사망일인 12월 10일 노르웨이 오슬로 시청에서 열린다. 오슬로는 이를 기념해 2005년 노벨평화센터를 개관했다. 노벨 평화상의 역사와 역대 수상자의 공적에 관한 자료를 보관, 전시하고 있다. 센터는 노르웨이 정부와 개인 기부자들의 성금을 모아 건축했다고. 이곳에서 반드시 찾아봐야 할 사람은? 바로 2000년 한국인 최초의 수상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
에디터 이아현(fcover@noblesse.com)
디자인 장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