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의 술
제이엘의 이종기 대표는 윈저와 골든 블루 등을 개발하며 국내 위스키 시장을 선도해온 인물이다. 그런 그가 10년 전 돌연 문경으로 떠나 오미자로 술을 빚기 시작했다. 이종기 대표가 그리는 우리 술의 새로운 미래에 대하여.

이종기 대표는 1980년 두산 씨그램 입사 후 블랙스톤, 패스포트, 썸싱스페셜 블랙스톤을 개발한 국내 마스터 블렌더 1세대다. 현재 국내 위스키 시장점유율 1, 2위를 기록하고 있는 윈저와 골든블루 역시 그의 작품이다. 그의 화려한 경력 중 2006년 디아지오코리아의 부사장직을 내려놓고 그 이듬해에 문경에서 오미자 와인 개발을 시작한 것은 다소 의외의 행보다. 이야기는 그가 두산 씨그램에서 마스터 블렌더로 활동하던 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양조학을 배우기 위해 스코틀랜드로 유학 갔을 때 세계 각지에서 모인 학생들이 가져온 술로 시음회를 열었어요. 저는 인삼주를 가져갔는데 그 자리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어요. 그때부터 세계 어디서든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한국 명주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2011년, 이종기 대표는 5년간의 연구 끝에 오미자 스파클링 와인 ‘오미로제’를 선보였다. 오미로제는 병 속에서 2차 발효를 시키는 프랑스 샹파뉴 방식으로 생산한 스파클링 와인으로 천연 방부제 성분을 다량 함유한 오미자를 발효시키기 위해 프랑스 샹파뉴를 아홉번이나 방문하는 수고를 거쳐 탄생했다. 그런데 수많은 과일과 곡물 중 그가 오미자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1993년부터 2006년 회사를 그만둘 때까지 포도, 배, 사과 같은 과일로 시작해 쌀, 보리, 고구마, 감자까지 우리나라에서 생산하는 농작물을 연구하며 우리 술에 대한 연구를 틈틈이 해왔습니다. 그중에 가장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재료가 오미자였어요. 아름다운 색, 그리고 단맛, 신맛, 매운맛 등 매력적인 풍미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통하리라 생각했죠.” 이후 그는 자신의 전문 분야인 증류주 개발에 박차를 가해 마침내 지난해에 오미자 와인을 증류한 ‘고운달’을 내놓았다. 문경에서 제작한 전통 백자에서 3년간 숙성한 ‘고운달 백자’는 오미자의 맛과 향을 고스란히 담아내 과일과 꽃, 허브 향을 느낄 수 있는 한편 오크통에서 3년간 숙성한 진한 황금빛의 ‘고운달 오크’는 오미자의 다채로운 향과 오크에서 배어난 풍부한 바닐라 향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것이 특징. 무농약, 유기농 인증을 받은 오미자만 사용하고 전통 증류법과 발효 방식을 채택했다. 알코올 도수가 52도에 달하고 일반 전통주에 비해 10배 이상 높은 가격이지만 반응은 예상외로 뜨거웠다. 미슐랭 3스타를 받은 한식 레스토랑 ‘가온’과 미슐랭 2스타를 획득한 ‘정식당’ 등 파인다이닝에서 고운달을 전통주 리스트에 추가했고, 술 애호가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며 국내 주류업계에서 프리미엄 전통주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평가받았다. “주류법상 전통주의 범위에는 지역 특산품으로 만든 술도 포함됩니다. 고운달은 전통주라는 타이틀을 달고 소개하고 있지만 엄밀히 분류하면 지역 특산주라는 말이 적합하죠.” 이종기 대표는 한국 시장에서 지역 특산주를 품질이 낮은 술로 인식하는 경향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전통주로 홍보하는 지역 특산주 중에서는 전통 방식을 사용하지 않거나 화학 첨가물을 넣는 경우가 많기 때문. 그는 우리 술의 발전을 위해서는 전통주 혹은 지역 특산주를 분류하는 기준을 좀 더 강화하고 재료의 출처를 알 수 있는 트레이서빌리티(traceability) 시스템 등을 마련해 소비자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그는 10년간 트레이서빌리티 시스템을 도입하고 전통 양조 방법을 고수했다. 그리고 그의 지난 성과와 행보를 지켜봐온 이들에 의해 고운달은 출시한 지 1년이 되지 않아 프리미엄 전통주의 새로운 장르로 당당히 자리 잡았다. 와이너리와 양조장이 손익분기점을 넘으려면 아직 1년이나 남았지만 세계적 양조장이 걸어온 역사에 비하면 비교적 짧은 기간에 성과를 이룬 셈이다. “저는 제가 하는 일이 단순히 술만 만드는 양조 산업이 아니라 우리나라 농업과 식문화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늘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아직도 주세법을 비롯해 우리 술이 해결해야 할 과제는 많지만 오미로제와 고운달을 알고 찾는 이들이 조금씩 늘고 있어 뿌듯합니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앞으로도 좋은 술을 계속 만드는 거죠.”
최근 이종기 대표는 국내 막걸리 열풍을 이끈 전통식 주점 월향의 이여영 대표와 함께 문경 사과를 이용한 전통 증류식 소주 개발의 총책임자를 맡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대량생산을 목표로 하지만 화학 첨가물을 넣지 않는다는 그의 원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신속성과 효율성이 의식주 깊이 자리한 시대에 그가 꿈꾸는 우리 술의 미래는 생각보다 조금 먼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터뷰 후 그가 에디터에게 건넨 고운달 백자를 한잔 맛본 순간 입안 가득 퍼지던 오미자의 향긋한 풍미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좋은 술한잔의 가치를 아는 그를 통해 이전에 없던 새로운 우리 술을 계속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에디터 박현정(hjpark@noblesse.com)
사진 공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