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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에 취한 날

LIFESTYLE

목가적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와인 한 잔, 두 잔, 세 잔∙∙∙.

눈을 감으면 평화로운 야라밸리의 풍경이 그려진다. 새파란 하늘 아래 한없이 펼쳐진 포도밭. 그 기억을 더듬기만 해도 코끝에는 여름을 닮은 싱그러운 포도 향이, 입안에는 농익은 단맛과 상쾌한 산미가 섬세하게 어우러진다. 5월 중순, 이른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목적지는 호주. 주변에서 왜 호주냐고 물었지만 이유는 단순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4일은 멜버른, 4일은 시드니에서 보내는 일정을 짜고 난생처음 호주로 떠났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기라 쌀쌀한 날씨가 흠이었지만, 시내를 돌며 관광 스폿을 구경하는 것 외에도 다양한 액티비티와 투어가 가능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멜버른에서 경험한 와이너리 투어다. 한국에서 미리 예약해둔 야라밸리 와이너리 투어는 1인당 12만 원 선. 오전 9시경 시작해 오후 6시쯤 시내로 다시 돌아오는, 하루를 다 써야 하는 다소 부담스러운 일정이었다. 직업의 특성상 출장이나 행사에서 와인을 시음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 와이너리의 역사와 지리적 환경에 관해 긴 설명을 들어야 하고, 맛있는 음식과 함께 와인을 시음하지만, 애써 와인의 맛을 음미하느라 미각이 예민해진다. 와인을 오롯이 즐기기엔 머릿속이 복잡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건 여행이다. 야라밸리 와이너리 투어 후 원고를 쓰지 않아도 된다! 이번만큼은 와인을 마음껏 즐기고 들뜬 기분과 취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리라 다짐했다.

오전 9시, 숙소 근처에서 투어 버스에 올랐다. 하루 투어 인원은 15~20명 정도인데, 한국인은 우리뿐이었다. 한국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작은 버스에서 외국인 관광객들과 함께 움직이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투어 가이드는 운전을 하며 간간이 야라밸리 와이너리에 관한 설명을 하고, 컨트리송을 틀어 흥겨운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시내에서 1시간 30분쯤 달리니 목가적인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호주는 세계 와인 생산량 10대 국가 중 하나다. 빅토리아주는 호주를 넘어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와인 생산지다. 그중에서도 멜버른 동북쪽의 야라밸리는 60여 개의 와이너리가 들어선 곳. 서늘한 기후가 특징으로 호주에서 가장 품질 좋은 피노 누아와 스파클링 와인 생산지로 잘 알려져 있다. 또 1838년부터 경작을 시작한 빅토리아주의 첫 번째 와인 산지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우린 총 네 곳의 와이너리를 둘러봤다.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펀트 로드 와인스. 야라밸리 중심부에 위치한 이곳은 1987년 소유주인 나폴레오네 가족이 포도밭을 사들이고 1999년 모던한 스타일로 와이너리를 리모델링하면서 와인 양조에 박차를 가했다. 재배 품종으로는 피노 그리, 샤르도네, 피노 누아, 시라즈, 메를로, 카베르네 소비뇽 등이 있다. 이곳에서 다섯 종류의 와인을 맛봤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샤르도네다. 다른 와인은 한 모금씩 음미하고 말았지만, 샤르도네의 크리미한 질감과 복합적인 풍미에 사로잡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비워냈다.

펀트 로드 와인스에 도착한 지 1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다음 행선지는 밸고니 이스테이트. 이곳에선 와인 테이스팅 후 바로 옆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으며 두 종류의 와인을 함께 즐기는 코스였다. 거대한 통유리 너머로 포도밭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긴 테이블에 앉아 다른 여행객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와인을 음미하는 시간. 점심식사에 대한 기대치가 그리 높지 않았는데 소고기, 치킨, 피시 등 메인 요리를 고를 수 있고 음식의 맛 또한 훌륭했다. 사실 밸고니 이스테이트는 소문난 부티크 리조트다. 아주 큰 욕조를 갖춘 호텔로도 유명하기 때문에 여유가 있다면 1박2일로 와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까지 마치고 나니 이미 와인을 열 잔 가까이 마신 상태. 적당히 배도 부르고, 취기도 오르고, 햇살은 따뜻하고∙∙∙. 행복한 기분에 취해 다음 장소로 출발하기 전 잔디에 잠시 누워 달콤한 낮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만끽하다 오후 2시가 되었을 즈음 세 번째 와이너리인 예링 팜에 도착했다. 이곳은 야라밸리의 부티크 와이너리 중 하나. 1838년 스코틀랜드에서 넘어온 라이 형제가 빅토리아주의 첫 번째 포도밭을 일군 것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운영 중이다. 샤르도네와 피노 누아가 중심이지만, 특별히 달콤한 스파클링 와인과 애플 사이다를 맛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야라밸리 와이너리 투어의 하이라이트인 도메인 샹동으로 향했다. 이름에서 눈치챘겠지만 프랑스 샴페인 회사 모엣 & 샹동의 호주 와이너리다. 이곳에선 야라밸리에서 재배한 샤르도네, 피노 누아 등의 포도 품종이 스파클링 와인으로 변신한다. 여느 와이너리와 달리 이곳에선 3~4종의 와인 중 한 잔만 선택해 마실 수 있다. 그 외에는 별도로 금액을 지불하고 주문한 뒤 마실 수 있다. 내가 선택한 것은 붉은빛 액체에 기포가 촘촘히 박힌 피노 시라즈. 숙성된 포도의 산미와 달콤함 그리고 톡 쏘는 청량감이 한데 어우러져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와인 숙성고를 견학하거나 와이너리에 대한 역사와 스토리를 좀 더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남지만, 멜버른을 여행한다면 꼭 권하고 싶은 투어다. 도심을 벗어나 한적한 시골에서 하루를 보낼 수 있고, 와이너리마다 다른 특색의 와인을 맛보며 축배를 들 수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경험이다.

 

에디터 문지영(jymoon@noblesse.com) 디자인 송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