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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창의 품격

LIFESTYLE

“땅을 파서 우물을 만드는데 돌이 나오기도 하고 바위가 있어서 땅이 안 파지기도 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땅을 파겠다는 거죠. 앞에 가시들이 나를 못 넘어가게 한다면 어떤 식으로도 그걸 치고 넘겠다는 거예요. 내가 좀 악바리 같습니다. 그런데 소리는 악바리가 아니면 못하는 것 같아요.” 한 방송사 다큐 프로그램에서 흘러나온 안숙선 명창의 목소리는 모기 날갯짓 소리만 하고 말은 느렸지만 사물을 꿰뚫는 듯한 눈빛과 단호한 어투는 상대를 얼어붙게 하는 긴장감을 담고 있었다. 세월이 꽤 흐른 지난 6월, 남원의 한 한옥에서 마주 앉은 안숙선 명창에게서는 그때보다 더 깊어진 통찰적 시선과 예인다운 기품 있는 오라가 전해졌다.

1993년, 한국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영화 <서편제>는 당시 별반 인기 없던 판소리를 소재로 서울 최초로 100만 관객을 돌파하고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을 극장으로 인도한 영화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속 깊이 꽁꽁 숨겨두었을 ‘한의 정서’는 오정해의 소리를 타고 관객들에게 그야말로 한 장면 한 장면 절절하게 전해졌다. 그 영화를 다시 본 건 송화 역을 맡은 오정해의 중년 소리가 바로 안숙선 명창(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병창 예능 보유자)의 목소리였다는 걸 알게 되고 나서다. 영화가 개봉하면서 분명 사람들 입에서는 안숙선 명창의 이름이 꽤 회자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고등학생으로 판소리 문외한이던 나와 주변 친구들은 그 이름 석자가 주는 무게감을 알 턱이 없었다. 더구나 그 영화의 엔딩 신에서 노년의 송화 노랫소리는 안숙선 명창의 스승이자 한국 최고의 판소리 명인인 만정 김소희 국창(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춘향가 예능 보유자)의 소리였다니. 이제라도 숨은 명창들의 목소리를 발견한 걸 기뻐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대책 없는 무지를 개탄해야 할지 그 판단마저 흐려졌다.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 국악을 시작해 올해 국악 인생 60년을 맞은 안숙선 명창은 김소희 국창 문하에서 <흥보가>와 <춘향가>를, 박귀희 명창에게 가야금병창을 배웠다. 그녀는 이어 <수궁가>, <적벽가>, <심청가>까지 익혀 판소리 다섯 마당을 모두 섭렵했다. 1979년에 국립창극단에 들어가서 ‘영원한 춘향’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50대까지 춘향을 맡아 활동했지만, 무엇보다 그녀를 명인으로 만든 건 1986년 판소리 완창 발표를 시작해 다섯 마당을 차례로 소화해낸 일이었다. 짧게는 3시간 30분(<수궁가>, <적벽가>, <흥보가>), 길게는 7시간(<춘향가>)이 걸리는 판소리 한 마당을 완벽히 완창하기 위해서는 수년이 걸리기 때문에 다섯 마당을 모두 완창한다는 건 그야말로 자기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방증과 같다. 1997년,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병창 예능 보유자(인간문화재)로 지정되며 한국을 대표하는 판소리 명창으로 굳게 자리매김한 그녀는 지금껏 판소리의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다. “판소리는 인생의 한 단면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소리를 듣는 분들이 염원하는 모든 것을 같이 나누는 자리죠. 창자와 관객이 같이 기뻐하고 같이 눈물 흘리고 같이 고통스러워하면서 관객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응어리를 함께 푸는 거예요. 그냥 노래와는 전혀 다르죠.”
우리 시대 판소리를 가장 적절한 우리 시대 몸짓으로 표현하는 안숙선 명창은 그래서 매년 관객과 더 가깝게 만나는 예술세상 마을 프로젝트 ‘첼로와 판소리, 마을을 만나다(동편제마을로 떠나는 국악 여행 / 한여름 밤의 계촌마을 클래식)’를 이끌어오고 있다. 안숙선 명창과 첼리스트 정명화가 손잡고 각각 6월과 8월에 남원 동편제마을(비전, 전촌, 화신마을)과 평창 계촌마을에서 지역 주민과 함께 벌이는 거리 축제다. 남원에서 지난 6월 16일부터 18일까지 열린 ‘제3회 동편제마을 국악 거리축제’는 축제를 통해 국악을 일상의 생활 예술로 즐길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는 기회를 선사했고, 그 바통을 이어받아 8월 18일부터 20일까지는 한여름 밤의 계촌마을 클래식 ‘제3회 계촌마을 클래식 거리축제’가 펼쳐질 예정이다. 동편제의 태동지로 지리산 둘레길, 자연과 하나 된 마을 풍경을 자랑하는 비전마을에서 안숙선 명창을 만났다.

선생님과 정명화 선생님이 이끄는 ‘예술세상 마을 프로젝트’가 올해로 3회째입니다. 남원과 평창을 선정한 것은 선생님의 고향과 정명화 선생님의 평창대관령음악제와도 관련이 있나요?
2014년에 한국예술종합학교와 함께 의미 있는 문화 사업을 하자는 이야기가 나와서 의논하던 중에 “그럼 예술 마을을 만들어보자”라는 아이디어가 나왔어요. 이동연 예술감독이 장소를 선정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던 중에 여기 동편제마을로 답사를 두 번 정도 왔대요. 남원이 본래 소리의 고향이고, 이 마을이 판소리가 태동한 곳이라 이곳으로 정한 모양이에요. 평창도 비슷해요. 평창의 계촌초등학교는 ‘계촌 별빛 오케스트라’로 유명한데, 전교생이 일인 일악기를 실천하죠. 그래서 그곳을 클래식 마을로 정해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잠깐 둘러보니 마을이 아주 예쁘더라고요. 판소리가 태동한 곳이라 하니 뭔가 동네의 기운이 범상치 않은 느낌도 들고요.
네, 마을이 아주 아름답습니다. 마을 곳곳을 활용한 공간 연출에도 신경을 많이 썼어요. 올해는 서울대, 이화여대 등 전국 10개 대학 소속 국악 동아리들이 축제가 열리는 2박 3일 동안 여기서 캠프를 해요. 명창들의 공연을 보고 직접 무대에도 서면서 배우는 거죠.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들에게 원 포인트 레슨도 받고요.

이번 축제 기간에 선생님과 정명화 선생님의 협연 등 다양한 국악 공연을 진행합니다. 어떤 기준으로 공연을 선정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요즘 한창 잘나가는 소리, 앞으로 발전할 싹수가 보이는 소리, 그리고 고수들의 소리를 모두 들려주고 싶었어요. 관객 입장에서는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가 있으니까요.

축제에 벌써 관광버스들이 많이 들어오는 것 같아요. 전국 각지에 판소리 마니아들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네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대학 동아리 캠프와 같은 다양한 행사 때문인지 찾는 사람이 늘었어요. 제 고향이 바로 근처인데 어르신들이 저를 응원하러 와주신다고 하네요.(웃음) 사실 국악을 좋아하는 분들은 알아서들 오시기 때문에, 제 욕심은 남원과 그 주변의 동네 주민들이 더 많이 와주시면 좋겠어요.

축제의 대미는 선생님과 정명화 선생님이 함께 선보이는 ‘판소리, 첼로, 피아노, 소리북을 위한 세 개의 사랑가’가 장식할 예정입니다. 오래전부터 함께해오신 두 분의 공연은 동영상 사이트에서도 볼 수 있는데, 판소리와 첼로의 음악적 구조가 많이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이올린과 달리 첼로는 판소리의 밀고 당기고, 삐치고 던지고, 끝까지 올라갔다가 단번에 내려오는 구조와 비슷해요. 판소리에서 소리를 배로 쭈욱 밀어내는 부분이 있는데, 첼로의 깊은 선율이 판소리의 묵직한 소리와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간혹 라디오 채널에서 국악을 듣다 보면 저도 모르게 같이 흥얼거리게 되더라고요. 서양 음악에 비해 접할 기회가 적어서 그렇지 막상 듣게 되면 중독성이 있는 것 같아요. 국악이 생활화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지금 국악은 우리 생활 안에 있다고 보기 어렵죠. 그런데 불과 50~60년 전만 해도 거꾸로 국악이 우리 생활 속 음악이었고 서양 음악은 낯선 음악이었어요. 예전에는 경축일이나 명절이면 백화점이든 시장이든 ‘방아타령’ 같은 민요가 울려 퍼졌는데 언제부터인가 그 소리가 안 들리더라고요. 그 원인은 생활의 변화에 있다고 봐요.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란 말씀이신가요?
저 때만 해도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 노랫가락 안에서 살았어요. 아기가 태어났을 때 부르는 노래부터 재울 때 부르는 노래, 명절이나 좋은 일을 축하하면서 부르는 노래,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어서 집밖으로 나갈 때 부르는 ‘상여소리’까지 평생 우리 노래를 불렀죠. 그런데 지금은 아기를 낳고 조리원으로 가는 세상이 됐어요. 그리고 예전에는 혼인, 환갑잔치 등 대부분의 행사를 집 앞마당에서 했잖아요. 좋은 날이면 마당에서 소리를 했죠. 지금은 다 아파트에 살잖아요. 생활 방식이 변했기 때문에 국악도 이제 공연장에 가야 볼 수 있는 아주 낯선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맞아요. 생각해보니 저도 어릴 때 할머니가 돌봐주신 덕분에 자장가류의 민요를 많이 들으며 컸어요.
아기 다리를 마사지해줄 때도 “쥐암~쥐암 잘캉~잘캉, 엄마 아빠 도리도리~” 이런 노래를 불렀어요. 아이들은 늘 장단 속에서 컸죠. 아기에게 젖을 먹일 때도 “둥~둥~두웅 내 딸이야~” 이렇게 흥을 담아 노래를 불렀어요. 그런데 더 이상 아이들이 이런 노래를 듣지 않고 자라니 국악이 어색한 거예요. 국악이 현대식 생활 방식에 어떻게 녹아들어야 할지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이번 동편제마을 축제처럼 클래식과 국악의 접목 같은 다양한 국악 공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클래식과 판소리가 만나는 지점을 늘리는 것도 도움이 되겠죠. 마니 아들만 와서 보는 게 아니라 보다 많은 이들이 와서 즐길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필요하고요. 무엇보다 아이들이 국악을 가까이 접하게 해야 합니다. 제 손주가 일곱 명인데, 아이들이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꽃 사시오~’, ‘방아방아 물방아야’ 등 재미있는 민요를 한번 가르쳐봤어요. 곧잘 따라 하더라고요. 그런데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안 부르려고 하는 거예요. 유치원에 그런 노래 하는 친구는 아무도 없다고. 그러면서 저에게 피아노를 사달라는 거예요. 우리 음악을 그렇게 낯선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는 자책감이 아주 큽니다.

선생님은 여덟 살 때부터 노래를 시작하셨습니다. 국악 연주자에 대한 당시 사회의 인식이 궁금합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딴따라’라는 말인데 어릴 적 그런 부정적인 시선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국악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비가 퍼부어서 남의 집 처마 아래서 비를 피했어요. 저도 모르게 그날 배운 것을 가만가만 부르고 있는데 옆에 서 있던 사람이 저에게 “이상한 아이네”라고 하는 거예요. 어렸기 때문에 그런 말이 더욱 상처로 다가왔죠.

그래도 집안에서는 지지해주셨을 것 같아요. 명창 강도근 선생님이 외당숙이시고, 이모 강순영 선생님도 가야금산조를 잘하셨으니까요.
아니요. 부모님은 저보고 “그런거 하지 말고 시집이나 가지” 하셨어요. 가까이에서 형제들이 얼마나 힘들게 국악을 하는지 봐오셨기 때문에 그러신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어릴 적부터 외가 쪽 어른들 따라 판소리나 가야금 공연에 자주 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마음이 갔죠.

선생님은 판소리 다섯 마당을 모두 완창하셨는데, 각각 몇 독 정도 하셨나요?
모르겠어요. 시간만 나면 했어요. 하루라도 소리를 하지 않으면 소리가 녹슨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춘향가> 같은 7시간짜리 마당을 어떻게 하시는지 신기해요. 7시간 동안 선생님 혼자 춘향이와 이몽룡, 변 사또를 비롯해 등장인물 모두를 소화하시는 거잖아요. 그 긴 사설을 어떻게 외우세요?
외우려고 하면 안 되고 익히려고 해야죠. 음악을 익혀야 외워지지 주문 외우듯 하면 안 나와요.

그럼 어느 정도 익혀야 완창을 할 수 있나요?
소리 연습을 매일 열심히 한다고 가정할 때 7시간짜리 완창은 2~3년 정도 연습하면 할 수 있어요. 근데 그건 사설만 겨우 외운다는 거지 소리에 들어간 음악적 구조나 변화 등 깊은 부분까지 소리로 발현해내기에는 역부족이죠. 한 대목 한 대목 얼마나 많이 연습했는지에 따라 깊고 진한 소리가 결정됩니다. 그래서 득음은 수천 독, 수만 독을 닦으면서 얻는 거라고 해요. 그렇게 해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소리를 내죠.

선생님은 만정 김소희 국창의 애제자였습니다. 만정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선생님에게 당부의 편지를 전해주신 일화는 유명합니다. 스승님이 늘 이야기하신 점은 뭔가요?
소리의 법통을 벗어나는 것을 싫어하셨어요. “제발 아무 데나 막 가지 마라. 고귀하게 품위를 지켜라. 예술은 그렇게 함부로 파는 게 아니다”라고 하시면서 예인으로서 갖춰야 할 인격과 무대 예절을 가르쳐주셨어요. 그래서 민요도 못하게 하셨어요. 난삽해진다고요. 소리가 경망스럽고 가벼워진다는 거죠.

한창 소리를 배울 때 난정 선생님께 혼도 많이 나셨겠어요.
진짜 엄하셨어요. 한번은 무대에서 판소리를 하다 아니리(한 대목에서 다른 대목으로 넘어가기 전에 자유 리듬으로 사설을 엮어나가는 것)에서 제가 “날씨가 참 더운데 (관객) 여러분도 더우시죠”라고 했는데 “그런 쓸데없는 잡소리를 했다”면서 혼내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모르는 게 있으면 제발 나에게 물어봐라”라고 당부하셨어요. 선생님께서는 제가 한 아니리가 관객 서비스 같은 거라고 생각하신 거죠. 그런 서비스는 “내 소리는 (고작)이 정도입니다”라는 걸 선전하는 거라고 하셨어요. “모르면 제발 물어봐라.” 돌아가시기 며칠 전까지도 저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TV에서도 종종 특집 방송으로 국악을 다루죠. 지난해에 KBS <불후의 명곡> 감사의 달 특집에서 남상일 씨와 <흥보가>를 부르시는 걸 봤어요. 관객들의 호응이 대단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상일이 때문에 나간 거예요. 제 제자지만 상일이는 말도 잘하고 재치도 넘치고 소리도 아주 잘해요. 제자가 하도 같이 나가자 하니까 “그럼 가서 노래만 부르고 오겠다”하고 갔는데, 방송국에 종일 붙잡혀 있었어요. 저녁에서야 노래를 불렀죠.

본래 음악 프로그램이 리허설부터 녹화까지 일정이 길긴 합니다.
제자 때문에 할 수 없이 출연하긴 했지만, 나중에 또 한번 깜짝 놀랐어요. 이곳저곳에서 만나는 분마다 “판소리 처음 들었는데 너무 감동했어요” 이러는 거예요. 저는 사람들이 평소에 진도아리랑 정도는 들으면서 사는 줄 알았거든요. 아무튼 그 방송을 통해 시청자들이 국악에 매력을 느꼈다는 건 좋더라고요.

네, 저도 정말 푹 빠져서 봤어요. 그래도 만정 선생님은 뭐라 하셨겠죠?
아이고, 길길이 뛰셨겠죠. 그래서 방송에 나가지 않겠다고 얼마나 버텼는데요. 그런데 피디가 집 앞에 와서 삼고초려를 해서 그 바람에 나갔죠.

선생님 제자는 연령대가 다양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는 부분은 뭔가요?
무대에 올라가는 순간 온전히 내가 그 무대를 책임져야 합니다. 누가 대신해줄 수 있는 게 아니죠. 그래서 평소에 제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요. “건강을 위해서 늘 운동을 해라. 그리고 판소리를 잘하는 데 필요하다면 몸 동작이나 연기, 화술을 배워라.” 그런 것이 내 몸속에서 자연스레 소리와 더불어 발림이 되면 관객에게 더 좋은 무대를 보여줄 수 있거든요.

올해 국악 인생 60주년을 맞이하셨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과거 자신의 판소리를 들어보면 너무 창피하다고 하셨는데, 그럼 지금의 소리는 완성에 조금 가까워진 건가요?
제가 30대에 명창 칭호를 받았어요. 그런데 지금 그 소리를 들어보니 깊이가 하나도 없더라고요. 노래 안에 희로애락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아요. 장단 맞춰서 그냥 사설한 거죠. 소리에 들어 있는 깊은 부분을 끄집어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그럼 과연 지금의 소리는 좋으냐. 그것도 아니에요. 잡으려고 할수록 신기루처럼 멀어져가는 게 소리예요. 요즘 참 서글픈 게 뭔지 아세요? 나이를 먹어가면서 소리는 더 잘 알게 되는데 몸이 안 따라간다는 거예요. 옛날 만정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소리 맛 알자 나는 가는구나.” 소리의 길을 간다는 것이 과연 이상의 세계를 꿈꾸는 것인지, 아니면 도의 세계에 다가가는 것인지, 요즘 참 생각이 많습니다.

 

에디터 김이신(christmas@noblesse.com)
사진 J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