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귀환
그때 그 시절, 우리 가슴을 뜨겁게 한 스포츠 스타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경기장 안팎을 누비는 그들의 행보를 소개한다.

리버풀과 레알 마드리드의 레전드 매치 모습.
지난 7월 30일 밤, 부산 광안리해수욕장에서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 런칭 행사가 열렸다. 한국에 e스포츠 열풍을 불러일으킨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스타크래프트의 업그레이드 버전을 소개하는 이 행사엔 관중 1만여 명이 몰렸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건 게임 자체에 대한 기대도 크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프로 게이머들의 이벤트 경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요환과 홍진호 등 스타크래프트의 전성기를 이끈 선수들의 대결은 올드 팬들의 추억을 자극했다. 은퇴한 스포츠 스타들의 경기장 나들이는 이렇듯 화제를 낳는다. 한데 이들이 경기에 나서는 이유는 각기 다르다.
잉글랜드 축구 클럽 리버풀의 앤필드 구장에서 지난 3월 25일 리버풀과 레알 마드리드의 레전드 매치가 열렸다. 스티븐 제라드(Steven Gerrard)를 필두로 한 리버풀 레전드와 루이스 피구(Luis Figo)를 포함한 레알 마드리드 레전드가 대결한 이 경기를 보기 위해 5만3000여 명이 모였다. 승리를 위한 경기가 아닌 만큼, 선수와 관중 모두 결과에 상관없이 경기를 즐겼다. 이날 경기 수익은 모두 리버풀 구단의 공식 자선단체 LFC 파운데이션에 기부, 리버풀 지역의 아이들과 청소년을 돕는 데 쓰였다. 말하자면 자선사업의 일환으로 열린 경기인 것이다. 세계의 많은 축구 클럽이 이런 형태의 이벤트 경기를 개최하고 있으며, 때로는 유명 선수나 재단이 주최하기도 한다. 좋은 취지로 기획한 경기인 만큼, 은퇴한 선수들도 기꺼이 초청에 응하는 편이다.
조금 다른 이유로 축구장에 선 이들도 있다. 6월 24일엔 로리 린지(Lori Lindsey), 페트라 랜더스(Petra Landers) 등 전직 여자 축구 스타들이 현직 선수들과 함께 경기에 나섰다. 그런데 경기 장소가 특이하다. 해발 6000m의 킬리만자로 정상 언저리다. 선수들의 10일간 산행 끝에 열린 이 경기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개최한 축구 경기로 기록됐다. 이들이 산악인도 오르기 힘든 곳에서 특별한 도전에 나선 이유는 명확하다. 스포츠계에 만연한 여성 차별을 알리기 위해서다. 경기를 주최한 이퀄플레잉필드(Equal Playing Field) 재단의 공동 창립자 로라 영손(Laura Youngson)은 “이 경기를 통해 스포츠계의 성 불평등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하기 바란다”며 “여성이라는 이유로 스포츠가 주는 연대감과 리더십, 건강 등의 이점에서 배제되면 안 된다”고 말했다.

1 ATP 챔피언스 투어에서 활동하는 존 매켄로.
2 에이즈 관련 교육과 예방 프로그램 지원에 힘쓰는 매직 존슨.
3 매년 말 영국 런던의 로열 앨버트 홀(Royal Albert Hall)에서 열리는 ATP 챔피언스 투어 경기를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
4 라오스 선수들과 야구대회에 참가한 이만수.
존 매켄로(John McEnroe), 피트 샘프러스(Pete Sampras) 같은 왕년의 테니스 스타들도 종종 코트에 나선다. ATP 챔피언스 투어(ATP Champions Tour) 덕분이다. 1998년에 시작한 이 투어는 은퇴 선수를 대상으로 하는데, 자격 요건이 꽤 까다롭다. 기본적으로 만 35세 이상, 현역 은퇴 후 최소 2년이 지나야 하며, 현역 시절 세계 랭킹 1위나 그랜드슬램 대회 결승 진출자 혹은 국가 대항전인 데이비스 컵 우승팀의 일원이어야 참가가 가능하다. 매년 스톡홀름과 런던, 서울 등 세계 주요 도시에서 순차적으로 대회가 열리며, 각 대회 순위에 따라 포인트를 부여하고 랭킹도 정한다. 하지만 선수들은 기록에 연연하기보다 팬 서비스에 집중하는 모양새다. 어이없는 실수를 하고도 웃음 짓고, 코트에서 조는 시늉을 하는 등 여유가 넘친다. 관중은 이런 선수들의 모습에 열띤 호응으로 화답한다. 테니스 팬들에게 추억과 재미를 선사하는 이 경기는 테니스 홍보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는 평이다.
한편, 경기장 안보다 밖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은퇴 스타들도 있다. 국내엔 대표적으로 야구 선수로 활약한 이만수가 있다. 선수 시절 삼성라이온즈를 이끈 강타자, 메이저리그와 국내 리그에서 지도자로 활약했던 그는 2014년 말 감독직을 내려놓고 본격적인 재능 기부에 나섰다. 훈련 지도와 강연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지만, 그중 가장 눈에 띄는 행보는 야구 불모지 라오스에 야구를 전파한 것이다. 그가 2014년 처음 라오스에 갔을 땐 야구 인프라는커녕 야구에 대한 기본 지식도 없어 막막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의 광고 출연료 2억 원을 기부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결과 괄목할 성과를 내고 있다. 대한민국 외교부와 라오스 외교부의 업무 협약(MOU)을 유도해 야구용품과 코치를 지원케 하고, 한국-라오스 국제야구대회도 벌써 세 차례나 개최했다. 꾸준한 노력 끝에 지난 7월 라오스에 야구협회가 생겼고, 이만수는 부회장으로 추대됐다. 말 그대로 새로운 야구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는 것. 40년간 야구로 많은 사랑을 받은 만큼 그 재능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그의 다짐이 실현되고 있다.
해외엔 자신의 아픈 상처를 자선 활동으로 승화시킨 사람도 있다. 1980년대에 NBA의 부흥을 이끈 농구 스타 매직 존슨(Magic Johnson) 이야기다. 그는 선수 생활 중이던 1991년 HIV 양성반응으로 갑작스럽게 은퇴를 선언했다. 당시만 해도 ‘스치기만 해도 감염’, ‘에이즈에 걸리면 사망’ 등의 낭설을 진실처럼 여기던 때였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자신이 대중 앞에 나서야 에이즈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은퇴와 동시에 매직 존슨 재단(Magic Johnson Foundation)을 창립, 전 세계에 에이즈 관련 교육과 예방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다. 1998년부터는 장학 프로그램, 2001년부터 저소득층 학생을 위한 디지털 기기 지원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매년 25만여 명에게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는 매직 존슨 재단은 미국을 대표하는 자선단체 중 하나다.
최근 몇 년간 유럽을 중심으로 대두된 난민 문제를 돕는 데도 은퇴 선수의 활약은 빠지지 않는다. 2004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 당시 그리스의 깜짝 우승을 이끈 전 국가 대표 골키퍼 안토니오스 니코폴리디스(Antonios Nikopolidis)는 난민 축구팀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시리아와 예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출신 난민을 모아 만든 팀의 이름은 ‘엘피다(Elpida)’, 그리스어로 ‘희망’이란 뜻이다. 이들은 매주 일요일 그리스의 아마추어 리그에 참가해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과 경기한다. 유럽 여러 나라에 신청한 망명 결과가 나올 때까지 난민 캠프에 머물러야 하는 선수들에게 축구는 작지만 큰 즐거움이다. 니코폴리디스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이들을 돕는 것일 뿐”이라며 “이 프로젝트를 통해 새로운 친구와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고 밝혔다.
화려한 기술과 불굴의 정신으로 격한 감동을 안겨준 왕년의 스포츠 스타들. 그들은 더는 현역 시절의 멋진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한다. 하지만 경기장 안팎에서 여유와 웃음 그리고 선행으로 또 다른 귀감이 되고 있다. 인생을 하나의 경기로 본다면, 그들은 이제 막 후반전에 접어들었을 뿐이다. 여전히 굵은 땀방울을 흘리고 있는 전설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자.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에디터 황제웅(hjw1070@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