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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아트의 역사적 순간

ARTNOW

디지털 아트는 기존 예술이나 물질세계에서는 실현할 수 없었던 가능성의 경계를 흔들고 제약을 뛰어넘는 문화 활동의 증거다. 그런 디지털 아트의 역사적 이정표가 된 순간.

에른스트 헤켈의 책 < Kunstformen der Natur >.

정보에 대한 미적 자극의 시작점, 에른스트 헤켈의 책 < Kunstformen der Natur >(1899~1904년)
디지털 아트의 근본적 시작은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선 예술 영역에서 모더니즘의 미적 전통을 넘어, 서구 과학의 수학적·과학적 인식 내에서 발생한 미적 상상력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17세기 과학혁명은 인간이 자연을 인식하는 근본적 변화를 이끌었다. 그중에서도 생명과학에서 본질적인 자연의 구조와 패턴의 경이로움은 ‘정보’에 대한 본격적인 미적 자극을 제공했다. 독일의 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은 꽤 오랫동안 바다 생물을 채집했고, 생물을 현미경으로 관찰해 세밀한 삽화를 그렸다. 그 삽화를 모아 출간한 책이 <자연의 예술적 형태(Kunstformen der Natur)>다. 이 책은 생물의 형상에 대한 정보를 모아 일정한 기준으로 분류하고, 그 과정에서 발견한 형태적 경이로움을 극명하게 표현했다. 헤켈의 삽화는 다윈의 진화론이라는 과학 언어에 시각적 자극과 즐거움이라는 묘미를 새롭게 더한 객관적 창작물이다. 즉 자연 이미지를 수집해 시각적 요소를 발견하고, 이를 다시 분류·분석·분해·결합하는 과정을 통해 자연의 미학적 가치를 제고한 작업이다. 쉽게 말해 과학자가 자신의 미적 감흥과 시각에 대한 책을 내놓은 것이다. 디지털 아트는 근본적으로 정보를 다루고 표현하는 예술이기에, 과학적 정보에서 법칙 외에 또 다른 의미와 아름다움을 찾는 예술적 태도는 에른스트 헤켈의 작업에서 비롯했다.

벤 라포스키의 ‘Oscillon 40’.

최초의 그래픽 아트, 벤 라포스키의 작품 ‘Oscillon 40’(1952년)
시대가 변함에 따라 점차 광범위한 데이터를 입력하고 처리할 수 있는 기술이 발달하고, 이를 출력할 수 있는 기계가 발전했다. 사람의 손으로는 하기 힘들던 일이다. 과학자는 곧 이 새로운 기계장치를 사용, 자연현상의 보다 넓고 복잡한 구조와 변화를 매핑해 정확한 수학 용어로 자연을 기술할 수 있게 됐다. 자연의 형상과 법칙이 수학 언어를 통해 정리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얻은 새로운 시야와 함께 자연의 패턴과 형태를 다루고 표현하고 싶다는 지속적인 욕망이 발현된 것. 미국의 수학자이자 예술가인 벤 라포스키(Ben F.Laposky)는 이에 근거해 예술과 과학의 경계를 해체하려는 체계적 시도를 진행했다. 1950년대 초, 그는 자신이 개조한 음극선 오실로스코프의 원형 화면에서 출력된 아날로그의 파형 수천 개를 촬영했다. 촬영한 형상은 규칙이 있긴 했지만, 현실에선 볼 수 없을 것 같은 몽환적이고 비물질적인 반투명한 빛의 입체였다. 이는 전자와 에너지장의 변화, 그리고 이동이라는 자연의 보이지 않는 이면에 대한 시각적 표현이었다. 오스트리아의 과학자이자 철학자 헤르베르트 프랑케(Herbert W. Franke)가 말했듯, 라포스키의 연구는 전자 및 계산 기계로 그래픽을 생성한 첫 프로젝트였다. 이처럼 과학은 점차 시각적으로 변화했고, 과학실험 과정을 통해 수집한 시각적 정보의 미적 특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만들었다. 확장된 전자 이미지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 또한 확장했고, 나아가 인간의 인식을 영원히 바꿔놓았다.

마이클 놀과 벨라 율레스의 플로터 프린팅 추상회화.

최초의 디지털 아트 전시, 하워드 와이즈 갤러리 < Computer-Generated Pictures >전(1965년)과
슈투트가르트 대학교 슈투디엔갈레리 < computergrafix >전(1965년)

1965년 미국 뉴욕 하워드 와이즈 갤러리(The Howard Wise Gallery)에서 열린 전시 < Computer-Generated Pictures >엔 굉장히 낯선 이미지가 걸렸다. 선 하나가 두서없는 각도로 꺾이면서 수많은 궤적을 그려낸 이미지다. 전시는 어떤 호응도 얻지 못했고, 물론 팔린 작품도 없었다. 이 작품을 만들어낸 건 혁신적 기술 연구로 유명한 미국 벨 연구소(Bell Lab)의 연구원 마이클 놀(A. Michael Noll)과 벨라 율레스(Bela Julesz)다. 1962년, 벨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마이클 놀은 동료가 실수로 만든 버그로 인해 나타난 괴상한 기호를 발견했다. 연구원들은 산산이 흩어져 출력된 도트를 보며 “추상예술 같다”는 농담을 주고받았고, 마이클 놀은 그 농담 속에서 미적 동기를 찾아냈다. 그는 ‘미대 학생들은 고전 회화를 참고해 고유의 버전을 만들어내는 수업을 받는다. 컴퓨터도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IBM 7090이 피터르 몬드리안의 선 구성 방식 혹은 리처드 리폴드의 조각 ‘오르페우스와 아폴로’의 컴퓨터 버전을 시도한다’는 생각으로 컴퓨터를 이용해 이미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Gaussian-Quadratic’이다. 부주의로 생겨난 깨진 이미지에서 디지털 컴퓨터를 이용한 최초의 그래픽 아트가 태동한 것. 수식 계산기였던 디지털 컴퓨터는 이렇게 인간과 함께 창작하는 파트너이자 새로운 도구가 됐다.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서도 유사한 시도가 있었다. 독일 지멘스사의 프로그래머 게오르크 네스(Georg Nees)도 ER56이라는 컴퓨터로 이미지 생성 작업을 진행했다. 그는 “8개의 점을 무작위로 산포해라. 그 점을 선으로 이어 닫힌 도형이 되게 하라”라는 명령어를 컴퓨터에 입력, 알파벳과 숫자로 구성된 이 명령어는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해냈다. 플로터로 출력한 결과물은 1965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대학교(Universitat Stuttgart)의 슈투디엔갤러리(Studiengalerie)에서 열린 개인전 < computergrafix >에서 공개해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다. 이처럼 초창기 디지털 아트 작업에서 볼 수 있는 디지털 이미지의 본질은 곧 문자와 숫자 그리고 이들로 이루어진 수식이자 코드였다.

칼 심스의 ‘Galapagos’.

컴퓨터와 관람자의 상호작용, 칼 심스의 작품 ‘Galapagos’(1997년)
디지털은 0과 1, 이 2개의 숫자로 이루어진 정보다. 모든 물질을 원소에서 숫자로 치환할 수 있는 디지털 개념은 모든 물질적 정보를 비물질적 숫자 체계 속에서 헤아릴 수 있게 했다. 나아가 인간은 실제 공간과 똑같은 혹은 그 이상의 방대한 가상 공간을 확보했고, 현실 공간의 제약을 넘어 활동하고 있다. 매체 철학자 돈 아이디(Don Ihde)가 밝혔듯 “이제 우리가 ‘닿을’ 수 있는 곳은 인터넷 덕분에 지구 전체로 확장됐고, 우리의 경험은 변화했다”. 디지털은 모든 것을 녹일 수 있는 용매다. 사진, 영상, 소리, 움직임을 녹여 그 모든 것을 한데 아울러 연동하고 표현할 수 있으며 현실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니까.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이 디지털을 통해서는 가능하다. 진화와 생명에 대한 실험이 그렇다. 그 예로 생명공학을 전공한 작가 칼 심스(Karl Sims)의 작품 ‘Galapagos’를 들 수 있다. 그는 생물의 성장과 계통 진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돌연변이 같은 생명 활동에 관심이 있었고, ‘Galapagos’는 그런 인공 생태계와 진화 시뮬레이션의 결과물이다. 컴퓨터 12대와 출력 화면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에서 각 컴퓨터는 진화 알고리즘 프로그램을 통해 서로 다른 가상 유기체 12개를 만들어냈다. 각 생명체는 그 바탕을 이루는 생명 정보, 즉 유전자 코드에 따라 계속 성장하며 환경 변화에 근거한 진화를 지속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작가는 이 과정에 관람객의 참여를 더했다. 관람자가 각 생명체 중에서 가장 인상 깊거나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개체 앞에 서면 선택받은 생명체는 계속 생존, 번식하고 돌연변이를 거쳐 진화를 지속할 수 있다. 관람객이 컴퓨터 내 닫힌 생태계의 생명체를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생명체의 삶과 진화의 방향성에 개입한 것이다. 그리고 그 개입은 자신의 기호에 따른 것이기에 결국 관람객과 작품 사이에 오가는 정보의 상호작용이 이 작품을 완성에 이르게 했다. 단순히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 이상으로 정보를 해석, 가공, 재생산하는 새로운 차원의 감상과 태도를 만들어낸 중요한 작품이다.

 

에디터 백아영(xiaxia@noblesse.com)
허대찬(토탈미술관 협력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