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너머의 무엇
벨기에를 대표하는 화가 뤼크 튀이만은 뉴미디어, 설치, 디지털 테크놀로지 등 눈이 번쩍 뜨이는 현란한 예술 매체의 등장에도 30여 년간 캔버스와 붓을 놓지 않았다. 뤼크 튀이만이 회화에 이토록 몰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 현대 회화의 거장 뤼크 튀이만.
2 리셋홈에서 열린 개인전 < The Swamp > 내부 설치 전경.
3 리셋홈에서 열린 개인전 < The Swamp > 외부 설치 전경.
2004년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최연소로 개인전을 연 작가이자 세계적 화랑 데이비드 즈워너의 첫 전속 아티스트 중 한 명. 이 흥미로운 수식어의 주인공은 벨기에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하는 화가 뤼크 튀이만이다. 지난 3월 아트 바젤 홍콩에 데이비드 즈워너의 대표 작가로 참여해 컬렉터의 호응을 이끌어낸 그는 5월엔 벨기에 리셋홈(Resethome)에서 아티스트 레지던시와 개인전을 마쳤다. 올가을엔 1978~1994년에 그린 페인팅을 모은 화집 발간을 앞두고 있다. 방송 매체에서 차용한 이미지를 캔버스에 옮기며 1990년대 회화의 부활에 기여한 뤼크 튀이만의 작품은 명확한 주제, 그리고 그에 반하는 모호한 표현 방법이 특징이다. 마치 초점이 빗나간 듯 흐릿하고 아스라한 색감과 붓질도 그의 전매특허다. 1980년대엔 영화 제작자로 활동한 덕분에 그의 작품에는 클로즈업, 시퀀스, 프레임 등 영화적 요소가 어려 있다. 초기엔 잡지 사진, 그림, TV 영상, 영화, 폴라로이드를 기반으로 작업했지만 현 시류에 발맞춰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사진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페인팅이라는 전통 매체는 절대 놓지 않은 채 지속적으로 회화를 재정의하고, 회화가 지닌 잠재력을 널리 알리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다른 유럽 화가 대부분이 묵직한 느낌의 회화를 선보일 때도, 그는 섬세하고 순간적인 붓놀림으로 독창적인 스타일을 추구했다. 정물, 초상 등 평범한 일상에서 역사적 사건과 대형 참사로 점차 주제를 확장하고 있는 뤼크 튀이만의 최근 활동과 관심사에 대해 직접 들어보았다.
최근 벨기에 리셋홈에서 개인전 < The Swamp >를 열었습니다. 전시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주세요.리셋홈은 벨기에 랭부르의 작은 마을에 조각가 헤르트 로베인스(Gert Robijns)가 설립한 미술관입니다. 헤르트 로베인스는 2년여 전부터 할머니의 자택을 새롭게 개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어요. 그 집을 아티스트 레지던시이자 조각과 회화 등을 전시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 했죠. 제 개인전 < The Swamp >는 그가 기획한 첫 번째 전시입니다.
신작 3점을 전시하셨죠? 네. 전시공간의 특징을 살릴 수 있도록 현장성이 돋보이는 작업을 선보이기로 마음먹고, 신작 3점으로 전시를 구성했죠. 같은 평면이라도 되도록 다른 매체로 작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Plates’는 크로아티아에서 대량생산한 산업용 중국 식기를 표현한 판화 시리즈고, ‘Shadows’’는 전시장에 드리운 그림자를 분필로 따라 그린 3차원 드로잉이었습니다. 전시 제목과 같은 ‘The Swamp’는 바닥에 그린 회화입니다. 모두 건축의 내·외부에 반응하는 작품이었습니다.
‘Shadows’의 작업 방식이 특히 흥미롭네요. 그림자 위로 그림을 얹는 과정에서 의외의 결과물이 나올 것 같아요. 물론 새로운 방식이긴 하지만, 결과물은 예측 가능했어요. 미리 예측하고 계획한 다음 작업을 시작했거든요. 제 상상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작품이 탄생해서 상당히 만족스러웠죠.
1980년대에 영화 제작자로도 활동하고, 아티스트로서 회화와 영화를 오갔습니다. 예술가로 진로를 결정하기까지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처음에 회화 작업을 할 때 모든 것이 너무 실존적이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시점이 있었어요. 때로는 숨이 막히는 순간도 있었죠. 그때 한 친구가 슈퍼 8 카메라를 제 손에 쥐여주더군요. 그때부터 영화를 찍기 시작했습니다. 그다음엔 16mm로 찍다가 결국 촬영 팀을 이끌고 35mm로 촬영했어요. 진짜 영화를 제작할 계획도 물론 있었지만 재정적인 이유로 중단해야 했어요. 하지만 영화 제작에 도전하면서 한 가지 얻은 것이 있습니다. 나 자신과 내가 만들고자 하는 이미지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만들 줄 알게 됐습니다. 결국 영화 작업이 저를 회화로 돌아오게 한 거죠. 영화가 오히려 회화 작업에 더욱 몰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셈입니다.
그래서인지 작품에서 영화의 영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영화적 기법을 회화에 끌어오곤 합니다. 대표적 영화 기법인 클로즈업을 회화에 적용하기도 해요. 그 덕분에 이미지를 색다른 방식으로 편집할 수 있죠. 클로즈업 외에도 시퀀스, 프레임 등 세세한 영화 기법을 포괄적으로 사용합니다.

4Secrets, Oil on Canvas, 52×37cm, 1990, Private Collection
5The Arena, Oil on Paper, Tracing Paper, Photograph, Wood, 60.5×78.8cm, 1978, Private Collection

6 9·11 테러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 ‘Still Life’(2002년).
7Schwarzheide, Oil on Canvas, 60×70cm, 1986, Private Collection, Belgium
작품에서 사람, 일상, 정치적·사회적 이슈 등을 다양하게 다루는데, 주제 선정은 어떻게 하나요? 저는 예술 작품이 항상 무언가에 대한 일대일 대응이나 반응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회화는 그렇듯 단순하게 작용하지 않아요. 작품엔 항상 다양한 레이어를 담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작품에서 정치적·사회적 이슈나 일상을 다룰 때 그 안에 되도록 절제된 방식으로 여러 겹의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그동안 홀로코스트, 오클라호마시티 폭탄 테러, 9·11, 블랙 시트 등 민감한 주제를 주로 다뤘습니다. 주제도 마찬가지지만 주제를 다루는 방식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특히 9·11을 이야기한 작품 ‘Still Life’는 주제를 알아차릴 수 없게 숨겨놓았죠? ‘Stil Life’는 아마 제 작품 중 가장 비정치적인 동시에 정치적 작품 중 하나일 겁니다. 저는 뉴욕에서 9ㆍ11 테러가 발생한 당시 아내와 함께 근처 호텔에 있었습니다. 호텔 안에서 비행기가 현장으로 날아드는 장면을 보았죠. 하지만 그 경험을 작품에 그대로 표현하진 않았습니다. 직접적 반응을 피하고 간접적으로 드러내고자 노력했어요. 건물로 날아오는 비행기의 이미지를 반복해 재현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 대신 서정적인 화풍의 정물화를 그렸습니다. 애매모호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제가 담는 주제나 작품의 배경, 레퍼런스를 관람자가 꼭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관심이 가는 주제가 있나요? 요즘 흥미를 느끼는 주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딥 웹(deep web)입니다. 딥 웹은 ‘접근하기 어려운, 보이지 않는 웹’을 말합니다. 누구나 접속할 순 없는 웹이에요. 지난 미국 대통령 선거를 통해 딥 웹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지난 대선에서는 소셜 네트워크의 역할이 결과에 큰 영향을 미쳤죠. 당시 누군가 딥 웹에서 허위 정보를 퍼뜨렸습니다. 그리고 그게 유권자에게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죠.
특유의 톤 다운된 색채와 색조가 작품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저는 주로 미세하고 옅은 컬러를 사용합니다. 색채만큼이나 형태와 경계선도 모호하죠. 아마 관람자가 제 작품을 감상한 다음 어떤 그림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긴 어려울 겁니다. 이미지와 컬러가 흐릿하니까요. 앞서 말한 것처럼 저는 주제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표현 방식을 좋아합니다. 주제를 드러낼 때 상당히 절제하죠. 그런 의미에서 제가 쓰는 옅은 색감은 인간의 뇌에 잠입해 기억을 불완전하게 만듭니다. 그만큼 제 작업에서 컬러는 핵심적 역할을 수행해요.
작품에서 컬러만큼 이미지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특히 미스터리한 이미지가 상징적입니다. 그런 이미지는 어떻게 수집하고 활용하나요? 제 작품에선 이미지가 아주 중요합니다. 처음에 작업과 관련이 있거나 중요한 키가 될 수 있는 이미지를 찾는 작업을 반드시 거칩니다. 적당한 이미지를 찾는 데 몇 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하기도 해요. 정작 그림을 그리는 시간보다 이 과정에 더 오랜 시간을 쏟을 때도 많아요. 보통 이미지는 아이폰으로 찍거나 회화, 축소 모형, 웹사이트 등 다양한 소스에서 가져옵니다. 그런 다음 이미지를 완벽하게 분석할 수 있을 때까지 컴퓨터에서 변환하죠. 이런 과정을 충분히 거친 다음 비로소 회화 작업에 돌입합니다.

8The Arena III, Oil on Canvas, 169×242cm, 2014, Andrew Xue Collection, Singapore
9 Ballone, Oil on Canvas, 185.6×151.2cm, 2017

10 Interior Nr. II, Oil on Canvas, 204.4×156.1cm, 2010, Private Collection
11Doha I, Oil on Canvas, 147.4×231.8cm, 2016
작품의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나요? ‘폭력’에서 얻습니다. 폭력에는 상당히 많은 유형이 있어요. 물리적·성적·감정적· 경제적 폭력 등 다양한 폭력이 존재하죠. 어떤 의미에선 폭력이 행복보다 뇌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폭력의 속성이 특히 흥미롭습니다.
지난 아트 바젤 홍콩에서 선보인 작품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미술관과 아트 페어에서 두루 인기 있는 작가로, 그만큼 작품성과 흥행성을 동시에 인정받은 셈입니다. 미술관과 미술 시장을 구분하는 예술가도 있죠.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예술계와 예술계를 둘러싼 주변 환경, 그리고 미술 시장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술 작품 자체로 본다면, 그 둘은 어쩌면 별개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나는 내 작품이 아니고 나의 작품은 내가 아니다’라고 구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동안 큐레이터로서 여러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이끌기도 했죠. 화가가 아닌 큐레이터로 일할 때 느끼는 매력이 궁금합니다. 제가 전시회를 기획하겠다고 먼저 요청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항상 큐레이팅을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죠.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 최대한 작품과 작품의 관련성을 높이려고 노력합니다. 예술가로서 전시를 열 때, 큐레이터로서 전시를 열 때 차이점이 극명해요. 큐레이팅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예술가의 입장이 아니라 큐레이터로서 색다른 관점으로 작품을 보고 선정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좀 더 시각적 기준으로 작품을 분류할 수 있죠. 하지만 앞으로 계속 전시 기획을 할지는 모르겠어요. 상황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현시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회화의 가장 큰 매력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그런 평가를 들을 때면 기분이 아주 좋죠. 제 생각에 회화는 항상 시간과 함께, 시간을 통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작용하는 예술입니다.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회화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요? 회화는 디지털 이미지에 대한 완벽한 해독제죠. 올가을, 작품집 발간을 앞두고 있습니다. 기대가 클 것 같아요. 제 카탈로그 레조네 3부작 중 첫 번째 책입니다. 1권엔 1978년부터 1994년까지 작품을 담을 거고, 올해 안에 출판할 계획입니다. 2·3권에는 1994년부터 현재까지 작업한 작품을 담으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아트나우> 독자를 위해 앞으로 계획을 공유해주세요. 2019년 베니스의 팔라초 그라시(Palazzo Grassi)에서 <라 펠(La Pele)>이라는 대규모 전시회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2년 동안 긴 준비 기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라 펠’은 쿠르치오 말라파르테(Curzio Malaparte)가 1949년에 출간한 동명 소설에서 제목을 따왔습니다. 의역하면 ‘피부’라는 의미입니다. 당분간은 이 전시 준비에 몰두할 생각입니다.
뤼크 튀이만
1958년에 벨기에에서 태어난 뤼크 튀이만은 1994년부터 데이비드 즈워너의 전속 화가로 다수의 개인전을 열었다. 2001년 베니스 비엔날레 벨기에 국가관 대표 작가로 참가하고, 2002년엔 도쿠멘타 XI에 참여하는 등 굵직한 국제 행사에서 연이어 러브콜을 받았다. 최근 안트베르펜 MAS(Museum Aan de Stroom)와 런던 국립초상화미술관(National Portrait Gallery), 몬트리올 비엔날레 등에서 작품을 선보인 그는 가히 살아 있는 회화의 거장이라 할 만하다. 고온의 불로 흙이 품은 오묘한 색을 피워내는 흑자를 빚는 도예가. 롯데갤러리와 키아프 등에서 전시를 열었다. 2016년 지역 명사와 함께하는 문화 여행 명사 10인에 선정되었다.
에디터 백아영(xiaxia@noblesse.com)
사진 제공 데이비드 즈워너(David Zwir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