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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 예술의 힘

ARTNOW

뭐든지 빨리 만들고 소비되는 시대에 평생을 한결같이 예술적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채우며 살아온 작가들이 있다. 도예가 김시영은 물과 불, 흙을, 목수 이정섭은 나무와 쇠를 주제로 재료 본연의 성질을 극대화해 작품을 만든다. 두 작가는 지난 8월 10일부터 23일까지 백악미술관 전시 에서 그 치열한 연구의 결과물을 공개했다. 두 작가를 강원도 홍천에서 만났다.

1 흑자를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도예가 김시영.   2 나무의 결과 질감을 살린 견고한 가구를 제작해온 목수 이정섭.

지난 8월 도예가 김시영과 목수 이정섭이 공동으로 참여한 백악미술관 < From Raw Material To Art Work > 전시 작품.

서울에서 차를 타고 1시간 거리인 강원도 홍천. 잠깐 달렸을 뿐인데 어느덧 회색 빌딩은 사라지고 초록빛 들판이 온 세상을 이룬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려 도착한 곳은 도예가 김시영의 작업실. 넓은 터에 작품을 진열한 갤러리, 도자기와 어우러진 아기자기한 토담집은 오직 예술을 위해 탄생한 공간임이 틀림없다. 갤러리에서 그의 신작을 감상하고 다시 1시간을 달려 목수 이정섭의 내촌목공소로 향했다. 인적 드문 시골길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 즈음 담백하고 간결한 멋이 흐르는 한옥이 보였다. 숲 내음을 맡으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으려니 어느새 김시영 도예가가 도착했다. 이 여정은 흑자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도예가 김시영과 나무의 원형을 찾는 목수 이정섭을 만나기 위해 시작됐다.

도자기와 가구, 도예가 김시영과 목수 이정섭의 공동 전시라니, 흥미로운 조합입니다. 어떻게 두 분이 같이 전시할 생각을 하셨나요?
김시영(이하 김)/ 2년 전쯤 정영목 서울대학교 미술관 관장님의 소개로 서로 알게 됐습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정영목 관장님이 이 목수와 같이 전시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길래 재미있을 것 같아 흔쾌히 하겠다고 했지요.

김시영 작가님은 자유로운 감성적 접근, 이정섭 작가님은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냉철한 이성을 바탕으로 작업하시잖아요. 그래서 이번 전시 준비 과정이 더욱 궁금합니다.
김/ 물론 접근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결국 하나의 지점에서 만난다고 생각합니다. 직접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작품 그 자체가 예술의 영감으로 작용하니까요.
이정섭(이하 이)/ 주제에서 이미 교감하는 지점이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을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죠. 김 작가님에 대한 믿음이 있고, 저희 둘이 어떤 조화를 이루는지 판단하는 것은 관람객의 몫입니다.

3 흙이 가진 재료 본연의 특성을 살린 김시영의 도자기.   4 투박한 질감과 비대칭적 형태가 돋보이는 달항아리 시리즈.

5 흙이 품은 오묘한 색을 이끌어낸 찻잔 세트.    6 응축된 자연의 에너지를 품은 김시영의 도자기.

김시영 작가님은 물과 불, 흙, 이정섭 작가님은 나무와 쇠를 다루시잖아요. 이번 전시에서 강조하고 싶은 재료의 속성은 무엇인가요?
김/ 저는 물과 불, 흙의 불예측성에 주목합니다. 지역별로 물과 흙의 성격이 다르고, 불의 온도와 종류에 따라 도기자는 수백 번 변화해요. 재료를 탐구하고 연구하는 과정을 거쳐 고뇌와 환희, 찰나까지 담아낼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 것은 매력적이죠.
이/ 2002년 내촌목공소를 설립한 후 27채의 집을 짓고, 크고 작은 목가구를 만들었습니다. 그동안 나무 본연의 색감과 질감을 구현해 가장 나무답게 보이는 일에 몰두해왔는데, 어느 순간 ‘나무는 증명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나무가 아닌가’하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는 나무와 쇠의 본질적 힘에 주목하고 싶었습니다. 자르고 깎으려는 나와 저항하는 나무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작품에 담고 싶었죠. 불규칙한 단면은 그 치열한 대결의 흔적입니다. 쇠는 3년 전에 연구를 시작했다가 그만뒀는데 다시 관심을 갖게 됐어요. 쇠는 나무에 비해 훨씬 많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만큼 저항과 긴장감도 엄청납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정성을 들인 작품은요?
김/ 거친 돌 표면을 연상시키는 투박한 질감과 비대칭적 형태, 파형적 패턴을 담은 달항아리를 전시할 계획입니다. 물과 불, 흙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자연적인 형태를 찾고 싶었어요.
이/ 탄화목을 이용해 만든 고비와 서랍장 등 엄격한 비례를 지닌 이전 가구들과 물성 자체로 감흥을 주는 쇠·콘크리트 등을 이용한 최근작을 함께 선보일 예정입니다.

김시영 작가님은 평소 고온의 불로 흙이 함유한 광물질의 오묘한 색을 피워내는 작업에 집중하지만 이번엔 질감과 형태의 변화를 통해 자유로움과 강한 에너지를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김/ 불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도자기의 형태에 대한 의문이 생겼어요.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도자기가 과연 도자기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산과 돌 등 자연에 존재하는 사물도 완벽한 형태를 이룬다기보다는 불완전하지만 그 자체로 아름다운 거잖아요. 기능성보다는 자연스러운 작품성에 집중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불의 온도를 좀 더 높였는데, 매끄러운 도자기가 아니라 화산이 폭발했거나 달에서 떨어진 듯한 생명력 넘치는 도자기가 탄생하더군요.

결과 못지않게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김/ 재료의 성격을 30년 넘게 탐구해왔지만 여전히 저에겐 미지의 세계입니다. 변화를 즐기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작품을 만들 수 없죠. 그것이 곧 창조로 이어지는 것이니까요.
이/ 당장 성과가 드러나지 않더라도 정직한 노동을 통해 얻는 소소한 발견이 있어 예술이 지금껏 존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오랫동안 정성을 들이는 지지부진한 과정, 그건 인간의 원초성에 기대는 유의미한 행위라고 할 수 있죠.

긍정적 변이의 과정으로 봐야겠네요?
이/ 그렇죠. 물질의 속성 자체를 넘어 변질되고, 결국엔 상징성을 지닌 예술품을 창작하는 거니까요.

7 나무의 결과 질감을 살린 목가구.    8 수납장, 고비 등 나무의 본질적 힘에 주목한 이정섭의 작품.

9 탄화목으로 만든 사방탁자.    10 < From Raw Material To Art Work > 전시에서 선보인 이정섭의 ‘Flat’   

모든 사람, 사물이 예술이 될 수 있고, 가짜와 진짜의 차이가 무색한 시대에 살고 있잖아요. 그럼에도 한결같이 고된 노동으로 사물의 원형을 찾아가는 작업에 몰두하는 모습이 대단하게 여겨집니다. 작가님이 생각하는 예술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김/ 예술은 정해진 틀이 없어요. 항상 새롭게 변화하고요. 무한한 가능성이 주는 자유로움을 느끼는 거죠. 도자기를 빚을 재료를 찾아 작품을 만들고 사람들과 그 기쁨을 나누는 것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이/ 예술에 대해 거창하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물론 기술과 예술에 모두 관심을 쏟고 이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룬 전인적 인간, 더 나아가 행복한 사람을 많이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면 좋겠죠. 하지만 예술이 완벽하게 구현된 세계는 유토피아 아닐까요? 저에게 예술은 이정섭이라는 존재를 견디는 방식 중 하나예요.

오랫동안 작업을 해오셨는데 여전히 20대의 열정이 보여요. 영감의 원천은 무엇인가요?
김/ 글쎄, 호기심이랄까요. 우리 호기심이 가득해 보이지 않아요?(웃음) ‘희미한 능선을 넘어가면 어떤 산이 나타날까?’하는 의문을 품죠. ‘우선 저기까지는 가봐야지’ 생각하고 산을 향해 걷는 겁니다. 진귀한 광경을 볼 수 없어 실망하더라도 산이 보이면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다 예쁜 꽃을 보면 행복한거죠. 예술 활동을 하는 과정이 등산과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실제로 등산은 제 작업에 꼭 필요한 재충전 방법 중 하나예요. 그런 과정이 수반돼야 오래 멀리 갈 수 있으니까요.
이/ 저는 관절이 아파서 산을 타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에요. 영감의 원천은 특별히 없어요. 하지만 제 마음에 드는 조형적 형태를 찾고 싶은 예술적 열망 때문에 작업을 지속하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계획을 말씀해주세요.
김/ 세계를 누비며 흙을 채집할 생각이에요. 이번 전시를 계기로 도자기에 비를 맞히는 등 색다른 시도를 많이 하게 됐는데, 앞으로도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의 작업에 도전할 겁니다.
이/ 당분간 쇠와 콘크리트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지금 콘크리트와 금속을 이용한 13층탑을 제작 중이에요. 이집트 오벨리스크를 뛰어 넘는 조형적 완결미를 찾을 때까지 작업을 계속해야죠. 저의 인생 숙제입니다.

 

도예가 김시영
고온의 불로 흙이 품은 오묘한 색을 피워내는 흑자를 빚는 도예가. 롯데갤러리와 키아프 등에서 전시를 열었다. 2016년 지역 명사와 함께하는 문화 여행 명사 10인에 선정되었다.

목수 이정섭
정직하고 좋은 물건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단순하면서도 견고한 가구를 제작해왔다. 호림미술관과 신세계갤러리 등에서 전시를 열었다. 현재 쇠와 콘크리트를 주재료로 탑을 만드는 작업에 매진 중이다.

 

에디터 최윤정(amych@noblesse.com)
사진 J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