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페스티벌의 탄생
올해는 뮤직 페스티벌의 해가 틀림없다. 록, 뮤지컬, EDM 페스티벌 등 각기 다른 매력을 뽐내는 음악의 향연 속에서 꼭 ‘2017 지산 밸리록 뮤직앤드아츠 페스티벌’이어야 하는 이유.

권오상의 ‘New Structure’(2017년).
지난 7월 마지막 주, 2017 지산 밸리록 뮤직앤드아츠 페스티벌(이하 밸리록)을 기다리던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날씨였다.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를 애써 모르는 척하며 현장에 다다랐을 때, 캠핑 장비로 무장하고 밸리록을 향해 걷는 수많은 인파와 맞닥뜨렸다. 7월 28일부터 30일까지 3일간, 경기도 이천시 지산 포레스트 리조트는 록과 예술의 성지로 변모했다. 지산 밸리록 페스티벌로 시작, 안산으로 잠시 장소를 옮겼다가 뮤직앤드아츠 페스티벌이라는 새 이름과 함께 원래 자리로 돌아온 밸리록 덕분이다.
2017 밸리록엔 팝, 힙합, 재즈, EDM을 총망라한 실력파 뮤지션 100여 팀이 대거 출격했다. 아이슬란드 록 밴드 시귀르 로스(Sigur Ros)와 덴마크 밴드 루카스 그라함(Lukas Graham) 등 세계적 팀은 물론이고 이적, 지코, 자우림, 넬 등 대중적 인기를 구가하는 국내 뮤지션의 참여 또한 두드러졌다. 하지만 유명 뮤지션 리스트에서 유독 눈에 띄는 건 걸출한 시각예술가 홍승혜, 권오상, 권용주, 윤사비, 신도시, 노상호의 이름이었다. 올해 아트 프로젝트는 호경윤 아트 디렉터가 총괄하고, CJ E&M 아트크리에이션국이 입구와 무대 디자인을 맡아 미술이 페스티벌에 녹아들도록 조화를 꾀했다. 아트 프로젝트에 참여한 김재석 큐레이터는 “국내의 많은 뮤직 페스티벌과 차별화하기 위해 작년부터 아트를 접목했습니다. 작년에는 관객이 참여하는 워크숍 형식이 대부분이었지만 올해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시각적 임팩트를 주는 조형물을 선정했습니다. 국내외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대표적 현대미술 작가들이 전시장 밖에서 신작을 선보이고, 관객 수만 명이 음악과 미술 작품을 함께 관람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라고 행사의 의의를 밝혔다.

권용주의 ‘폭포’(2017년).
때마침 메인 스테이지에서는 레이니(Lany)가 공연을 펼치고 있었다. 관객들이 잔디밭에서 편안한 자세로 미국의 신예 팝 밴드가 들려주는 감성적 음악을 즐기는 장면 사이로 권오상 작가의 작품이 보였다. 2차원 사진을 3차원 조형물로 구현하는 그는 최근 몰두하고 있는 ‘New Structure’ 시리즈를 재해석, 이번 밸리록에 출연한 뮤지션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조합했다. 빼곡히 들어찬 사람들이 작품에 기대 눕거나 앉아 있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만났을 때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작품의 안전을 보장하는 미술관을 벗어나, 수많은 사람이 지나는 곳에 작품을 설치하는 건 어쩌면 작가에게는 큰 도전이다. 하지만 바리케이드 없이 관람자의 동선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낯선 감상법이 반가운 건 비단 나만이 아닌 듯했다. 권오상 작가는 “관람객이 작품을 일방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으면 좋겠어요. 제 작품은 평면이 아닌 입체니까 관람자가 더 적극적으로 경험하길 바랍니다. 사람들이 작품 안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도 보고 싶네요”라고 말했다. 실제로 사람들은 작품과 하나로 뒤얽힌 채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으니 그의 목표는 달성한 셈이다. 메인 무대 가까이에 대표작 ‘폭포’를 설치한 권용주 작가도 같은 의견을 전했다. 그는 사람들이 폭포에서 물을 튀기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작품이 페스티벌 안에서 관객과 함께 살아 숨 쉬길 원했다. 평소 길거리에 버려진 가구, 천막, 화분 등의 사물로 폭포를 만들던 작가는 이번 행사를 위해 무지개 빛깔의 거대한 인공 조형물을 설치했다. 스프링클러, 파라솔 같은 인공적 재료와 현란한 컬러를 부각하는 등 외부에서 처음 폭포를 선보이는 만큼 시각적으로 다양한 경험을 제공했다.
두 작품을 오가며 음악과 미술이 만들어내는 하모니에 녹아들 때쯤, 사람들이 똑같은 카드를 들고 다니는 걸 발견했다. 알고 보니 현장에선 신용카드나 현금을 쓸 수 없고 오로지 티머니 카드로만 결제할 수 있었던 것. 게다가 일반적 티머니 카드가 아니라 노상호 작가와 컬래버레이션해 새로운 디자인을 입힌 카드였다. 일상의 이미지를 채집해 드로잉하는 ‘데일리 픽션’ 시리즈로 유명한 노상호 작가는 곳곳에서 공연을 즐기는 관객의 모습을 카드에 그렸다. 3000원이라는 티머니 카드값만 지불하면, 작가의 작품을 소장할 수 있는 셈이다. 컬렉터라도 된 양 들뜬 기분으로 카드를 들고 먹거리를 찾아다니다, 계곡 사이에서 뜻밖에 독특한 바(bar)를 맞닥뜨렸다. 현장에 가득한 푸드 트럭 중 하나인 줄 알았는데 ‘신도시’의 설치 작품이었다. 미술가이자 음악가인 이병재와 사진가 이윤호가 결성한 신도시는 서울 을지로에 있는 바의 이름인 동시에 아티스트 팀명이다. 아트 프로젝트에 2년 연속 참여하는 유일한 팀인 신도시는 작년 밸리록에서 좋은 반응을 끌어낸 ‘Hidden Bar’를 다시 한번 선보였다. 올해는 숲속에서 계곡으로 장소를 옮겨 그만큼 관람객과 더 가까워졌다. 낮에는 조용한 바이자 설치미술 작품이지만 매일 자정엔 ‘영시의 디제잉’이라는 DJ 부스로 변모하며 ‘페스티벌 속 페스티벌’의 진면목을 드러낸 작품이다.

1 윤사비의 ‘프리즘’(2017년). 2 2017 밸리록의 무대 중 하나인 ‘그린 팜파스’.
잠시 바에 앉아 숨을 돌렸다면, 이제는 무대 위 주인공이 될 차례다. 윤사비 작가는 관객을 위한 작은 무대 ‘프리즘’을 만들었다. 기존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추상적 기호는 그대로 두되, 사람들이 만지고 기댈 수 있는 작품을 시도한 것. 유명한 가수의 무대를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라 관객도 원형 구조물에 앉아 오로지 자신만을 비추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작품이다. 관객이 너나없이 조형물에 걸터앉거나 배경 삼아 사진을 찍으며 무대 즐기기에 여념이 없는 풍경 뒤로 만일 겨울이라면 스키를 타는 이들로 북적댔을 스키 슬로프가 텅 비어 있었다. 그 자리에 작품을 들여놓은 건 홍승혜 작가다. 승리를 뜻하는 빅토리(victory)와 밸리록의 머리글자 V를 형상화한 ‘Victoria’는 작가의 시그너처인 여성 모형의 픽토그램이다. 형상은 기존 작품과 같지만 처음으로 움직임을 시도하고 사이즈도 커졌다는 점이 관람 포인트다. 전동 모터를 이용한 구조물은 천천히 양팔을 위로 움직여 하늘을 향해 V를 그렸다.
여섯 작품은 각기 다른 형태로 페스티벌 현장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음악을 즐기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작품 앞에 서 있게 될 정도로 일일이 작품을 찾아다니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3일간의 페스티벌이 끝나면 작품도 철수한다는 점이 못내 아쉽지만, 페스티벌과 맥락을 같이하는 이러한 일시성도 여느 행사와 차별화되는 요소다. 밸리록이 아트 프로젝트를 선보였을 때 단순히 페스티벌의 차별화를 위해 예술을 소도구로 이용했다는 의구심을 품은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만난 한 관객은 “청각과 시각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풍성한 페스티벌이었어요. 참여한 작가들의 전시를 다른 곳에서도 보고 싶을 정도예요”라는 감상을 전했다. 예술을 보고 만질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한 밸리록의 다음 아트 프로젝트는 무엇일까? 벌써 내년이 기다려진다.
에디터 백아영(xiaxia@noblesse.com)
사진 제공 CJ 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