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을 본다
여전히 종이 신문은 유용하다.

주말 아파트는 한산했다. 지층처럼 빼곡하던 주차 라인은 곳곳에 이가 빠져 있고 가방을 짊어진 아이들의 행렬도 없었다. 몇 주 미뤄둔 재활용 분리수거를 한창 하고 있을 때 상가 입구에 중년의 남자가 좌판을 펼쳤다. 그는 느릿느릿 테이블 위로 유아 자전거와 전기밥솥, 등산화 같은 남루한 물건을 꺼내 쌓았다. 그리고 ‘OO일보 구독 시 현금 지급’이라는 꼬질꼬질한 현수막을 긴 플라스틱 막대에 끼웠다. 익숙하고 지루한 풍경이었다. 난 종이 신문 수십 개를 수거함에 넣었다. 수거함은 택배 상자와 아이들 학습지, 치킨 박스로 가득했다. 몇만 원을 받고 신문을 볼 사람도, 버릴 신문도 없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종이 신문을 보지 않는다. 대신 스마트 디바이스에 코를 박고 거리를 걷는다. 지하철이나 버스 좌석에 앉아 5인치 액정으로 세상을 읽는다.
종이 신문을 본다. 대학 때부터 봤으니 15년쯤 됐다. 언론에서 한창 ‘신문을 봐야 제대로 사는 것’이라는 투로 떠들어대던 때였다. 파병이나 FTA 등의 정치 이슈가 많았고 논술이다, 조기 경제 교육이다 해서 고등학생 책가방에도 신문이 꽂혀 있던 시기다. 내 경우 시작은 일종의 지적 허영이었다. 대학 신입생 때 소설가 김훈의 특강을 들었다. 책이 너절해질 때까지 <칼의 노래>를 읽은 터라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숙취에도 이를 악물고 자리를 지켰다. 그는 낡은 갈색 브리프 케이스와 돌돌 말린 신문을 들고 강단에 올랐다. 김훈은 달변은 아니었다. 대신 말과 말, 문맥과 문맥 사이 자주 끊으며 문장 쓰듯 신중하게 말했다. 주제는 글쓰기. 김훈은 “세상을 읽고 글로 다루는 것엔 훈련이 필요합니다. 신문은 교과서와 같습니다. 다양한 시각과 함께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줍니다”라고 강연 말미에 말했다. 평생 단 한 문장이라도 그처럼 쓰고 싶었던 나에겐 복권 번호 점지보다 절실하게 들렸다. “지식인의 소양은 신문에서 나온다”라는 카뮈의 말도 한몫을 했다. 지식인이라니! 그건 세상에서 가장 진중한 고민에 골똘한 남자를 일컫는 말 같았다. 그날 오후 종합 일간지와 경제 신문 2개를 신청했다.
인쇄 매체의 종말
신문 읽기는 생각처럼 멋진 일이 아니었다. 되레 고통스러웠다. 곳곳에 쓰인 한자와 짧고 딱딱한 문장은 독해조차 어려웠고, 정치·사회·경제 이슈는 정말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생경했다. 읽은 날보단 액세서리처럼 들고 다니거나 식탁보로 사용한 날이 더 많았다. 읽는 행위 자체도 문제였다. 지하철이나 버스, 도서관같이 좁은 곳에서 대판 신문을 보는 건 쉽지 않았다. 엉뚱한 부분이 접히고 바닥으로 떨어지고, 다음 면으로 넘길 땐 온갖 괴상한 자세를 취해야 했다. 지금은 8분의 1로 접어 볼 수 있는 신공이 생겼지만,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스마트 디바이스는 편리하다. 빠르고 직관적이다. 속보가 시시각각 포털 사이트나 SNS를 통해 업데이트된다. ‘구독’하지 않고 ‘훑기’만 해도 세상이 보인다. 신문을 사서 읽는 행위는 액정 위 몇 번의 터치로 생략된다(심지어 가격도 싸다). 지구 반대편 국가에서 미사일을 쏘면 수분 내로 기사가 오른다. 영국 왕자가 먹은 점심 메뉴가 저녁엔 전 세계로 뿌려진다. 보통 1판을 오후 4시에 마감해 다음 날 날짜로 내보내는 신문의 뉴스는 묵은 것이 되는 세상이다. 신문은 불편하다. 문턱이 높고 훈련이 필요하다. 세상의 속도에 맞출 수 없는 매체가 된 것이다. 이미 21세기 진입로부터 종이 신문은 종말을 맞을 것이라는 예견이 많았다. 최근 종합 일간지들이 인터넷으로 보도 채널을 옮기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신문은 여전히 유용하다. 들춰볼 가치가 있다.
종이 신문의 유용성
신문을 구독하고 반년쯤 고역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이후엔 점차 글이 눈에 들어왔다. 편집 의도가 읽혔고 기사의 논조가 만져졌다. 많은 것이 변했다. 먼저 지식의 범위가 넓어졌다. 유럽 연합이 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분쟁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세계 통화·금융정책을 전개하는 방법까지 얕게나마 알게 됐다. 이러한 경험은 세계를 확장한다. 반도에서 아시아로, 유럽에서 북미로 영역은 점차 넓어진다. 거기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담긴다. 단순히 파편적 지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외교정책이나 통상, 보안까지 현실적 영역에 대한 판단 기준도 생긴다. 세계를 이해하는 품이 넓어지는 것이다. 나아가 예술이나 문화를 접할 때에도 해석의 폭이 달라진다. 모든 예술과 문화는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는 까닭이다.
둘째, 입체적 사고가 가능해졌다. 인터넷 기사는 유용하지만 자칫 사고가 경직될 우려도 있다. 현재 포털 사이트와 SNS의 뉴스 서비스는 선택적 구독 형태다. 자신이 고른 매체와 필자의 글에 대한 피드백을 받는다. 성향과 취향을 고려한 뉴스 큐레이팅인 셈이다. 이러한 디지털 편식은 편협한 사고를 낳을 수 있다.
인터넷엔 무수한 뉴스가 있지만, 더 많은 선택이 되레 빈곤을 야기할 때도 있다. 신문엔 여러 목소리가 담긴다. 보수적 성향의 논객이나 리버럴한 정치 평론가까지 이념과 성향, 가치가 다른 여러 주장이 실린다. 이는 사고의 영역을 넓혀준다. 기울어진 판단을 방지하고 합리적 기준을 만들어준다.
셋째, 특정 사안에 대한 심도 있는 성찰이 가능해졌다. 사회적 담론에 대해 신문은 인터넷보다 더 깊이 파고든다. 인터넷에서 텍스트는 점차 짧게 증발되고 있다. 스크롤 구독은 독자들이 짧은 글에 익숙해지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시각적으로 타이트한 텍스트를 외면한다. 이러한 세태 때문에 인터넷 기사는 대부분 원고지 3~5매 분량이다. 정보 제공만으로도 빡빡한 양이다. 반면 신문은 지하로 내려간다. 정보 제공은 물론 배경, 관계자의 코멘트, 찬성과 반대론, 전문가 논평까지 조금 더 깊은 사고의 공간을 만들어준다. 이 과정은 종이 신문의 묘미인 ‘편집’과 맞물려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1면에서 특정 이슈를 던지고 2면과 3면, 길게는 5면까지 이어 ‘조금 더 들어가는’ 보도를 한다. 이렇게 얻은 정보는 제법 단단하게 뇌리에 남는다. 형체가 또렷하고 의견이 생긴다.
넷째,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종이 신문은 보도 채널이자 사회적 광장이다. 뉴스뿐 아니라 정치·사회·경제·문화 전반에 대한 치열한 논의가 벌어지는 곳이다. 힙합 가수부터 사회학자까지 여러 필자의 목소리가 실린다. 살면서 단 한 차례도 마주칠 것 같지 않은 공간을 엿보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나라는 세계를 확장시킨다. 타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힌다. 선험성은 종이 신문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값진 체험이다.
세상이 변했다. 기술이 발전했고 삶이 바뀌었다. 뉴스도 변곡점에 서 있다. 아마도 종이 신문은 인터넷과의 싸움에서 패할 것이다. 뉴스(news)의 속성상 가까운 시일 내에 모든 보도는 인터넷으로 모일 것이다. 그러나 종이 신문은 여전히 유용하다. 나를 확장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이며 세계와 이어주는 고리다. 그것의 활용 여부는 온전히 당신에게 달렸다.
에디터 조재국(jeju@noblesse.com)
사진 최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