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바로 재즈
데뷔 20주년을 앞둔 재즈 보컬리스트, 말로. 그녀가 생각하는 재즈는 그리 먼 곳에 있지 않다.

말로는 나윤선, 웅산과 함께 국내 3대 재즈 디바로 손꼽히는 보컬리스트다. 음과 리듬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노는 화려한 스캣(scat)이 그녀의 트레이드마크. 그래서 항상 ‘한국의 엘라 피츠제럴드’나 ‘스캣의 여왕’ 같은 꼬리표가 붙는다. 하지만 그녀의 라이브 무대를 보게 된다면, 이런 수식어로 그녀를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단 사실을 깨닫게 될 거다. 즉흥연주와 스윙 필링이라는 몇 단어로 재즈를 선뜻 정의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말로는 다섯 살에 처음 피아노를 쳤고, 중학교 1학년에 혼자 기타 코드를 깨쳤다. 학교 행사 때마다 도맡아 노래한 그녀는 대학에 가서도 아르바이트 삼아 통기타를 메고 포크송을 불렀다. 작곡에도 소질이 있어 3학년 땐 유재하음악경연대회에서 자작곡 ‘그루터기’로 은상까지 받았다. 음악에 대한 열정과 재능은 진작부터 넘쳤지만, 의외로 그녀는 물리학을 전공했다. 음악은 굳이 배우지 않아도 잘했지만, 물리학은 혼자 공부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그런 음악에 대한 자부심에 스크래치를 낸 것이 바로 재즈다. “우연히 존 콜트레인이란 연주자의 곡을 들었는데, 어떤 음악인지 파악이 안 되는 거예요. 다른 음악은 한번 들으면 카피할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게 대체 무엇인지 알아야겠다는 오기가 생긴 거죠.”
재즈를 제대로 배우겠다는 일념에 대학 졸업 후 미국 버클리 음악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거기서 그녀는 한국에선 배울 수 없었던 재즈의 즉흥연주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졸업장은 따지 않고 돌아왔다. 학교를 끝까지 다닐 필요가 없었다는 게 그 이유. 당찬 그녀의 성격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마침 그녀가 귀국한 1990년대 중·후반은 한국에 재즈 붐이 일던 때였다. ‘천년동안도’나 ‘Once in a Blue Moon’ 같은 재즈 클럽이 생기며 괜찮은 연주자와 보컬을 구하기 시작한 것. 그 덕분에 재즈 보컬리스트로서 갓 활동을 시작한 그녀 같은 초짜도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말로가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건 2003년에 발표한 3집 앨범 <벚꽃지다>를 통해서다. 재즈곡은 영어 가사라는 통념을 깨고 앨범 전체를 한국어로 구성, 한국적 재즈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어로 된 스탠더드 재즈곡을 부르면 외국인만 알아듣고, 한국인에겐 감정이 잘 전달되지 않았죠. 그때 내가 누구를 위해 노래하는 것인가 곰곰이 생각하게 됐어요.” 또 그녀는 2010년 앨범 <동백아가씨>와 2012년 < Malo Sings Baeho >를 발표, 전통 가요를 재해석하는 ‘K-스탠더드’를 정립하는 작업도 하고 있다. “보통 무대에 서면 스탠더드 재즈와 창작곡 사이에 전통 가요를 불러요. 그런데 어느 날 무대 뒤에서 전통 가요만 한꺼번에 듣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흘러간 노래 중 재즈의 선율에 잘 어울리는 곡을 골라 다시 해석하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2014년에 발표한 6집 정규 앨범 <겨울, 그리고 봄>은 재즈를 근간으로 누에보 탱고, 삼바, 아라빅 사운드 등 다양한 민속음악의 어법을 빌려온 것이 돋보인다. 그간의 작업을 돌아보면, 그녀는 재즈라는 큰 틀 안에서 다양한 변주를 시도하고 있는 셈. “예전에는 ‘재즈라면 이래야 한다’는 일종의 고정관념이 있었어요. 한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경계가 점점 희미해졌죠. ‘재즈가 무엇인지 보여주겠다’기보단 ‘내 노래를 한다’는 느낌이 강해졌어요.”
작년 겨울부터 그녀는 자신이 운영하는 재즈 클럽 디바 야누스에서 주기적으로 소규모 워크숍 ‘재즈, 만나러 갑니다’를 열고 있다. 일반 강의처럼 재즈의 역사와 특징을 딱딱하게 살피기보다는 재즈곡을 감상하며 노래를 배우는 편한 분위기가 특징. 또 일요일마다 ‘잼(jam) 데이’를 열어 재즈 애호가들이 전문 뮤지션과 함께 무대를 꾸미는 자리도 마련한다. 그녀가 이러한 행사를 마련한 이유는 단순하다. 더 많은 사람이 재즈를 접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한국엔 재즈를 접할 수 있는 채널이 여전히 부족해요. 재즈 클럽도 적고, 재즈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라디오방송도 몇 개 없죠. 또 요새 사람들은 주로 인터넷으로 검색해 노래를 듣잖아요. 재즈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듣기가 쉽지 않죠.” 그렇다면 일반인이 쉽고 재미있게 재즈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재즈 뮤지션의 방송 출연이 그 답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물었지만, 그녀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재즈의 가장 큰 특징은 라이브예요. 멜로디가 정해진 게 아니라, 무대에서 뮤지션들끼리 실시간으로 교류하며 매번 다른 음악을 탄생시키죠. 그래서 재즈는 직접 보고 들어야 그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직접 해보면 더 좋고요.”
오는 10월 20일부터 사흘간 열리는 제14회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에서 말로는 한국 재즈계의 대모라 불리는 박성연과 함께 무대에 오른다. 박성연은 1970년대부터 활동한 국내 1세대 여성 재즈 보컬리스트이자 1978년 재즈 클럽 야누스(현 디바 야누스)를 열어 35년 이상 운영해온 국내 재즈 신의 산증인. 지병으로 근래엔 무대에 서지 않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모처럼 그녀가 노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공연이 성사된 데에는 그들의 오랜 인연이 한몫했다. “야누스에선 십 수년 전부터 노래를 불렀어요. 그러다 보니 클럽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됐죠. 클럽이 재정난을 겪는 걸 보고, 선생님께 제가 노래할 때는 출연료를 받지 않겠다고 했어요. 제가 먼저 다가가니 선생님께서도 마음을 여셨죠. 이후 무슨 일이 생기면 서로 상의하고, 자연스레 가까운 사이가 됐습니다. 재작년 선생님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클럽 운영도 대신 맡게 됐고요.” 이번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에서 박성연과 말로는 각각 노래를 부른 후, 마지막에 듀엣 무대를 꾸밀 계획이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보물이에요. 그간 겪어온 삶의 질곡, 인고의 세월이 투영되죠. 이번 무대는 그 목소리를 라이브로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가 될 겁니다.”
국내의 손꼽히는 재즈 보컬리스트로서 그녀가 생각하는 ‘좋은 재즈’란 무엇일까? “테크닉만 보면 젊은 뮤지션들도 굉장히 뛰어나요. 하지만 재즈엔 테크닉을 넘어서는 단계가 있거든요. 재즈 뮤지션은 기교로 관객의 감탄을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한 음 한 음에 진심을 담아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무대에 오르는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철학을 갖춰야 하고요.” 말로가 첫 앨범 < Shade Of Blue >를 발표한 게 1998년이니, 국내 재즈계에서 그녀가 활동한 지도 어느덧 20년이 다 되어간다. 특별 무대나 새 앨범 발표를 준비하고 있는지 물었지만, 그녀는 그런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말했다. “제겐 매주 있는 클럽 공연이 더 중요해요. 관객을 가까이서 만나고, 끊임없이 노래를 부르며 변화하고 발전하는 게 더 의미 있는 일입니다.” 말로의 무대를 감상하고 싶다면 서울 서초동의 디바 야누스에 가보자. 언제나처럼 그녀의 무대, 그녀의 재즈가 기다리고 있으니.
에디터 황제웅(hjw1070@noblesse.com)
사진 김잔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