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의 진화
음식에 담긴 건 결코 식자재만이 아니다. 자연과 삶, 나무, 바람, 물 등 세상의 스승이 다 담겨 있다. 강화도에 새로 터를 잡은 산당 임지호가 이에 대해 설명한다.

지난 7월 청와대. 대통령과 주요 기업인들이 모이는 ‘기업 간담회 호프 미팅’에서 대통령과 기업인들 사이로 낯익은 얼굴 하나가 보였다. ‘방랑식객’으로 불리는 산당 임지호였다. 이틀간 열린 당시 간담회에서 그는 몇 가지 독특한 안주와 식사를 내놓았다. 사실 이미 유명인사로 통하는 그가 청와대 간담회장에 모습을 보인 건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짧은 말은 다음 날 뉴스거리가 됐다. 호두와 땅콩 등을 부숴 만든 ‘원’이라는 안주를 두고 “씨앗은 모든 것의 시작이고, 그것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 생명은 없으며, 새 미래를 위해 이 자리가 씨앗과 같은 의미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한 것. 그리고 서로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수박과 치즈로 만든 요리를 두고 되레 “세상 모든 것은 조화를 이루고 삽니다”라고 한 마치 하나의 잠언 같은 말에 관한 기사 말이다. 이 인터뷰는 사실 그것에서 시작됐다. 오래전부터 ‘요리사는 수단일 뿐, 자연이 요리하는 것’이라는 자신만의 철학으로 요리 이상의 것을 이뤄온 그를 짧게나마 조명하기 위해.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곳은 강화도에 있는 ‘호정’이었다. 1998년부터 경기도 양평에서 운영해온 ‘산당’과 서울 청담동에 같은 이름으로 문을 연 식당을 지난 몇 년 동안 정리한 그는 지난해 이곳에 새 터를 잡았다. 양평과 청담동에 있던 식당은 그가 방송에서 보여준 ‘자연식’ 식단을 맛볼 수 있는 곳으로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공간 임대와 경영난 등의 문제로 최근 완전히 문을 닫았다. 그런 그가 이번엔 ‘정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늘 식자재를 찾아 여행을 다닌 탓에 ‘정착’이란 말은 좀처럼 쓰지 않던 그의 입에서 나온 말. “방랑식객으로 불리지만 이제 돌아다니기보다는 새벽에 장을 보러 가는 것에 만족합니다. 여긴 바다와 산, 들판의 산물도 풍부하고 새로운 재료도 많죠. 이제 강화도에 정착하려고 해요. 저 앞의 석모도가 재미있어요.”
올해로 예순둘. 청와대에 초청까지 받은 그지만, 그간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단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그는 11세 때 돈을 벌기 위해 일본 밀항을 시도했고 결국 그것에 실패해 부산과 전남 목포, 제주 등을 떠돌며 먹고살기 위해 온갖 허드렛일을 하다 요리를 배웠다. 그러면서 시골 중국집부터 유명 호텔의 한식당 조리장까지 지냈다. 하지만 지난 40여 년간 그는 한곳에 터를 잡고 식당을 운영하기보다 전국 각지를 떠돌며 자연 요리 연구에 더 몰두했다. 하늘 아래 온갖 재료를 활용해 사람의 몸과 맘을 물처럼 맑게 해주는 음식을 만들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기에 그에겐 천지에 널린 산천초목이 모두 요리 재료다.
그에 따르면 내 몸이라는 자연과 외부의 자연이 서로 교감하는 게 음식이기에, 세상에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는 없다.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식물이 품는 독성도 햇볕에 말려 묵히면 사라진다. 그래서 실제로 그는 나무의 수액이나 열매, 뿌리는 물론 낙엽과 이슬 같은 재료를 요리에 활용했고, 그럴 때마다 많은 이가 열광했다. 그의 이름 앞에 붙는 ‘방랑식객’이라는 수식도 사실 그렇게 생긴 것이다. ‘산당(山堂)’이라는 호에도 실은 ‘산에 집 짓고 자연에서 산다’는 뜻이 담겨 있다. “왜 그렇게 떠돌았느냐고요?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이 늘 궁금해서였죠. 하지만 결국 떠돌면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래도 돌이켜보면 고생이란 건 참 중요하더군요. 고생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깨달을 수 없으니까요. 스스로 깨닫는 건 고생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사람이 고생하지 않을 거면 왜 사나요?”
석모도의 푸르름이 보이는 호정의 2층. 그에게 요리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했으나 쉽지 않았다. 바다가 강 같고, 개울은 바다로 이어지는 그곳에서 그는 도리어 ‘삶’과 ‘바다’, ‘자연’ 같은 신선놀음에 가까운 단어만 내뱉을 뿐이었다. 하지만 따져보니 그는 애초에 자신의 음식을 세세히 설명하지 않는 이였다. 방송에서도 마찬가지. 그저 자신의 생각을 그릇에 담긴 음식으로 보여줄 뿐이었다. 어쩌면 그에게 따라붙는 ‘자연주의’나 ‘자연식’ 같은 표현도 매체들이 만든 건 아닐까? 예나 지금이나 그가 만드는 음식은 그저 ‘그의 음식’일 뿐이니 말이다. “우리가 길에서, 산에서, 들에서 만나는 모든 것이 저는 ‘대지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단순하게 표현하지만, 전 그동안 음식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늘 이 말을 가슴속에 담아왔죠. ‘맛있게 만드는 음식’요? 이런 말은 사실 잘못된 겁니다. 맛있게 만드는 게 결코 요리사의 일은 아니죠. 음식을 만들며 맛을 보는 것도 어색하고요. 맛을 보거나 맛있는 음식을 만들겠다는 것 자체가 ‘대지의 축복’을 거부하는 행위니까요.”
이어지는 선문답 같은 표현에 부연 설명을 요구하지만 그는 도리어 더 도망갈 뿐이다. 하지만 그게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잘나가는 요리사들이 으레 꺼내는 ‘신메뉴 개발을 위한 해외여행’이나, ‘식자재 본연의 맛을 잘 살릴 수 있는 조리법’ 같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를 찾은 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그가 구현하는 ‘대지의 축복’은 요리 말고도 한 가지 더 있었다. 바로 그림이다. 그는 리콴유 총리 재임 시절 만찬 요리 담당으로 싱가포르에 갔을 때 밤거리의 ‘루미나리에’를 보고 문득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충동이 들어 드로잉을 시작했다. 처음엔 미술 도구를 사용할 줄 몰라 주걱과 숟가락 등 손에 익숙한 주방 도구를 가지고 그림을 그렸지만, 나중엔 그 자신의 ‘습성’대로 숯가루와 송진, 옻 등 자연에서 나오는 모든 걸 이용해 그림을 완성했다. 또 그렇게 완성한 작품으로 국내외에서 20여 차례 개인전도 열었다. “누구한테도 그림을 배워본 적은 없어요. 하지만 음식이나 그림이나 별로 다를 게 없다고 봅니다. 그저 자연이고 자유죠. 요리와 마찬가지로 그림 또한 저를 표현하는 중요한 매체니까요. 요리나 그림은 제가 가진 호기심을 바람이나 물, 나무 같은 세상의 스승을 통해 풀어내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석모도가 보이는 나무 테이블에서 그는 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냐는 우문에 비로소 답을 하기도 했다. “요리사는 마음을 잘 키워야해요. ‘심성’이 중요하죠. 저는 누가 먹어주고 좋아해줘서가 아니라, 요리하는 것 자체가 좋아 요리합니다. 제가 행복해서 요리하니, 그 음식을 먹는 사람들도 어떻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제가 행복을 담아낸 접시가 빈 접시로 돌아올 때 정말 행복해요”라고.
2007년 그가 출간한 <마음이 그릇이다, 천지가 밥이다>엔 “요리는 마음이 그릇이란 말이 새삼 실감 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어야 그를 위해 해주고 싶은 요리가 생기는 법”이란 문장이 나온다. 그에게 요리란 결국 명상과 다름없음을 알게 해주는 말이다. 재료와 자신이 하나가 되고, 만든 이와 먹는 이가 하나 될 때, 비로소 느끼는 행복. 어린애처럼 욕심 없고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야 맛을 알 수 있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다는 그의 말은 점점 화려하고 자극적인 것에 몰두하는 요근래 요리와 방송 프로그램 등의 현상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에디터 이영균(youngkyoon@noblesse.com)
사진 J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