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맛 나는 세상
새로운 술을 찾는 이들의 기호에 맞춘 신생 전통주를 탐미하다.

1 싱글 몰트위스키 특유의 그을린 연기 향이 느껴지는 추성주. 2 영화와 게임에 등장하는 꿀술을 우리 꿀로 제조한 곰세마리양 조장의 꿀술. 3 막걸리계의 돔 페리뇽이라 불리는 복순도가. 4 홍천 대표 특산물인 잣을 끓인 물로 만든 백자주. 5 100% 무농약으로 재배한 논산 찹쌀로 빚은 우렁이쌀 청주.
얼마 전 막걸리를 마셨다. “이건 막걸리계의 돔 페리뇽이에요.” 셰프가 자신 있게 추천했다. 평소 막걸리를 즐겨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최고급 샴페인에 비유되는 술이 궁금했다. 주인공은 요즘 없어서 못 구한다는 ‘복순도가’. 막걸리는 보통 흔들어 마시나 이 술은 그럴 필요가 없다. 천천히 뚜껑을 열면 가라앉아 있던 숙성된 재료들이 자연스럽게 섞이며 바로 마시기 좋은 상태가 된다. 비밀은 천연 탄산에 있다. 100% 국내산 햅쌀을 옛 항아리에 담아 빚는 이 술은 전통 누룩이 발효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천연 탄산이 생성된다. 입안에선 막걸리 특유의 깊고 부드러운 맛과 생기 넘치는 기포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진다.
몇 해 전만 해도 전통주는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명주 또는 2~3대에 걸쳐 명인이 만드는 술을 지칭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만드는 훌륭한 술을 전통주의 범위에 포함시키는 추세다. “취향과 개성이 강한 이들을 겨냥한 신생 전통주가 늘고 있죠.” 안씨막걸리 안상현 대표의 말처럼 최근 전통주 시장에 젊은 감각으로 풀어낸 술이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이들은 고문서 속 술을 현대적으로 복원하거나 지역 특산물을 첨가해 개성 있는 술을 빚어낸다. 혹은 전통 방식이나 지역 특산물과 상관없이 순수하게 자기만의 스타일로 술을 양조하기도 한다. “전통주를 한마디로 정의하긴 쉽지 않지만 우리 농산물로 만든 술이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입니다. 쌀, 보리, 고구마 등 곡류는 기본이고 솔잎, 국화, 각종 과일 등 추가하는 재료까지 고려하면 정말 다채로운 술이 탄생하죠. 얼마든지 새롭고 흥미로운 맛을 낼 수 있어요.” 전통주 칼럼니스트 이지민의 설명처럼 우리 땅에서 난 원료를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양조한 요즘 술. 전통을 계승했건 완전히 새로 창조했건 모두 술맛이며 그에 얽힌 이야기가 흥미롭다.
판타지 세계에서 넘어온 레시피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의 입맛을 사로잡은 술. 그가 한번 맛본 후 SNS에 올려 단박에 스타가 된 곰세마리양조장의 ‘꿀술’이다. 안씨막걸리의 안상현 대표 역시 요즘 가장 재미있는 술이라고 말했다. 꿀술은 본래 쌀, 보리 등 곡물로 만든 술이나 포도주보다 오래된, 선사시대부터 즐긴 인류 최초의 술이라고 알려져 있다. 영화<베오울프>, 판타지 게임 ‘엘더스크롤’ 등에 등장하는 바로 그 술이다. 곰세마리양조장의 유용곤·양유미 대표는 영화와 게임에 나오지만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술에 호기심이 생겨 직접 양조하기 시작했다. 독학으로 익힌 양조 기술로 만족스러운 꿀술을 완성하기까지 3년의 시간이 걸렸다. 정성으로 빚어낸 꿀술은 도수가 높지 않으며 부드럽고 산뜻한 보디감이 매력. 단맛보다는 풋풋한 과실과 꽃 향이 입안을 가득 메운다. “주재료인 꿀은 서울 양봉장에서 구해요. 서울에서 빚는 술이니 서울에서 나는 꿀을 사용하기로 한 거죠. 보통 와인을 만들 때 아황산염 같은 보존제를 넣지만, 보존제를 쓰니 술맛 자체가 달라져서 과감하게 뺐어요.” 일체의 화학 첨가물 없이 우리 꿀이 최상의 맛을 꽃피울 때까지 기다려 환상의 맛을 선사한다.
낯선 전통주, 익숙한 풍미
샴페인에 견주는 복순도가처럼 친숙한 풍미로 다가오는 전통주가 있다. 최근 보틀을 리뉴얼하고 호기롭게 증류주 시장에 컴백한 ‘추성주’. 유리병의 형태, 술의 컬러, 코르크 마개 등 외모를 보면 위스키가 떠오르는데, 한 잔 따라 마시면 그 생각이 더 강렬해진다. 목넘김이 부드럽고 뒷맛이 깔끔한 이 술에서 싱글 몰트위스키 특유의 그을린 연기 향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추성주는 찹쌀과 멥쌀을 기본으로 구기자, 오미자, 산약, 갈근 등 10여 가지 한약재로 빚은 술이다. 두 번의 증류 과정을 거치면서 싱글 몰트위스키처럼 독특한 향과 은은한 맛을 띠는 것. 발효주와 달리 장기간 보관이 가능하고, 오래 보관할수록 더 풍부한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다. 홍천 예술주조에서 새롭게 출시한 이화주 ‘배꽃 필 무렵’은 요구르트를 연상시킨다. 20ml 용량 8개를 1팩으로 만들어 ‘진짜’ 요구르트처럼 하나씩 들고 떠먹을 수 있다.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으면 막걸리 특유의 톡 쏘는 맛과 은은한 잣잎 향이 번진다. 이 술은 물이 거의 들어가지 않아 점성이 높은 것이 특징. 밀로 누룩을 빚는 술과 달리 쌀로 누룩을 만들어 사용하는데, 잘 익힌 구멍떡에 곱게 빻은 누룩을 넣고 발효시키면 수프나 요구르트처럼 부드럽고 쫀득한 질감의 막걸리가 완성된다.
현대의 옷을 입은 지역 특산주
좋은 재료가 좋은 술을 만든다. 지역 특산물을 개성 있는 방식으로 양조한 새로운 전통주. 논산은 우렁이 농법으로 친환경 쌀을 재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우렁이 농법이란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우렁이의 먹이 습성을 이용해 제초하는 농법을 말한다. 이렇게 100% 무농약으로 재배한 논산 찹쌀로 빚은 청주가 ‘우렁이쌀’이다. 재료 자체의 당도가 높아 어떤 감미료를 넣지 않아도 찹쌀 특유의 단맛이 배어난다. 60일간 저온 숙성하고 자연발효를 거쳐 청량감이 두드러진다. 텀블러 형태의 디자인으로 시선을 끄는 ‘술아 막걸리’는 달콤하면서도 깊은 맛으로 미각을 자극한다. 땅과 물 좋기로 소문난 여주에서 난 최고급 햅쌀과 지하수, 누룩으로 빚은 탁주다. 첨가물을 넣지 않고 알코올 도수를 높여 쌀과 누룩의 깊은 향을 느낄 수 있으며 살균을 하지 않은 살아 있는 술이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맛과 풍미가 달라진다. 술아원 강진희 대표는 “10일까지는 쌀의 단맛을, 20일까지는 탄산의 청량감과 새콤달콤한 술맛을, 30일까지는 전통 가양주 막걸리의 드라이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한편 강원도 홍천 잣은 <세종실록지리지>에도 기록될 만큼 명품으로 알려졌다. 산수 양조장에서는 대표 특산물인 잣을 끓인 물로 만든 ‘백자주’를 선보인다. 현직 한의사인 안병수 대표는 건강을 생각한 우리 술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기존 잣막걸리와 달리 심플하고 고급스러운 패키지로 프리미엄 막걸리를 지향하는 이 술은 청량감이 거의 없고 농도가 짙은 편. 드라이한 맛과 입에 착 감기는 고소한 잣의 풍미가 일품이다.
에디터 문지영(jymoon@noblesse.com)
사진 박원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