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how must go on
마임과 마술. 흔히 길거리 공연 정도로 치부되는 퍼포먼스다. 그러나 이를 무언극이라는 장르의 예술로 승화시키며 꾸준히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이 있다. 마임이스트 방도용, 마술 집단 그루잠 프로덕션의 멤버 최철승과 문정석은 오늘도 무언의 몸짓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다.

몸이 말한다 마임이스트 방도용
우리나라에서는 마임이라고 하면 으레 우스꽝스럽고 과장된 몸짓의 팬터마임을 떠올린다. TV나 길거리 혹은 테마파크 이벤트 현장에서 ‘돈 안들여’ 볼 수 있고, 그 내용 또한 짐짓 예상되니 굳이 공연장을 찾을 이유가 없는 퍼포먼스. 마임이스트 방도용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있지만, 굳이 대중의 인식을 깨려고 소리 높일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팬터마임에 국한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말로 떠들며 감히 계몽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마임이라는 예술의 장르가 있고, 그것을 조용히 제 몸의 움직임을 통해 보여주고 싶어요.”
방도용은 2001년 영호남 최초의 마임 극단 ‘파노라마’를 창단하고, 20년 가까이 마임을 해왔다. 마임은 우연찮게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때 연극반에서 활동하다 자연스럽게 경성대학교 연극과에 진학했고, 나름 무대에 자신 있다고 자부하던 그였다. 그런데 대학교 입학 후 첫 워크숍 무대에서 전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무언가에 꽁꽁 묶인 듯 손과 발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원인을 따져보니 결국 경직된 몸이 문제다 싶어 무용과와 체육과 등에서 움직임과 관련된 수업을 찾아 듣기 시작했다. “몸의 움직임에 대한 배움이 갈급해 계속 이어가고 싶었으나, 대학 졸업 무렵에는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건방진 생각인지 몰라도, 마임이라는 분야가 학교에서 배울 것이 많지 않다는 걸 느끼고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두고 자퇴했죠. 그리고 당시 뜻이 맞는 선배 몇 명과 극단 ‘파노라마’를 창단해 활동했습니다. 자체 워크숍을 진행하며 마임을 통한 연극 공연을 꾸준히 해왔습니다. 그러다 2008년 무렵, 우리 학교 1기 선배이자 지금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로 있는 남긍호 선배가 저를 부르더군요. 서울로 올라와 ‘호모루덴스 컴퍼니’라는 자신이 운영하는 마임 극단에 합류해서 활동하라고요.”
서울에서 활동하다 2014년 다시 부산으로 내려왔다. 오로지 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지난 3년 동안 단 한순간도 쉴 수 없었다. 서울에서 활동할 때나 지금이나 파노라마 극단을 계속 유지하고 있고, 개인 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지난 6월과 9월에는 방도용의 퍼포먼스 인생에 큰 획을 그을 만한 작품을 소화했다. <예술가의 자전적 고백 시리즈-Show must go on>과 창작 춤극 <죄와 벌>이 그것이다. “제가 그동안 마임이스트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언극으로 보여준 < Show must go on >은 나 자신을 발가벗겨 대중에게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소소한 제 감정을 몸으로만 보여주니 정말 어렵더군요. 관객이 어느 정도 알고 있거나 예측 가능한 스토리가 아니니까요. 반면 <죄와 벌>의 경우, 모두가 아는 내용을 어떻게 몸짓으로 설득력 있게 보여주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에게 몰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보니 가위까지 눌렸죠. 평소 제가 저지른 사소한 죄까지 다 상기하며, 그 심리에 대한 무언의 동작을 고심했습니다. 그 과정이 고통스러웠어요.”
몸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마임이 좋아 매 순간 열정을 쏟아낼 수 있었으나, 매번 몸으로만 표현해야 하기에 고통스럽다는 아이러니. 그럼에도 그는 변방의 예술을 계속하겠다고 말한다. “어떤 예술을 하든 녹록한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무엇을 하든 스스로 살아 있음을 매 순간 상기하며, 생산적인 힘과 에너지를 내야 하죠. 어차피 죽으면 한 줌의 모래로 사라질 건데, 아낄 게 없죠.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는 겁니다. 그러다 사람들의 감동을 끌어낼 수 있다면 좋은 거고요. 비록 제 몸짓이 대중에게 큰 울림을 주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마임을 통해 내 마음을 정화하고 계속 마임을 할 수 있는 에너지를 스스로 얻을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제가 마임을 계속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왼쪽부터_ 최철승, 문정석.
현실이 매직이다 그루잠 프로덕션 최철승, 문정석
기록에 따르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마술은 그 시작을 기원전 5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만큼 오랜 역사를 이어왔다. 서양에서는 환상 문학과 결합해 일찌감치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받았지만, 마술에 대한 국내 대중의 인식은 여전히 퍼포먼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일까. 국내 마술사들은 국제 대회를 통해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2010년 부산에서 시작한 매직 퍼포먼스 그룹 그루잠 프로덕션도 예외는 아니다. 2012년 영국 세계마술연맹 세계대회 한국 종합 우승, 2014년 미국 LA The Academy of Magical Arts 올해의 마술사상 수상, 2016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의 Asian Arts Awards 베스트 프로덕션 수상 등 소속 아티스트들이 굵직한 국제 대회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중국, 대만, 홍콩, 말레이시아 등의 아시아뿐 아니라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과 미국 각 주, 멕시코, 아랍에미리트까지 국제적 마술 축제와 연맹의 초청 공연으로 연례 일정을 꽉 채울 정도로 세계 무대의 러브콜을 받고 있지만, 국내 활동은 이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그것이 내심 서운하진 않을까? 그루잠 프로덕션의 멤버 최철승은 세계의 큰 무대에 설 수 있어 좋다고 말한다. “올해 8월, 세계 최대 규모의 공연 예술 축제인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저희 공연 <스냅>이 주말마다 전 석 매진 행렬을 기록했습니다. 에든버러 프린지에서 가장 큰 극장 중 하나인 500석 규모의 ‘어셈블리 조지 스퀘어’ 극장에서 말이죠. 국내에서는 쉽게 받지 못하던 수많은 관중의 열렬한 응원과 호응, 앙코르! 국내, 국외 무대를 가릴 이유가 없죠.”
본격적인 시작은 2014년부터였다. ‘잠깐 깼다가 다시 든 잠’을 의미하는 순우리말 ‘그루잠’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걸고, 국내에서 활동하는 실력파 멤버들을 모집했다. 김형준 대표 아래 소속 아티스트와 에이전트만 30명이 넘는다. 2013년부터 기획, 제작에 들어간 논버벌 미스터리 & 매직 퍼포먼스 공연 <스냅>은 처음부터 세계시장을 목표로 만든 그루잠 프로덕션의 대표작이다. 섀도그래피, 미디어 아트, 코미디, 마임, 댄스 등을 마술과 결합해 독창적인 무대 언어로 풀어낸 것으로 그루잠 프로덕션의 소속 아티스트 8명이 연금술사, 드리머, 시간 여행자, 트릭스터(trickster) 등의 역할을 맡아 스토리텔링을 갖춘 매직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그중 최철승과 문정석은 또 다른 멤버 이영민과 함께 ‘트릭스터’ 역을 맡아 열연 중이다. 문정석은 <스냅>의 트릭스터와 자신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스냅>은 특별한 능력을 지닌 장난기 가득한 트릭스터들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봉인된 문을 열면서 시작됩니다. 저 역시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를 따라 마술 공연을 보고 그 환상적인 퍼포먼스에 반해 마술을 시작했죠. 당시 어머니가 친분 있는 마술 공연자를 소개해주셔서 취미로 시작했는데, 이것이 단순한 취미로 끝나지 않고 대학 전공까지 이어졌습니다.”
문정석은 동부산대학교 마술학과에 진학해 전문 마술을 배우기 시작, 지금도 프로덕션에서 꾸준히 실력을 쌓고 있다. 여러 장르의 마술 중 일루전은 그에게 도전 과제로 남아 있다. 또 다른 트릭스터 최철승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마술을 시작, 마술 장르를 상당 부분 마스터한 15년 차 베테랑이다. 그의 공식 첫 대회 출정인 2012년 부산에서 열린 국제매직페스티벌에서 2등을 했고, 2014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국제 마술 대회 FISM에서는 단번에 1등을 거머쥐기도 했다. 어지간한 국내외 대회에는 다 출전해 경험을 쌓았기에 이제는 대회 출전보다 공연에 집중하고 싶다는 그는 부산에서 초연한 <스냅>이 국외뿐 아니라 국내, 특히 부산에서도 더욱 많은 관심을 받길 원한다. 지역 예술 단체로서의 제한적 활동, 마술에 대한 편견, 대중의 무관심 등은 이들을 힘들게 했지만, 한편으론 마술사의 길을 더욱 다지게 한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꿈을 꾸지만, 다양한 장벽 때문에 그것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마술은 그런 점에서 특별한 장르의 예술이에요. 누군가의 상상력이나 꿈, 환상 등을 실제 현실로 끌어들이니까요. 즉 제가 꿈꾼 바가 진짜 현실이 되는 매 순간을 경험하는 거죠. 무대가 크든 작든 저를 비롯한 그루잠 프로덕션의 아티스트들이 꿈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의 마술은 계속될 것입니다.”
에디터 손지혜(프리랜서)
사진 공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