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탕!탕!
추운 겨울이 다가온다. 겨울 하면 역시 국물 요리다. 명사 6명에게 ‘내 생애 최고의 국물 요리’에 관한 이야기와 추천 음식점을 물었다.

정구호 서울패션위크 총감독
남자에게 국물 요리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술 마신 다음 날 아침에는 특히나 더! 나 역시 국물 요리를 좋아하는데, 얼큰하고 시원하며 개운하고 깔끔한 국물 요리는 정말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부산 해운대 미포에는 ‘속씨원한대구탕’이란 가게가 있다. 술 마신 다음 날 필히 들러야 하는 곳인데, 맑게 끓인 대구탕에 소금에 절인 청양고추로 만든 다대기와 식초 몇 방울을 섞어 먹으면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급속도로 해독되는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이 대구탕을 능가하는 강적(?)을 만났다. 부산이라는 도시를 좋아해 자주 찾아가는 나에게 부산 맛집 검색은 일상의 행복과도 같은데, 얼마 전 ‘우럭 잡으러 갔다 다금바리 낚은 격’으로 엄청난 국물 요리를 만나버렸다. 바로 부산 자갈치시장 안에 있는 ‘김해식당’에서다. 이곳은 이미 수많은 미식가를 홀린 듯 기도부터 포스가 남달랐는데 대표 메뉴인 아구수육을 시키자 마치 그 신선함을 뽐내듯 커다란 아구간이 제일 위에 담겨 나왔고, 역시 깔끔하게 잘 조리한 아구 살과 내장이 그 뒤를 이었다. 내 생애 먹어 본 최고의 아구수육이었다. 이윽고 고운 고춧가루를 살짝 넣어 끓인 맑은 아구탕이 작은 뚝배기에 담겨 나왔다. 외견상으론 콩나물과 미나리 몇 가닥, 무 몇 조각이 전부인 소박한 이 국물 요리를 한 숟가락 뜬 순간 마치 수십 마리의 아구를 농축한 듯한 진한 풍미와 함께 칼칼하고 시원한 맛이 내 혀를 강타했다. 지금껏 사랑한 그 많은 국물 요리의 조건을 온전히 한 몸에 갖춘 맛에 바로 KO를 외치고 말았다. 다음에는 아구수육을 제치고 꼭 아구탕을 시키리라 마음먹고 그 집을 나온 것은 당연지사다. 참, 아구탕을 먹고 나와 ‘추억의 찐빵 40년’에서 따끈한 찐빵 하나로 입가심까지 한다면 당신은 아마 천국을 두둥실 경험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김해식당 Add 부산시 중구 자갈치로 51-2
Time 09:00~21:00, 연중무휴
Inquiry 051-255-824288
어윤권 리스토란테 에오 오너 셰프
1999년 여름, 결혼 전 처갓집에 처음 인사하러 갔을 때 얘기다. 지금이야 지역, 출신 학교에 따른 공통적 코드가 거의 없어졌지만 그 당시만 해도 지역, 학교에 따라 코드가 정해져 있었다. 특히 자녀 혼사에는 그 코드가 빠질 수 없었다. 할머님이 내게 제일 먼저 하신 질문이 출생지와 성씨, 종교, 출신 학교, 직업 등이었다. 처갓집은 경주, 부산의 전통적 보수 집안이었다. 장인어른은 지역 엘리트의 수순을 밟은 전형적인 분이었다. 명문고와 명문대, 학사장교를 거친 대기업 임원으로 그 시대의 온전한 보수였다. 장모님도 서울 보수의 온전한 예였다. 명문여고와 명문대, 대기업 근무까지 말이다. 반면 우리 집은 아버지 혼자 혈혈단신 도시 정글에서 살아온 분이기에 너무나도 야생적인 코드였다. 중학교 때부터 본인 문제는 본인이 판단해 실행하고 책임도 본인이 지는 생활이 당연했다. 당시 나는 요리사로서 은회색으로 물들인 머리카락에 빨간 바지를 즐겨 입으며 자유분방하게 살았다. 그런 내 모습이 처가 식구들에게 어떻게 다가갔을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하지만 처가에서는 그런 나를 아무런 반문 없이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맞이해주며 함께 기도하고 닭백숙탕을 내주셨다. 기름기를 모두 걷어 하얀 백자 그릇에 담아낸 백숙탕을 오리지널 경상도식 찬과 함께 참 맛있게 먹었다. 결혼 후 어느 해 명절, 처고모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어 서방 장인은 딸바보야. 그래서 딸이 좋다고 결정한 일에 혹여 상처라도 받을까 아무 말 없이 어 서방이 왔을 때 잘해주었으니 처에게 잘해야 해.” 장인어른 이하 모든 처가 식구가 놀라고 당황한 티를 내지 않고 예비 사위에게 정성껏 식구 대접을 해주며 “잘 부탁한다”는 짤막한 한마디를 건네던 그때가 짠하게 떠올랐다. 이후 남의 눈치도 좀 보고 배려도 생각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내 인생의 탕 요리를 물으면 그날의 백숙탕이 떠오른다. 결혼 이후 잘 만든 경상도 전통 음식을 즐기게 됐기에 이번에는 압구정 충무상회의 갯장어탕을 추천하고 싶다. 산초와 방아잎을 넉넉히 넣어 먹으면 힘이 불끈 나는 기분 좋은 경상도의 맛이다. 갯장어탕이 없을 땐 생대구탕도 좋은 선택이다.
충무상회 Add 서울시 강남구 언주로167길 38
Time 11:30~22:00, Break Time 15:00~17:30, 공휴일 휴무
Inquiry 02-515-6395
송보영 국제갤러리 이사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 생활을 했을 때 얘기다. 봄, 여름, 가을이 가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마주한 유럽의 겨울은 결코 끝나지 않을 긴 터널과도 같았다. 그럴 때마다 곧잘 가곤 하던 음식점이 구니토라야라는 일식집이다. 멋 부리지 않고 별다른 토핑도 없이 맑고 담백한 국물에 면을 말아내는 가케우동과 단정하게 말린 달걀말이 한 접시를 마주하면 마치 익숙한 동네 골목에서 반가운 지인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했다. 일본과 한국에서 나름 잘한다는 우동집에 많이 가봤지만 뱃속과 마음을 따스하게 채워주며 마음에 안식을 주는 솔 푸드를 체감한 것은 파리의 이 작은 일식집에서였다. 목구멍으로 조금씩 넘길 때마다 유학 생활의 외로움을 지그시 녹이는 이 뜨거운 국물 요리야말로 내게는 큰 위안이자 일종의 호사로 다가왔다. 음식이 주는 힘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던 그 순간의 기억만큼은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도 파리에 출장 갈 때마다 한 번씩 꼭 들르는데 유학 시절 나를 지탱할 수 있게 도와준 추억 덕분인지 언제나 특별하게 다가온다. 이젠 조금 더 넓은 곳으로 이전했지만 가게 앞에 늘어선 긴 줄과 그 맛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서울에서 추천하는 국물 요릿집은 중구 다동의 충무집이다. 통영 출신 사장님이 대를 이어 운영하는 음식점인데 봄에는 도다리쑥국, 여름에는 장어탕, 가을에는 감성돔매운탕과 전어 요리, 겨울에는 물메기탕 등 계절마다 다양한 국물 요리를 내놓는다. 특히 해쑥을 넣어 맑게 끓여낸 도다리쑥국은 초봄, 그 짧은 기간에만 맛볼 수 있어 특별함이 배가된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한결 같이 칭찬하는 맛이라 국내외 작가들과 만남을 가질 때면 기분이 한껏 좋아지는 곳이다.
충무집 Add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9길 24
Time 11:00~22:00(평일), 11:00~21:00(주말)
Inquiry 02-776-4088
조희경 가온소사이어티 대표
가온의 주방을 책임지는 김병진 셰프는 지난 8년간 나와 함께 합을 맞춰온 인물이다. 언젠가 그에게 제일 자신 있는 요리를 물은 적이 있다. 오랜 침묵 끝에 나온 답변은 바로 국물 요리였다. 오직 한식이란 외길을 꿋꿋이 걸어온 한국인 셰프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수준은 범인의 상상을 초월하는데, 그런 김병진 셰프가 가장 자신 있고 즐겁게 내놓는 요리가 바로 국물 요리라니 아마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 맛에 탄복해 마지 않을 거라고 자부한다. 모든 요리를 단품이 아닌 코스로 선보이는 가온에서는 진지와 함께 내는 박속낙지탕이라는 요리가 있다. 처음 한술을 뜨자마자 함께 맛보던 이들이 모두 감탄사를 내뱉던 기억이 또렷하다. 겨울잠에 들기 전 영양가를 충분히 머금은 가을 낙지는 그 자체로 최고의 식자재다. 이를 백합과 다시마 육수로 끓여 냈으니 그 개운함이 남다를 수밖에. 게다가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 철에 수확한 신선한 박을 갈라 그 속살을 더하니 탕의 시원함은 더욱 극대화된다. 비록 지금은 보기 힘들지만 초가지붕 위에 보름달처럼 여문 박이 주렁주렁 매달린 풍경을 상상하며 가을의 풍성함과 그 운치마저 느낄 수 있어 여러모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국물 요리라 할 만하다. 가온에서 선보이는 요리의 기본 정신은 가정에서 흉내 낼 수 없는 맛의 극치를 끌어내는 것이다. 결코 잊을 수 없는 혀의 경험을 선사하는 한식 예술가의 음식이 궁금하다면 올 연말 가온에 필히 방문하길 권하고 싶다.
가온 Add 서울시 강남구 도산대로 317
Time 17:30~23:00, 일요일 휴무
Inquiry 02-545-9845
이재영 포시즌스 호텔 서울 총주방장
지금으로부터 약 18년 전, 호텔 요리사로 처음 일한 곳이 역삼동에 있던 R 호텔이다. 바로 길 건너편에 위치한 청평숯불갈비는 퇴근 후에 동료 셰프들과 즐겨 찾던 단골집이다. 우리의 입맛을 사로잡은 이 식당은 전라남도 함평군 출신인 사장님이 직접 운영하는 곳인데 지난 30년의 세월을 넘어 지금도 매일 새벽 마장동에서 곱창을 손수 들여올 뿐 아니라, 비린내를 잡기 위해 쌀가루로 메인 재료를 일일이 깨끗하게 씻고 또 반나절 동안 쌀뜨물에 푹 담가놓는다. 그리고 한 번씩 데칠 때 일일이 기름을 떼어내고 다시 양념을 버무리는 집이라고 들었다. 양념에는 이 집의 특제 고추기름을 넣는데, 고춧가루도 직접 고향에서 재배해 말린 태양초 고춧가루를 사용한다. 육수는 엄선한 사골로 오랜 시간 끓여 얼큰하고 깊은 맛을 내며, 전골 속 곱창에는 곱이 꽉 차 있어 국물이 아주 진하고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가히 일품이다. 곱창전골을 시키면 누룽지탕도 함께 먹을 수 있는데 따로 시킨 단품 메뉴처럼 아주 푸짐하고 맛도 좋다. 추운 겨울날 퇴근하는 길목, 소주 한잔이 생각날 때면 옛 동료와 함께 즐기던 그 맛이 뇌리를 스친다.
청평숯불갈비 Add 서울시 강남구 봉은사로1길 16
Time 0:00~24:00, 연중무휴
Inquiry 02-547-6857
이여영 월향 대표
가끔 휴식이 필요할 때면 제주도를 찾는다. 제주도에 다니기 시작한 지 어언 15년째. 마음의 고향이라고나 할까. 맑은 공기와 푸른 바다, 시원한 바람, 눈이 환해질 정도로 탁 트인 전망도 일품이지만 제주도를 찾는 진짜 이유는 음식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주에 사는 이들도 잘 모르는 제주의 맛을 찾으려고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제주 출신의 한 선배가 어떤 음식을 내게 권했다. “술 좋아하는 너에게 딱 맞는 국물 요리가 있는데 비위에 맞을지는 잘 모르겠다. 모양새가 썩 좋지는 않아서….” 돼지 잡뼈를 푹 끓이고 ‘몸’이라는 해 조류를 잔뜩 넣어 걸쭉하게 만든 몸국. 기쁜 일, 슬픈 일 가리지 않고 늘 제주인의 잔칫상에 오르는 이 국물 요리야말로 나를 제주로 이끄는 가장 큰 이유다. 외식 사업을 하니 내가 좋아하는 몸국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안해본 게 아니다. 직원들과 여러 번 끓여보고 손님에게 권해보기도 했지만 쉽게 히트 메뉴로 이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몸국은 제주에서 먹어야 그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제주에 가면 갈치조림, 옥돔구이, 고등어회 등을 맛보며 제주의 토속 음식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몸국이야말로 제주인의 아픔과 기쁨의 역사가 온전히 깃든 요리다. 몸국을 맛볼 때에야 이게 바로 제주의 ‘맛’이구나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제주를 찾는 수많은 지인에게 언제나 몸국을 가장 먼저 권한다. 제주 여행은 바로 이 소박한 국물 요리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제주 신설오름의 몸국을 권한다.
신설오름 Add 제주도 제주시 고마로17길 2
Time 08:30~익일 06:00, 둘째 주·넷째 주 월요일, 명절 당일 휴무
Inquiry 064-758-0143
에디터 전종현(harry.jun@noblesse.com)
일러스트 수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