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완식 작법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작업 세계, 유기적 공간 활용, 그리고 무엇보다 다가가기 쉬운 미술. 지금 배정완의 작품 세계를 함축한 말이다.

“건축을 공부하고, 왜 미술 작업을 하세요?” 미국에서 공학과 건축을 전공하고, 서울에서 미술가로 활동하고 있는 배정완이 자주 듣는 질문이다. 고등학생 때 미국으로 건너가 MIT에서 공학을,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건축을 공부한 그는 2005년 서울 성곡미술관의 한 그룹전을 통해 ‘작가’로 데뷔, 이후 서울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사실 작품 활동이라곤 하지만, 실제로 그의 작품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작품수가 적은 데다 그마저도 시내 주요 갤러리가 아닌, 대형 상업 빌딩과 몇몇 미술관을 통해서만 선보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지난 작품 활동 기간에 비해 ‘덜’ 알려졌다. 물론 그가 인터뷰 중 그것에 대해 토로한 건 아니지만.
다만 에디터는 그와의 인터뷰에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미술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이후에도 그가 오랫동안 건축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2006년부터 수년간 국내 한 중견 건축설계 사무소에 설계본부이사로 재직, 여러 디자인 컨설팅을 했다. 비슷한 시기 몇몇 대학에선 건축공학과 겸임교수로서 학생들을 지도했다. 이후 국내의 한 주요 방송국에서 미디어 아트 작품을 운용·설치하는 디자인 총감독도 맡았다. 이 정도면 거의 건축가의 이력. 하지만 그는 반문한다. “지난날은 저를 더 깊숙이 들여다보기 위한 시간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누가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으면 ‘아티스트’라고 답하죠. 단, 저는 지금껏 그래왔듯 앞으로도 ‘미술’ 그 자체에 얽매이는 작업은 하고 싶지 않아요.”
그에 관한 몇 가지 정보를 더 첨언해보자. 우선 그의 가족사다. 그의 아버지는 옛 대우전자 회장과 정보통신부 장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등을 지낸 배순훈 S&T중공업 회장이다. 누군지 잘 모르겠다고? 1990년, TV 광고에 출연해 ‘탱크주의’라는 말을 유행시킨 인물이다. 아, 그런데 이는 단순히 배정완을 ‘금수저’로 포장하기 위한 정보 나열은 아니다. 그가 바로 위에서 언급한 ‘얽매임’에 대한 예를 들기 위함이다.

현대모터스튜디오 서울에서 내년 1월까지 전시하는 ‘거울 속 그는 왼손잡이다’의 일부.
고1 때, 그는 학교에 가기 싫다며 외국으로 보내달라고 떼를 썼다. 물론 ‘탱크’ 같은 아버지는 ‘안 된다’고 강경히 나왔다. 하지만 그는 학교에 안 가는 ‘시위’를 벌여 1년 만에 유학길에 올랐다. 이후 명문대에 진학했지만 자유를 갈망하는 그의 의지는 더 강해졌다. 대학원 졸업과 동시에 건축을 때려치우고 ‘식당 요리 보조’가 되겠다며 샌프란시스코로 떠난 그이니 말이다. 물론 그 꿈을 이루진 못했지만. 아무튼 어딘가에 얽매이지 않는 삶, 그에 맞는 작품 활동. 지금의 배정완을 설명해주는 주요 단서다. “예전에 제가 한국에서 학교 다닐 땐 사실 ‘다름’이라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어요. 늘 주변 친구들이 가는 길만 갔죠. 하지만 그게 틀린 길이더라고요. 자신을 찾는 여행을 해본 이들은 그게 잘못된 길이라는 걸 알죠. 그걸 벗어나면 평소 모르던 자신을 발견할 수 있고요. 작가가 예술을 창조하는 과정도 그것과 같습니다.”
그럼 이번엔 그의 작품을 살펴보자. 그의 작품이 지금껏 해온 그의 언행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말이다. 그런데 그의 작품은 정말 새롭다. 기존의 건축, 미술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건축을 닮은 미술’, ‘미술을 닮은 건축’ 같은 애매한 포지션도 아니다. 미술 자체지만 이전과 다르다. 내년 1월 28일까지 현대모터스튜디오 서울에서 전시하는 대형 설치 작품 ‘거울 속 그는 왼손잡이다’도 마찬가지. 노랑과 분홍, 파랑 등 수백 개의 거울형 막대기가 4m 높이의 두 나선형 날개를 감싸 안은 이 작품의 주제는 ‘다양성’으로, 관람객이 언제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다른 인식을 심어준다. 그는 ‘복잡한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을 떠올리며 이 작품을 제작했다. 결코 들어도 잘 모르는 어려운 예술철학이 아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작품 제목 속 ‘왼손잡이’는 무슨 의미일까? “우리나라 사람 90% 이상이 오른손잡이인 데서 따온 제목이에요. 왼손잡이는 10%밖에 되지 않죠. 하지만 이마저도 절반은 교육에 의해 나중에 오른손잡이가 됩니다. 결국 오른손잡이가 95%라는 얘기죠. 하지만 이들은 거울 앞에선 모두 왼손잡이가 됩니다. ‘다름’이란 건 정말 한 끗 차이라는 얘기죠.”
물론 이외에도 그는 지난날 흥미로운 전시들을 선보였다. 일례로 2008년 경주 아트선재미술관(현 우양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소리 기억 빛-Mary had a Little Lamb>이 그렇다. 당시 그는 에디슨의 육성, 과거의 기억을 얘기하는 배우 고현정의 내레이션, 차이콥스키의 발레 <백조의 호수> 음악, 그 음악에 맞춰 추는 듯한 전통무용 영상이 사방의 스크린에서 쏟아져 내리는 영화 같은 설치 작품을 선보였다. 이를 두고 한 평론가는 “건축과 음악, 과학, 철학을 아우르는 복합적 서사를 이끌어낸 보기 드문 통섭적 예술 창작”이라 평했고, 그는 “건축만으로 부족한 게 바로 이런 내러티브”라며 어딘지 모를 ‘셀프 디스’ 같은 말로 화답했다.

2015년 성북구립미술관에서 선보인 ‘Comfortably Numb’.
한편 2015년 성북구립미술관에서 열린 그룹전 <한양도성 프로젝트 원>에선 아크릴 박스 안에 사람의 형상을 새겨 넣은 설치 작품 ‘Comfortably Numb’을 소개했다. 한양도성의 역사와 문화, 예술적 가치를 미술 언어로 재현해야 하는 전시답게 그는 당시 빛과 소리, 움직임과 파장, 가변적 이미지를 활용해 권력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되는 현대사회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덧붙여 그의 작품을 소개하는 글엔 늘 ‘공간의 독특한 해석’이란 말이 등장한다. “건축가 출신답게 작품이 건축적이고 구조적인 데다, 공간을 해체하고 연결하는 방법이 훌륭하다”는 칭찬이다. 이 부분은 그 역시 인정하는 바다. “대부분의 제 작품은 사람들이 그것을 경험하는 방식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특징이 있어요. 몇몇 대형 설치 작품을 예로 들면, 공간 자체는 그 자리에 있지만, 개인의 경험에 따라 그것을 다르게 느낄 수 있죠. 이건 ‘자동차’와는 다른 개념이에요. ‘자동차’는 어디에서 보든 ‘자동차’ 그 자체고, 물건이라 ‘유기적’인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죠. 하지만 제 작품은 언제 어떻게 경험하느냐에 따라 공간 그 자체가 변화하고 생동해요.”
그의 작품은 쉽고 편하고 재치 있다. 이는 물론 표현과 예술관 그 자체가 쉽다는 뜻이 아니다. 대중이 그것을 편하게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작품이 ‘easy’하다는 것과는 다르다. 가만히 있는 공간인 줄 알았는데, 자꾸 뭔가가 바뀌어 색다른 경험을 선사하는 것. 현대미술의 경계가 넓어지고 건축의 조형적 요소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며 생긴, 이전에 없던 건설적 현상이다. 그런데 그는 앞으로 대체 어떤 작품 활동을 하고 싶은 걸까? 또 그의 작품을 쉽고 편하게 여기는 관람객은 그에게 어떤 의미인 걸까? “한국에선 사람들이 여전히 미술을 ‘어렵다’고 인식해요. ‘전문가가 아니라’, 또 ‘미술을 잘 몰라서’라고 중얼거리며 작품에 대해 얘기하죠. 그런데 이건 잘못된 미술 감상법이에요. 누구든 미술 작품을 보고 자신이 느낀 걸 거침없이 표현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옳은 거죠. 앞으로도 저는 미술 작업을 하면서 그런 인식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고 싶어요. 예술의 생명력은 대중이 쉽게 보고 느끼는 것에서 비롯되니까요.”
에디터 이영균(youngkyoon@noblesse.com)
사진 김제원(인물)